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휴고상 · 네뷸러상 · 로커스상을 동시에 수상한 최초의 소설 ★★
누구나 흥미롭게 즐길 수 있는 소프트 SF의 걸작
배리 B. 롱이어(Barry B. Longyear)의 에너미 마인(Enemy Mine)이 허블에서 출간되었다. 이 작품은 휴고상과 네뷸러상, 로커스상, 존 W. 캠벨 신인작가상을 동시에 수상한 최초의 소설로, 이 기록은 단 한 번 무려 38년이 지나서야 경신될 정도로 희소한 가치를 지닌다. “이야기가 너무나 훌륭해서 ‘휴고상’ 느낌이 가장 충만하다”라는 아이작 아시모프의 평처럼 에너미 마인(Enemy Mine)은 작품성으로 신뢰받았을 뿐 아니라 미국에서 출간 당시 엄청난 화제를 불러일으키며 곧장 볼프강 페테르젠 감독에 의해 동명의 제목으로 영화화되었다. 그 영화는 소련에서 상영된 최초의 서구권 SF영화라고 기록된다. 아울러 〈12 몽키즈〉와 〈스타트렉: 피카드〉 등의 TV 시리즈를 집필한 테리 마탈라스가 각색을 맡아 리메이크된다는 소식도 전해졌다.
에너미 마인(Enemy Mine)은 SF의 열혈 독자가 아니더라도 누구나 흥미롭게 읽고 즐길 수 있는 걸작이라고 할 법하다. 누군가에게는 인생 SF라는 소회가 자자한 이 소설은 사실 1994년에 우리나라에 처음 소개되어 지금은 정가보다 훨씬 웃도는 중고가로 판매되는 앤솔러지 『환상특급』에 ‘적과 나’라는 제목으로 처음 실렸다. 이후 어슐러 K. 르 귄의 소설 어둠의 왼손과 제임스 캐머런의 영화 〈아바타〉의 사이를 잇는 기념비적 작품으로 꾸준히 복간을 요청받아온 것이다.
에너미 마인(Enemy Mine)은 지구인과 외계인 조종사가 전투를 하던 중 한 행성에 불시착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적으로 만났지만 금세 그 둘은 우정을 나누는데 이 소설에서 무엇보다 두드러지는 지점은 지구인이 외계인 아기를 맡아 키운다는 설정이다. 흥미진진한 외계인 육아기라 할 만한 에너미 마인(Enemy Mine)은 뭉클한 감동을 선사한다. 유머러스한 입담, 예상치 못한 전개, 레트로하고 향수를 자극하는 감수성으로 무엇보다 재미있는 소설이지만, 지금 시대의 화두인 ‘돌봄’ 그리고 타자와의 공존과 존중이라는 큰 주제를 담았다. 아이부터 어른까지 꼭 읽어봐야 할 SF 필독서라 할 만하다.
지구인이 외계인 아이를 맡아 키운다면?
불시착한 행성에서 대면한 징그럽게 귀여운 나의 적
“자미스, 넌 드랙이야. 드랙은 한 손에 손가락이 세 개야.”
“이르크마안!”
놈이 내뱉었다.
“메스꺼운 드랙 놈아!”
나는 두 손을 가슴 앞에서 흔들었다.
“덤벼, 이 드랙 자식아! 와서 덤벼봐!”
“이르크마안 바아, 코루움 수!”
_7쪽
지구인 데이비지와 드랙인 쉬간은 파이린 4호라는 무인 행성에 불시착한다. 인간과 드랙. 그 두 종족은 우주의 행성들을 개척하는 중에 맞부딪치며 오랜 세월 적대 관계로 지내왔다. 인간한테 드랙은 그 생김새부터 꺼려지는 존재다. 노란 피부에 노란 눈동자, 얼굴은 코가 거의 없다. 손가락은 셋이다. 양성체라서 한 몸에 남성과 여성 생식기가 함께 있다. “두꺼비 낯짝”이라는 멸칭이 만연하다. 하지만 데이비지와 쉬간은 이 무인 행성에서 처음 대면해 어쩔 수 없이 손을 맞잡을 수밖에 없다. 척박하고 고립된 환경에서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하므로. 머물 수 있는 집을 짓고, 땔깜과 식량을 구하며 비축하고, 바람과 파도를 피하고, 봉화를 올려 구조 요청을 하는 와중에 그 둘은 결국 친밀한 사이가 되어버린다. ‘에너미 마인Enemy Mine’, ‘나의 적’으로 ‘우리’가 되어서 서로의 언어를 배우며 문화를 알아간다. 특히 데이비지는 드랙의 문화를 깊숙이 배워나가며 드랙 종족에 대한 편견을 버린다. 오히려 경외감마저 품는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는 사이 임신한 상황이었던 쉬간의 출산일이 다가왔다. 하지만 이럴 수가, 불행히도 쉬간은 아기를 낳다가 죽었다! 데이비지는 이 노랗고 조그만 외계인 아기 자미스를 키워야 한다.
“자미스.”
“예, 삼촌?”
“자미스, 넌 드랙이야. 드랙은 한 손에 손가락이 세 개야.”
나는 내 오른손을 들어 손가락들을 흔들었다.
“난 인간이고 손가락이 다섯 개지.”
나는 그때 어린애의 눈에서 눈물이 솟는 것을 보았다.
“어른이 되면 네 번째, 다섯 번째 손가락이 생기나요?”
나는 앉아서 자미스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아이는 자신의 다른 두 손가락이 어디로 가버린 건지 궁금해하고 있었다.
_109쪽
소설은 이제 데이비지와 자미스에게 초점을 맞춘다. 인간 아기도 키워본 적도 없는데, 하물며 외계인 아기라니. 데이비스는 이 아기의 생리가 어떨지 그러니 어떻게 다뤄야 할지 막막하기만 하다. 반면 이 조그맣고 귀여운 생명체 자미스한테는 모든 게 신기하기만 하다. 이야기는 어떻게 전개될까? 둘은 함께 잘 적응할 수 있을까? 각자의 행성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외계인과 인간의 조우는 SF의 오랜 테마다. 하지만 인간이 외계인 아기의 삼촌이 되어 돌봄의 주체가 되는 이야기는 값지면서도 색다른 관심을 불러 모은다. 몽글몽글한 감동을 선사하는 에너미 마인(Enemy Mine)는 무척이나 귀여운 SF로서 독자에게 가닿을 것이다.
“서로 대화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전쟁을 멈출 수 있겠어요?”
돌봄과 반전(反戰)과 공존의 가치를 되새기는 소설
소설의 묘미는 또한 외계 종족 드랙인의 독특한 전통과 관습에 있다. 데이비지는 쉬간한테서 가계의 전통을 습득한다. 그리고 쉬간이 죽자 오히려 자미스에게 전통을 알려줘야 하는 저지가 된 것. 인간 데이비지는 아이의 보호자로서뿐 아니라 드랙 문화의 매개자 혹은 전수자 역할을 수행하는데, 그렇게 서사가 진행하는 동안 중요하게 드러나는 드랙인의 전통은 은은한 교훈을 준다.
“제리바 가계의 다섯 이름은, 그 이름을 지닌 이들이 반드시 행적을 추가해야 해. 이름이 아니라 행적이 중요한 거지.”
_136쪽.
드랙인이 이름 짓는 방식은 인간의 방식과는 다르다. ‘고티그’ ‘쉬간’ ‘자미스’ ‘타이’ ‘하에스니’라는 다섯 이름만 쓴다. 이름이 그리 중요하지 않은 까닭인데, 더욱 중요한 건 한 사람이 살아온 내력이다. 그리하여 이름에는 행적을 반드시 추가해야 한다. 타고나 주어진 어떤 것보다 살아가며 만들어나가는 능동적인 삶의 모습에 가치를 부여하는 것이다. 드랙인은 다 큰 어른으로 인정받으려면 가계 기록 보관소 앞에서 행적을 포함한 가계의 역사를 암송해야만 한다. 이는 데이비지가 자미스에게 가르쳐야 할 임무이기도 했다. 이처럼 윗대의 행적과 역사를 깊이 인식하는 일로서의 성인식은 이 세계에서 우리가 조상 아래 이어져왔으며 또 이어져나가야 할 생명체라는 걸 상기시키고 반성케 하며 추구해야 할 삶의 가치를 되돌아보게 한다.
물론 소설은 타자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에 대한 이야기이다. 소설 제목인 ‘Enemy Mine’은 ‘My Enemy’와는 뉘앙스가 다르다. 후자가 적대 관계를 암시한다면, ‘Mine’이 ‘Enemy’를 뒤에서 수식하는 구조에서는 그 말이 적이지만 교류하고 협력한다는 뉘앙스를 지닌다. 작품에서는 제목이 드러내는바 우정을 도독하니 그려내며, 서로를 적으로 만드는 세계 상황을 넌지시 비판한다. 특히나 자미스라는 아이의 시선을 통해서는 더욱 절묘하게 나타난다. “서로 대화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전쟁을 멈출 수 있겠어요?”(139쪽)라는 무구한 질문이 깃들어 있으며, “통역사가 되어서 전쟁이 끝나게 돕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요.”(140쪽)라고 말하는, 어른을 반성케 하는 아이의 선한 마음이 어른들을 성찰하게 한다. 지금 지구에서도 전쟁은 여전히 지속되고 폭력은 난무한다. 타자에 대한 적대감과 차별은 더욱 팽배해지고 있다. 휴고상, 네뷸러상, 로커스상 동시 수상에 빛나는 걸작이자, 재미있고 뭉클한 소설이면서도, 돌봄과 반전(反戰)과 공존의 가치를 되새기는 너무나 시의적절한 SF가 다시 번역되어 여기 도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