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와 같이 정조는 기본적으로 문과 무를 동일하게 인식하였지만 실질적으로는 실용의 가치가 있는 무에 대해 더 적극적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정조는 이러한 인식을 바탕으로 무예가 뛰어난 오늘날 평안도 지역인 서북(西北) 지역민들을 적극적으로 등용하고자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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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직전인 1583년 함경도의 6진 지역을 공격한 여진족의 니탕개(泥湯介)의 난을 계기로 병조 판서 이이(李珥)는 필요한 무인을 확보하기 위해 무과의 선발 인원을 크게 확대하고 비정기 시험인 각종 별시(別試)의 시행 횟수도 늘리기 시작하였다. 무과 선발 인원을 크게 늘리고 각종 별시를 자주 시행하는 추세는 16세기 말 임진왜란 기간 및 17세기 초 광해군 대에도 대외적인 어려움에 대처하기 위해 계속 유지되었다. 조선 후기 무과의 폐단으로 지적되는 이른바 만과(萬科)의 출현이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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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집안이 그의 외가가 있는 아산으로 이주한 것도 그가 무관으로 전환하는 데 중요한 배경이 되었다. 이순신의 부친인 이정이 처가가 있는 아산으로 이주한 것은 처가의 전장(田莊)이 있는 곳으로 당시 아산은 궁벽한 시골이어서 제대로 된 사족 사회가 형성되지 못한 곳으로 유교적 영향력이 타 지역에 비해 높지 않은 곳이었다. 대신 무예를 익히는 데에는 유리한 지역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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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화는 유교의 기본적 예절인 혼정신성의 의미, 즉 밤에는 부모의 잠자리를 보아 드리고 이른 아침에는 부모의 밤새 안부를 묻는 것조차 모르는 무인에 대한 이야기이다. 또한 무사 3인이 무과 회시의 강경에서 엉터리 답변을 늘어놓는 다음의 사례는 당시 무인의 학문적 수준의 일단을 보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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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약용의 무과 개선안은 기존의 무예 과목에 강서 과목을 대폭 추가한 것이었다. 강서 과목은 반드시 ‘무(武)’와 관련된 내용을 위주로 변형하여 시험하려 하였다. 이는 무과 응시자가 무예 실력을 갖추고 있는 것을 검증하는 데 그치지 않고, 전술·전략을 충분히 이해하여 실제로 국방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지 확인하려는 조치였다. 그는 무과 응시자의 선정과 급제자의 선발및 관직 진출을 유기적으로 연결하여 ‘식년시’로 통합하였다. 관직의 수에 비례하여 급제자와 응시자의 수를 제한하여 유능한 지방 사족 내지 양인에게도 관직 진출과 고위 공직에 임용될 수 있는 최소한의 기회를 보장해 주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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