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00년 미국 유타주의 솔트레이크시티 외곽 지역에서 한 여성의 시신이 발견됐습니다. 시신은 거의 부패돼 뼈 일부와 금발의 머리카락 정도만 남아있었으며, 피해자의 신원을 알아낼 수 있는 신분증이나 다른 소지품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오랫동안 이 피해자가 누구인지조차 알아낼 수 없었습니다. 경찰은 2008년에야 산소의 동위원소비를 분석하는 새로운 방법을 알게 됐고, 과학수사 팀에 피해자의 머리카락 분석을 의뢰했습니다. 과학수사 팀에서는 피해자의 머리카락을 일주일 동안 자란 만큼의 길이대로 잘게 자른 다음 그 부분의 산소 동위원소비를 분석했고, 그 결과를 바탕으로 피해자가 주간 단위로 어느 지역의 물을 마시며 생활했는지를 재구성할 수 있었습니다. 경찰은 피해자가 미국 북서부 태평양 지역에서 이주해왔다고 결론 내렸고, 결국 2012년에 시애틀의 실종자 중에서 피해자의 신원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아직 범인을 잡지는 못했지만, 아무 단서도 없었던 피해자가 누구인지 밝혀낼 수 있었던 것은 물에서 유래한 산소의 동위원소 분석 덕분이었습니다.”
- 〈1. 깨끗하지만 순수하지만은 않은 존재, 물〉, 40쪽
“과학자들은 조심스럽게 온도를 낮춰가며 과냉각 현상이 어느 온도까지 가능한지 실험해봤습니다. 물은 –41℃까지도 액체로 존재하는 것이 가능했습니다. 아무리 조심스럽게 실험해도 –41℃가 넘어가면 무조건 얼음으로 변해버렸죠. 그러면 –41℃ 이하의 온도에서는 항상 결정 구조를 갖는 얼음으로만 존재하는 걸까요? 과학자들은 레이저를 이용해 짧은 시간 안에 냉각시키는 실험 기법을 개발해 액체 물을 순식간에 아주 낮은 온도로 낮춰봤습니다. 그랬더니 흥미롭게도 –123℃ 미만의 매우 낮은 온도에서는 여전히 액체와 같은 모습이 유지되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41℃와 –123℃ 사이의 온도에서는 어떻게 해도 얼음 결정 외에는 얻을 수 없어서 이 구간을 가리켜 ‘no man’s land’, 즉 ‘인간이 도달할 수 없는 영역’이라고 부릅니다.”
- 〈2. 생각보다 까다로운 물질, 물〉, 66~67쪽
“결국 가수분해 반응은 단순히 결합을 분해하는 것 이상의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물은 이 과정에서 분자의 구조를 바꾸고 성질을 전환하며 새로운 기능을 갖게 하는 데 직접 관여하는 반응성 분자입니다. 그러므로 물을 단순히 용매로만 생각하면 유기화학을 공부하는 데 있어 큰 오해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가수분해는 물이 화학의 배우로서 가장 두드러지게 등장하는 사례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물이라는 분자가 화학반응 속에서 유기화합물과 어우러지면서 얼마나 능동적으로 작동하는지를 실감할 수 있습니다.”
- 〈3. 조화와 공존의 매개체, 물〉, 96쪽
“질산 암모늄은 비료의 핵심 성분이지만 강한 폭발성으로 인해 과거부터 폭발 사고가 여럿 알려져 있습니다. 가장 최근에 있었던 사례로 2020년 8월 4일, 레바논 베이루트 항구의 폭발 사고가 있습니다. 이 폭발 사고는 베이루트 항구의 지형을 바꿔놨고, 베이루트 도시 전체에 막대한 피해를 남겼습니다. 항구 내 질산 암모늄과 함께 나란히 보관 중이던 폭죽 주변에 용접 공사를 하다 튄 불에 의한 화재가 발생했고, 이 화재로 폭죽이 폭발하면서 기폭제 역할을 해 최종적으로 질산 암모늄의 대형 폭발 사고로 진행됐습니다. (…) 앞서 언급한 화합물의 다양한 성질 중 조해성(deliquescence)이라는 것이 있는데, 이는 공기에 노출된 물질이 수증기를 흡수해 녹아 수용액을 만드는 물질의 성질을 가리킵니다. 겨울철 도로가 얼지 않도록 뿌려주는 염화 칼슘을 비롯해 수산화 나트륨, 질산 암모늄, 탄산 칼륨 등이 조해성을 지닌 대표적인 화합물입니다. 고체 상태였던 순수한 화합물을 공기에 노출시키면 수증기를 흡수해 수용액이 되기 때문에, 조해성을 지닌 화합물을 온전한 상태로 유지하려면 반드시 수증기가 제거된 조건에서 보관해야 합니다.”
- 〈4. 쓸모없기도 쓸모 있기도 한 용매, 물〉, 111~112쪽
“우리 몸의 놀라운 특징 중 하나는, 외부 환경이 더워지거나 추워져도 내부 체온을 일정하게 유지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이러한 생리적 안정성은 생명 유지에 필수적입니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생화학반응, 특히 효소의 작용은 매우 좁은 온도 범위 내에서만 효율적으로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정밀한 체온 조절 시스템의 중심에는 바로 물이 있습니다. 물은 체온을 조절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존재입니다. 물이 지닌 가장 독특한 성질 중 하나는 비열이 매우 높다는 점입니다. 이는 1g의 물의 온도를 1℃ 올리려면 많은 에너지가 필요하는 뜻으로, 대부분의 다른 용매에 비해 물은 열을 천천히 흡수하거나 방출합니다. 이러한 특성 덕분에 물은 탁월한 열 완충재로 작용합니다. 외부 온도가 급격히 변하더라도, 우리 몸속 세포와 조직에 존재하는 물은 체온의 급격한 변화를 막아줍니다. 물은 열을 저장하고 조절하는 능력으로 다양한 환경에서도 생명이 살아갈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줍니다.”
- 〈5. 생명 활동의 무대이자 연출자, 물〉, 137~138쪽
“연료전지는 실제로 어떻게 작용할까요? 이름에 전지라는 표현이 들어있는 것을 보면, 에너지가 어딘가 저장돼 있으리라 추측할 수 있습니다. 바로 화학적 에너지입니다. 연료전지는 수소와 산소 분자에 저장된 화학에너지를 꺼내 전기에너지로 바꾸는 장치입니다. 그 핵심 원리는 산화(Oxidation)와 환원(Reduction)이라는 두 가지 화학반응에 있습니다. 철이 산소와 결합해 녹스는 것처럼 산화 반응은 이름대로 산소와의 관계로 표현될 수 있습니다. (…) 여기서 중요한 점은 전자를 잃는 산화 반응과 전자를 얻는 환원 반응이 서로 다른 전극, 즉 공간적으로 분리된 장소에서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산화 반응으로 생성된 전자는 외부 회로를 따라 이동해 환원 반응에 사용됩니다. 이런 외부 회로를 통한 전자의 흐름이 우리가 사용하는 전기가 됩니다. 결과적으로 연료전지에서는 물의 생성과 동시에 전기에너지를 얻을 수 있습니다. 이 원리가 연료전지의 핵심이며, 앞서 살펴본 우주선의 에너지 공급 방식이기도 합니다. 더욱이 연료전지 시스템은 오염 물질 없이 순수한 물을 생성하며, 약 60%에 달하는 에너지 효율은 내연기관보다 뛰어납니다. 이런 특성 덕분에 연료전지는 온실가스를 배출하지 않는 무공해 에너지원으로 주목받고 있습니다.”
- 〈6. 에너지를 가득 담은 보물창고, 물〉, 171~173쪽
“앞서 얼음과 물의 물리화학을 통해 설명했던 고밀도 물이나 독특한 얼음의 상태가 엔켈라두스와 같은 내부 바다 행성에서 실제로 관찰된다는 사실이 흥미롭습니다. 물보다 밀도가 낮은 얼음이 언제나 물 위로 떠오르는 것이 아닌 바다 중간에 얼음층이 남아있는 모습입니다. 얼음-물-얼음-물과 같이 번갈아 배치된 얼음층과 바다들은 위성 내부에 독특한 환경을 만드는데, 이러한 샌드위치 구조가 꼭 생명을 뒷받침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생명체의 존재 가능성을 기대하는 이유는 카시니 탐사선이 엔켈라두스에서 분출하는 간헐천을 뚫고 비행하며 함유된 성분 분석에 성공했기 때문입니다. 엔켈라두스의 물에는 지구 생명체를 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여섯 가지 원소인 탄소(C), 수소(H), 산소(O), 질소(N), 황(S) 그리고 인(P) 모두가
녹아있었습니다. 특히 인은 2023년 처음으로 지구 외 천체에서 발견된 셈인데, DNA의 골격을 이루는 성분이자 세포의 겉껍질인 세포막의 재료입니다. 더욱이 지구 생명체 탄생의 중요한 시작점 중 하나인 해양 플랑크톤의 기능을 결정하는 요소가 C106H263O110N16P라는 화학 조성임을 통해 단 하나의 인이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 〈7. 지구를 지구답게 하는 증거, 물〉, 202~203쪽
“또한 염기성 환경은 음식의 색과 풍미에도 영향을 줍니다. 채소를 삶을 때 물에 베이킹소다를 약간 넣으면 엽록소가 안정화돼 밝은 초록색을 유지할 수 있지만, 너무 많이 넣으면 조직이 물러지고 비누 맛이 날 수 있으므로 주의가 필요합니다. 프레첼 반죽을 수산화 나트륨(NaOH) 용액에 담그는 과정 또한 대표적인 알칼리 조리법인데, 반죽 표면의 pH가 올라가면서 마이야르 갈변 반응이 빠르게 진행돼 특유의 진한 갈색과 고소한 향이 생성됩니다. 마찬가지로 중화면(라면)은 반죽에 칸수이(Kansui)라는 알칼리염 용액을 넣어 pH를 높여 노란색을 띠고 쫄깃한 식감을 갖도록 만든 것입니다. 칸수이는 보통 탄산 칼륨(K2CO3)과 탄산 나트륨(Na2CO3)을 혼합한 용액으로, 높은 pH 환경이 글루텐 단백질의 전하를 변화시켜 네트워크를 단단하게 만들고, 전분의 팽윤을 억제해 특유의 탄력과 부드러운 겉면을 형성합니다. 밀가루 속의 색소 성분과의 반응도 달라져 노란빛이 더 또렷해지는 효과도 함께 나타납니다.”
- 〈8. 맛있게 먹게 해주는 재료이자 요리사, 물〉, 22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