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7년 뉴욕에서 벌어진 세기의 재판
It’s a bird! : 예술임을 증명하라!
1926년 가을 어느 날, 프랑스에서 출발한 배가 긴 항해를 마친 뒤 뉴욕항에 도착했다. 그리고 화물을 검사하던 세관원들의 눈에 이상한 물건이 포착되었다. 높이가 140cm에 달하고 표면 전체가 매끈하게 마감되었으며 위로 갈수록 가늘어지는 노란색 금속 조각. 이것은 대체 무엇일까. 세관원들은 고민 끝에 이 정체 모를 물건을 ‘실용적인 물건(주방 용품 혹은 병원 용품)’으로 분류했고, 미국 법에서 정한 대로 40%의 관세를 부과하였다. 그러나 이 금속 조각은 프랑스에서 온 조각가 브랑쿠시의 작품으로, 〈공간 속의 새 Bird in Space〉라는 제목이 붙어 있었다. 지나치게 높은 관세는 차치하더라도 자신의 작품이 양산된 주방 용품과 동일한 취급을 받는 일을 참아낼 예술가는 없을 것이다. 그리하여 브랑쿠시는 무려 미국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한다.
『이것이 새입니까?-브랑쿠시와 세기의 재판』은 1927년 미국과 유럽 예술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던 유명한 재판을 다룬 그래픽노블이다. 브랑쿠시는 루마니아 태생으로, 1904년부터 파리에서 거주하며 국립 고등미술학교에서 수학한 후 오귀스트 로댕에게 사사한 조각가이다. 1906년 개인전을 열면서 독자적인 길을 걷기 시작한 브랑쿠시는 오늘날 현대 미술에서 추상 조각을 개척한 조각가로 알려져 있다. “실재감은 외형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물의 핵심에 있다”는 신념에 따라 형태를 단순화하여 존재의 핵심에 접근해 가는 것이 브랑쿠시 조각의 주제라고 할 수 있다. 1926년은 브랑쿠시가 마르셀 뒤샹의 제안으로 뉴욕의 브루머 갤러리에서 전시회를 개최한 해였다. 이미 뉴욕 예술계에서 스타로 떠오른 브랑쿠시는 전시회를 위해 바다를 건너온 〈공간 속의 새〉가 재판의 대상이 되면서 다시 한번 화제의 중심에 오르게 된다.
이야기는 추상 조각 한 점을 둘러싼 세기의 재판을 꼼꼼히 따라가며 재판에서 제기된 여러 쟁점들을 정리해 준다. 재판의 핵심은 ‘이것이 과연 예술인가’ 하는 질문이었다. 전통적인 관점에서 조각은 구상적이고 재현적이어야 했지만 브랑쿠시의 작품은 극도로 단순화된 금속 조각일 따름이었다. 처음 브랑쿠시의 조각을 본 사람들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혼란스러워했다. 머리도, 날개도, 깃털도 없는데 이것이 새라고? 그렇다면 질문을 거듭할 수밖에 없다. 이 작품은 유일무이한 예술인가? 예술가와 노동자는 어떻게 구분할 수 있나? 새와 닮지 않았더라도 새가 될 수 있나? 예술가가 붙인 제목은 절대적인가? 그리고 이러한 질문은 예술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으로 나아간다. 예술이란 무엇인가, 예술임을 증명하는 것은 가능할까, 그 일은 누가 할 수 있는가. 이렇게 해서 브랑쿠시 대 미국의 재판은 예술의 본질과 창작의 자유, 사회의 예술 인식에 대한 심도 깊은 토론으로 나아간다.
무엇이 예술 작품이고 무엇이 예술 작품이 아닌가
현대 예술에 던져진 심오한 질문들
『이것이 새입니까?-브랑쿠시와 세기의 재판』은 재판의 쟁점과 진행 상황을 하나하나 보여주면서 여기서 제기된 다양한 질문들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도록 안내한다. 여러 증인들의 발언에 따라 원고와 피고의 의견이 엎치락뒤치락하고 재판관이 숙고하는 과정을 보면 한편의 법정 드라마라고 보아도 손색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 아름다운 그래픽노블이 다루는 이야기는 단순한 판결 이상의 넓고 깊은 세계를 보여준다. 위대한 조각가 로댕 밑에서 주조 모형을 만들던 젊은 예술가가 미래에 가졌던 불안과 의구심으로부터 시작해 원숙한 조각가로서 추상조각을 선보이기까지 브랑쿠시가 자신의 예술 세계를 펼쳐보이는 데는 산업자본주의가 발전해나가던 20세기 초의 시대상이 반영되어 있다. 당시는 예술과 수공업, 대량 생산품, 기술과 기계 장치의 경계가 유연하게 흔들리고 있던 때였다. 따라서 브랑쿠시의 재판을 따라가는 일은 현대미술의 탄생과 성립을 목격하는 일이기도 하다.
이 작품의 또다른 재미는 20세기 초 활약했던 다양한 예술가와 작가들이 실명으로 등장한다는 점이다. 브랑쿠시의 스승 로댕뿐 아니라 다다이즘의 대표 주자 마르셀 뒤샹이 브랑쿠시의 친구 겸 재판의 적극적인 참관자로 등장하며, 현대 추상화의 길을 열었던 페르낭 레제가 예술적 동료이자 술친구로서 파리에 거주하는 브랑쿠시의 대화 상대가 되어 준다. 이밖에도 미국 조각가 제이콥 엡스타인이 재판의 핵심 증인으로 나서는가 하면, 실용주의 디자인의 선구자 장 푸르베, 모빌의 창시자 알렉산더 칼더, 세계적인 사진가 만 레이, 〈짐노페디〉의 작곡가 에릭 사티, 다재다능한 작가 장 콕토, 부유한 미술 수집가 페기 구겐하임 등 예술사의 쟁쟁한 인물들이 중요하거나 사소한 인물로 여기저기 얼굴을 내민다. 말하자면, 『이것이 새입니까?-브랑쿠시와 세기의 재판』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 역사적 인사들인 것이다. 사실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이야기라 당연한 일이겠지만 브랑쿠시의 재판이 예술사에서 얼마나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새가 날아오르는 순간의 정수를 표현하고자 했다”는 브랑쿠시의 말은 〈공간 속의 새〉가 깊은 통찰에서 비롯된 예술적 과정의 결과물임을 보여주는 진술이었다. 브랑쿠시는 예술가라면 전통적인 형태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표현해야 한다고 강조한 바 있다. 작가 아르노 네바슈는 페이지마다 특징적인 색의 대비를 통해 강렬한 이미지를 포착함으로써 브랑쿠시의 예술관을 21세기 방식으로, 혹은 그래픽노블의 방식으로 펼쳐낸다. 작가가 이 이야기를 새로운 장르인 그래픽노블을 통해 풀어냈다는 점도 의미심장하다. “무릇 예술이란 항상 시대와 함께 변화하며, 그 정의 역시 고정된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재해석되고 확장되는 것이니 말이다.”(옮긴이의 말 중에서) 재판이 열리는 뉴욕과 브랑쿠시가 미친 듯이 작업에 몰두하는 파리를 오가며 전개되는 이야기는 실화가 가진 에너지를 품고 있는 동시에 질문과 해답으로 이어진 현대 예술에 대한 통찰을 보여준다. 미술사와 전시기획 전공자인 옮긴이 박재연의 해설도 눈여겨볼 만하다. 감각적이고 지적인 그래픽노블로 오래오래 들여다보기 좋은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