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국대전』에 따르면, 양인(良人)은 누구나 과거에 응시할 수 있었다. 단 「예전(禮典)·제과(諸科)」 조에 따르면, 경제 범죄를 저지른 관원의 아들, 재가(再嫁)나 실행(失行)한 부녀자의 자손, 서얼과 그 자손은 과거에 응시할 수 없었다. … 법적으로는 과거 응시가 금지된 이들을 제외한 양인은 누구나 과거에 응시할 수 있다고 했지만, 현실적으로 과거는 누구나 응시할 수 있을 만큼 간단한 시험이 아니었다. 과거에 응시할 정도의 학업을 성취해야 했고, 합격할 때까지 시험 응시에 필요한 비용 등이 뒷받침될 때 가능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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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령은 10년 동안 시행된 문과에는 약 53%인 8회에만 응시했던 반면, 생원진사시에는 약 87.5%인 7회에 응시하였다. 그가 이처럼 생원진사시에 주력하였던 것은 왜일까? 문과 응시 자격은 통훈대부 이하 관직자, 생원·진사, 그리고 학업 중인 유학 등에게 주어졌다. 그러나 김령이 시험을 치렀던 17세기 전반기 문과 급제자는 관직자 43.5%, 생원·진사 42.4%, 유학 13.9%로 관직자와 생원·진사가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김령은 생원진사시 입격이 문과 응시의 지름길이라고 인식한 것이 아닐까 추측된다. 게다가 선대 대대로 생원시에 입격하였기에, 생원진사시 입격이 더욱 절실하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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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생원진사시에 응시했던 조극선은 30세 이후에는 생원진사시에 전혀 응시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그의 일기에 의하면, 그는 1623년 지인들과의 모임에서 생원진사시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피력하였다. 그는 문과 급제는 나라에서 법으로 정해 그 길이 아니면 관원이 되어 바른 도(道)를 행할 수 없으니, 선비들이 과거에 매달리는 것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생원진사시는 관원이 되어 바른 도를 행하는 것과는 무관하니, 굳이 응시하지 않아도 된다고 판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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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경 시험에서 10분을 받았으나 제술에서 생획을 획득하지 못한 조세환이 낙방한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그는 1654년 12월에 다시 상경하였다. 그리고 1655년 1월, 2월에 성균관과 반촌에 머물며 유생 전강에 들어가 2분의 점수를 하사받았다. 그는 유생 전강의 은사 덕분에 1657년 정유 식년 문과에서 초시를 건너뛰고 회시에 바로 응시할 수 있었다. 그는 2년여 동안 오직 경서 공부에만 매달렸다. 그 결과 회시 초장 강경 시험에서 『주역』 약, 『시경』 순통, 『서경』 순통, 『논어』 통, 『맹자』 순통, 『중용』 순통, 『대학』 통을 받아 총 14분으로 회시에 급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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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윤석의 정시 문과 응시 점유율은 63.6%에 달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황윤석이 유독 정시만을 고집해서 빚어진 것은 아니다. 1752년 이후 25년간 시행된 59회의 비정기 문과 가운데 정시 문과는 점유율이 50.8%에 달하는 30회가 시행되었다. 1755년, 1756년, 1757년에는 해마다 2회의 정시가 시행되었다. 1759년 「과폐이정윤음」이 반포된 이후 정시는 1년에 1회 이상 시행되지 않았으나, 「과폐이정윤음」이 철훼(撤毁)된 1766년과 1775년에는 한 해에 4회의 정시가 시행되었다. 1771년에도 한 해에 2회의 정시가 시행되었다. 이처럼 영조 후반에 정시 시행이 급격히 증가하였으므로, 황윤석의 정시 문과 응시도 덩달아 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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