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이 길어질수록 자신의 것인지조차 확실하지 않은 여름 풍경이 겹겹이 중첩되어 떠오르기 시작했다. 중첩된 것에는 실감이 없었다. 안은 생각을 멈추었다. 생각을 멈추면, 중첩은 사라졌다.
_11쪽
정한은 그곳에 가닿기를 원했다. 거대한 세상과 연결되었던 순간으로, 안과 마주했던 순간으로.
_36쪽
딸을 잃은 순간 여자의 세계는 끝이 났을 것이다. 하지만 여자의 문제는 세계가 끝났다는 것이 아니다. 끝이 난 세계가 계속된다는 것이다.
_164쪽
너는 내게 기억을 보내겠다고 했지. 먼 길을 돌고 돌아도 결국은 내게 닿겠다고. 나는 네 신호를 알아볼 거야. 그 신호로 너를 찾을 거야.
_183쪽
이건 사람의 감정이 정신 작용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가와 긴밀히 연결된 문제야. 쉽게 말하면 그 애를 알게 된 뒤로 네가 너로 존재하려는 의지가 평소보다 월등히 강해졌다는 뜻이지.
_185쪽
사람의 기억은 가변적이고 불안정해. 일반적으로 기억은 과거의 산물처럼 취급되지만 실은 과거의 기억과 현재의 의식, 그리고 미래에 대한 예측이 엎치락뒤치락하는 과정에서 서로가 서로를 만들어 가는 거야.
_189쪽
감정이 살아 있는 기억 말이죠. 그걸 메시지로 전송한 뒤 사람들로 하여금 잃어버린 진짜 기억을 되찾도록 유도할 계획이었던 거예요.
_191쪽
쉽게 말하자면 기억은 그대로 두고 기억에 깃든 감정을 지우는 거예요. 감정도 기억을 구성하는 요소가 된다는 걸 아실까요? 유니언워크는 다년간 사용자의 의식, 그 밑바닥부터 감정을 지워내는 작업을 수행하고 있어요.
_212쪽
하지만 사람의 마음은 병든 몸처럼 쉽게 내줄 수 있는 게 아니다. 마음을 두고 도망갈 곳은 어디에도 없다.
_250쪽
조각난 과거와 텅 빈 현재, 알 수 없는 미래, 그 모든 순간들 속에서 나는 너의 잔상을 느껴. 희미하고 불완전한 너를 되찾지 못한다면 나는 무엇과도 제대로 연결될 수 없는 거야. 내 자신이 무엇인지도 알지 못한 채로 언제까지고 부유할 뿐이겠지.
_275쪽
산책을 하면 그 많은 사람들 중 하나가 될 수 있을 거라고 했어. 그 속에서 평범한 삶을 살아갈 거라고. 하지만 우리는 호수의 비밀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지.
_291쪽
단 한 번의 메시지로 우리는 연결될 수 있을까? 단 한순간의 연결로 우리는 구원받을 수 있을까?
_31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