“오늘부터 나는 마트 대신 숲에 가기로 했다”
기후 위기와 자연 파괴를 염려하면서도 기꺼이 무한 욕망의 소비 지옥으로 뛰어드는 사람들을 보며, 뭔가 특단의 조치가 필요하다고 느낀 모 와일드는 실험을 하나 해 보기로 했다. 일 년 동안 식료품을 사는 데 일절 돈을 쓰지 않고, 농사도 짓지 않고, 오로지 자신이 사는 스코틀랜드 중부 자연에서 나는 것만을 채취해서 살아가겠다는 것. 물론 약초와 채취 전문가인 그에겐 나름대로 유리한 점이 있다. 그렇다 해도 고대인처럼 야생식만 먹고사는 게 요즘 시대에 가능한 일일까? 그는 과연 굶주리지 않고, 온갖 음식과 소비의 유혹에 굴복하지 않고 무사히 실험을 끝마칠 수 있을까?
지금 이곳의 자연에서 채집한 것들로만
스스로를 먹여 살린 사계절 식탁 일기
채취와 야생식을 한다고 하면 구석기식 식단인 팔레오를 생각하는 이들이 많다. 그러나 자연의 질서를 따르자면 어느 한 가지 식단만 고수할 수가 없다. 팔레오는 육류와 생선이 풍부한 여름철에, 비건은 신선한 푸성귀가 넘쳐 나는 봄에만 적합하고, 감자와 빵 같은 탄수화물 위주의 식단은 겨울철 농경 사회에서나 가능하다. 결국 매 끼니를 자연에서 구하려면, 조상들의 지혜를 참고하되 직접 밖에 나가서 뭘 먹을 수 있는지 알아보는 수밖에 없다.
겨울, 잠들었던 야생의 자아를 깨우다
모 와일드는 이제껏 거의 채식주의자로 살아왔지만 앞으로 일 년간은 무엇이든 먹을 각오를 해야 했다. 우리가 야채 하면 흔히 떠올리는 당근, 애호박, 브로콜리, 피망 같은 것들은 스코틀랜드 야생에서 자라지 않는다.이웃이 잡아다 준 사슴고기가 아니었다면 기나긴 겨울을 어떻게 버텼을까. 낮이 짧은 계절에는 부지런히 움직여야 아직 얼지 않은 분홍쇠비름 잎을 따고 통통한 덩이뿌리 맛이 좋은 땅감자를 캘 수 있다. 직접 몸을 움직이지 않으면 한 끼도 저절로 해결되지 않는 고단한 생활이지만, “먹을거리를 채취하러 밖에 나가면 항상 기분이 좋아진다. 차가운 공기를 한껏 들이마실 때마다 기운이 솟구치고 나 자신을 되찾는 느낌이다.”
그는 자동차 열쇠를 어디다 뒀는지는 늘 까먹어도 한번 먹을거리를 찾아낸 곳은 절대로 잊지 않는다. 몇 년 전 숲에서 길을 잃고 헤매다 멋진 그물버섯을 발견한 적이 있는데, 그로부터 8년이나 지난 후에 표지판도 나침반도 없이 곧바로 그 장소로 돌아가 버섯을 찾아냈을 정도다. 어쩌면 그 옛날 채취인 조상들이 남긴 유전자, 야생의 본능이 숲속 깊은 곳에서만 깨어나는지도 모른다.
이른 봄의 위기, 보릿고개
절기상으론 봄이지만 저자가 사는 언덕 위 목조주택은 여전히 폭설로 고립되어 있다. 식량 채취가 불가능하고 비축해 둔 견과류와 곡물도 빠르게 바닥나는 상황에서, 이맘때면 찾아오는 우울증까지 겹치자 모 와일드는 식욕도 잃고 기력도 잃는다.
그가 어린 시절을 보낸 케냐에서는 건기가 끝나면 다들 비가 오기만을 기다리곤 했다. 하지만 하늘은 매일 구름 한 점 없이 푸르렀고 무자비한 햇볕에 땅이 좍좍 갈라졌다. 그러던 어느 날 저 멀리 지평선 너머에서 천둥이 울리더니 번개가 번득였다. 첫 빗방울이 땅에 떨어지기도 전에 갑자기 눈에 보이지도 않던 수백 가지 초목이 싹을 틔웠다. 비가 올 것을 식물이 어떻게 알았는지 신기할 뿐이었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지금 이곳의 눈 속에서도 생명의 움직임을 목격할 수 있다. 그늘진 구석에 초록빛이 어른거리고, 돌돌 말린 새싹들이 햇살 속에 펼쳐질 날을 기다리며 야금야금 자라고 있다.
마침내 얼었던 땅이 녹자 그는 갓 딴 신선한 버섯을 요리해 먹으며 활력을 되찾는다. 춘분 아침 산책길에 자작나무 잔가지를 꺾었더니 물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수액 채취가 가능하도록 나무에 물이 올랐다는 뜻이다. 이보다 더 멋진 봄의 약속이 있을까.
푸성귀에 배부르고 꽃향기에 취하는 봄
집 근처 산비탈에 앵초 꽃이 만발한 걸 보니 완연한 봄이다. 본격적으로 먹을거리를 찾아 숲으로 바다로 나설 때다. 너도밤나무 잎의 새콤한 맛과 산사나무 잎의 고소한 맛을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이 시기에 돋아난 어린 나뭇잎은 정말 맛있어서 기린처럼 나무에서 바로 뜯어 먹을 수도 있고, 샐러드를 만들거나 발효시키거나 술로 담가도 좋다.
골치 아픈 잡초 취급을 받는 서양민들레도 채취인에게는 반가운 식재료다. 자작나무 수액 시럽을 뿌려 노릇노릇하게 구운 민들레 뿌리를 씹으며, 모 와일드는 이 식물이 어디서 왔는지를 떠올린다. 길가에서, 심지어 고속도로 중앙 분리대에서도 자라나는 민들레는 억센 뿌리를 깊이 뻗어 콘크리트를 부수고 흙에 영양을 공급한다. 민들레뿐 아니라 소리쟁이, 우엉, 엉겅퀴처럼 버려진 땅에 자라나는 식물 상당수는 인간의 간을 해독해 주는 약초일 뿐만 아니라, 지구를 해독하는 터프한 일꾼들이다.
빌베리가 익기를 기다리는 여름
육지 식물의 잎이 질겨지고 해초도 맛을 잃는 여름에는 의외로 먹을거리 구하기가 힘들다. 저자는 현대인의 식단에는 넘쳐 나지만 야생에서는 구하기 어려운 당분과 지방이 부족해 어려움을 겪기도 한다. 급기야 정신 줄을 놓고 피시 앤 칩스 가게로 달려가는 아찔한 순간도 있었지만, 다행히 가게가 문을 닫아 위기를 면했다.
베리류 등 햇과일이 나오기 전까지는 충분한 칼로리를 얻으려면 낚시와 유제품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는 걸 깨닫고 친구네 농장에 염소젖을 구하러 간다. 옛날에는 계절의 변화에 따라 가축을 이끌고 여름 목초지와 겨울 은신처를 오가는 이동 방목을 했다고 한다. 치즈 만들기를 좋아하는 모 와일드는 방목장의 나무 오두막에 살며 우유를 짜고 치즈를 만드는 삶을 상상해 본다. 손으로 무언가를 만드는 일은 채취와 비슷한 매력이 있다. 우엉 뿌리를 캐서 껍질을 벗기고, 구멍 난 양말을 한 땀 한 땀 꿰매는 일은 일종의 명상과도 같다. 이렇게 시간과 수고를 들이다 보면 현재 내가 가진 것에 더욱 감사하게 되고, 그런 감사의 마음은 가장 소박한 삶에도 풍요로움을 불어넣는다.
가을, 자연의 넉넉함과 회복력에 감사하며
먹을거리가 흐드러지는 가을은 가장 바쁜 계절이다. 헤이즐넛도 따야 하고 어수리 씨앗도 모아야 하니까. 모든 씨앗은 살아남기 위해 약간의 독성을 지닐 수 있지만, 이는 욕심내지 말고 조금씩만 먹으라는 자연의 교훈이다.
농약을 치지 않은 초원에서 무더기로 자란 버섯을 따다가 버섯의 멸종을 걱정하던 모 와일드는 땅에 화학 제초제와 살충제를 들이붓는 것이 인간에게도 생각보다 빠른 죽음을 가져올 것임을 경고한다. 토양과 바다가 죽으면 우리에겐 무엇이 남을까? 지구가 훼손되긴 했어도 아직 전부 다 잃은 것은 아니다. 인간에 의해 훼손된 땅에는 언제는 그곳을 복원하러 오는 개척종 식물들이 있다. 자연의 재활용 담당인 버섯은 석유 찌꺼기마저 분해할 수 있는 경이로운 존재들이다. 야생식을 하며 자연의 치유력을 몸소 경험한 덕분에 그는 미래에 대한 희망을 품게 되었다.
“나는 궁핍과 고난을 각오하며 이 한 해를 시작했다.
그러나 내가 발견한 것은 오히려 풍요로움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결승점이 가까워질수록 모 와일드는 아이러니한 기분을 느낀다. 이렇게 고단하고 제약이 많은 생활에도 불구하고 실험을 끝내고 싶지가 않은 것이다. 발걸음이 닿는 어디에서나 제철 식재료를 발견하는 재미, 다른 생각은 전부 잊고 눈앞의 자연에 몰두할 때의 순수한 즐거움은 슈퍼마켓에서 플라스틱 용기에 든 음식을 사는 사람은 결코 알 수 없으리라. 하루 종일 쓰레기를 만들지 않는 기쁨, 식물과 마주 보고 서로 의지하며 살아가는 기쁨은 또 어떤가.
야생식을 하며 얻은 것들 중에는 이웃과 친구들의 관대함이라는 선물도 빼놓을 수 없다. 고대인들이 그러했듯, 야생에서 식량을 구하는 일은 타인을 필요로 한다. 사슴이며 오리며 야생동물 고기를 나눠 준 이웃들, 첫 만남에 물고기 잡는 법을 가르쳐 준 낯선 이, 행여나 굶을까 온갖 식재료를 소포로 부쳐 주고 자기만 아는 생물 서식지를 공유해 준 채취인 동료들이 없었다면 이 무모한 실험이 성공하기는 어려웠을지 모른다. 당연하게도, 자연에서 얻은 풍요로움에는 그 자연의 일부인 인간에게서 받은 다정함도 포함된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돈을 주고 산 것이 아니었다. 식료품 물가가 아무리 올라도 덕다리버섯, 쐐기풀 잎, 별꽃은 여전히 공짜다. 더 많이 갖겠다고, 혼자만 누리겠다고 욕심부리지 않는다면, 자연의 넉넉함은 누구에게나 무료다. 영화 〈미나리〉에서 윤여정이 연기한 순자의 대사처럼.
“미나리는 이렇게 잡초처럼 아무데서나 자라니까 누구든지 다 뽑아 먹을 수 있어.
부자든 가난한 사람이든 다 뽑아 먹고 건강해질 수 있어.”
인간과 자연의 몸과 마음이 한데 건강해지는 길
야생식의 해를 마무리하며, 모 와일드는 자연이 내준 것을 먹고 살아간 날마다 한 그루씩 총 365그루의 나무를 심는다. 진정한 채취인은 ‘오는 정이 있으면 가는 정도 있다’는 것이 자연의 기본 법칙임을 이해한다. 그래서 자연이 공짜로 내주는 것을 받을 때도 존중하는 자세를 보이고, 깊은 사랑과 감사의 마음을 돌려준다.
인간이 모든 생명체와 맺었던 이러한 호혜 관계의 상실이야말로 오늘날 우리가 처한 위기의 핵심이다. 저자는 자연에 온전히 몰입하는 것만이 인간과 지구의 단절을 치유할 방법이라고 직감하고, 이를 증명하기 위한 실험에 도전했다. 결론적으로 야생식으로 생존하는 것이 가능할 뿐만 아니라 매우 건강한 삶의 방식임을 밝혀냈다. 그는 몸무게가 30킬로그램이 줄어 25년 전 옷 사이즈를 입게 되었고, 당뇨병이 있던 친구는 실험에 동참한 지 3개월 만에 혈당 수치가 정상 범위로 돌아왔다. 두 사람 모두 장내 미생물 생태계가 완전히 바뀌었다. 달라진 것은 몸의 건강만이 아니다. 자연과 연결되는 기쁨은 지친 영혼을 위한 양식이다. 모 와일드는 “날씨가 좋든 나쁘든 무조건 산과 들을 돌아다녀야 하는 지금 기분이 매우 좋고 유례없이 건강하며 그 어느 때보다 행복하다.” 이 행복을 느끼기 위해 꼭 시골에 살거나, 엄격한 야생식을 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그저 자연 속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내며 자연이 건네는 말에 귀 기울이는 것만으로도 가능하다.
최재천 교수의 추천사처럼, “인간과 자연의 몸과 마음이 한데 건강해지는 길이 이 책에 담겨 있다. 늘 곁에 두고 실천해 보길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