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미옥의 종횡무진]
어둠 아닌 햇빛을 낚는 김정식의 '금호동의 달'
풍경 뒤의 풍경
김정식의 『금호동의 달』을 읽었지만, 독후감을 바로 쓰지 못했다.
나는 풍경 뒤의 풍경이 쓸쓸해서 많이 머뭇거렸다.
이 책은 저자가 살았던 1970년대 금호동의 추억이자 성장기록이다.
내가 본 것은 소아마비로 걸을 수 없는 한 아이의 눈동자였다.
어른이든 어린이든 고립된 사람은 눈이 깊다.
나아갈 수도, 물러설 수도 없으면 깊게 파고 드는 수밖에 없다.
혼자 방안에서 오래 앓아 본 사람은 알 것이다.
벽지의 사방연속무늬 속에 숨은 사람의 얼굴이 있다는 것을.
내가 저자에게서 읽은 것은 결핍의 선물 같은 깊은 관찰력이었다.
장애로 걷지 못하는 아이에게 모든 풍경은 각인된다.
나는 그가 자신이 살았던 금호동 계수나무 집의 묘사에 끌렸다.
“나는 집과 대화를 많이 했다. 모로 누워서 마룻바닥에 귀를 대면 상쾌하고 차가운 감촉이 올라온다. 오래된 마룻장은 귀퉁이가 반들반들했다. 반들반들하면서도 서늘한 감촉의 마룻장은 본 적도 없는 할아버지의 손바닥처럼 느껴졌다. 마루가 하는 얘기를 듣다가 똑바로 드러누워 창을 보았다. 창에는 수세미가 드리워져 자랐다. 늙은 수세미, 오래된 마룻장, 본 적 없는 할아버지”
어린 날의 그는 식구들이 모두 나간 늦은 아침에 눈을 뜨고 혼자 놀았다.
초등학생 때는 엄마의 등에 업혀 학교를 다녔다.
그가 휠체어를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중학교 2학년 때였다.
고교 졸업 후 수술을 한 덕분에 목발을 짚고 걸을 수 있게 되었다.
그는 영화 〈언브레이커블〉의 주인공 같았다.
허벅지 뼈가 부러지고 자주 골절상을 입었다.
기억의 순화를 거친 것인지 모르지만 그의 추억은 따뜻하다.
마치 눈이 먼 자가 민감한 청각을 가지듯 그의 장애는 인간의 밝은 면을 찾아낸다.
글 속에 등장하는 금호동 인간 군상은 저마다 결핍을 갖고 있다.
가난, 불우한 환경, 불량배, 낙오자, 그러나 그의 시선은 어둠이 아니라 햇빛을 낚는다.
누구에게나 한가지씩 있는 장점을 기막히게 찾아낸다.
심지어 깡패에게서 생의 철학을 발견하는 장면은 낄낄 웃게 만든다.
그는 25년을 금호동에서 살았다.
산등성이 불빛이 별처럼 깜박거리던 금호동에서 당시 대학 진학자는 많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대학에서 심리학을 전공하고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해외에서 15년간 머물다 돌아왔지만, 그의 가슴 속에 늘 ‘금호동의 달’이 떠 있었다.
그 달은 가난하지만 인정 많았던 금호동 사람들을 비추고 있었다.
아무리 아름다운 풍경의 건축물일지라도 인간이 있어야 완성된다.
그가 계수나무 집을 그리워하는 것은 어린 날의 고독과 더불어 인간에 대한 안도였을 것이다.
중학생인 그가 휠체어를 타고 친구와 언덕에서 봅슬레이로 질주하던 풍경은 내게 정지화면이 되었다. 공중으로 붕 날아올라 그도 친구도 휠체어도 허공에 멈췄다.
그리고 바닥에 뒹군 사춘기 소년들의 웃음소리가 사탕을 깨물 듯 부서졌다.
그는 세상에 대한 원망이 없다.
장애인에게 열악한 대한민국의 모든 시스템에 왜 원망이 없었겠는가.
친구나 이웃들이 장애를 가진 그에게 항상 다정하기만 했겠는가.
그는 인간에게서 어둠이 아니라 한줄기 빛을 발견하는 사람이다.
어린 날의 소외가 깊은 관찰력으로 생의 무기가 된 드문 이다.
김정식의 『금호동의 달』은 장애를 가진 소년의 섬세하고 따뜻한 성장기록이다.
오랜만에 풍경 뒤의 풍경이 보이는 수필집 한 권을 읽었다.
풍경에 투사되는 것은 인간 김정식의 심성이다.
-김미옥(서평가,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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