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우렐리오가 실린 들것이 아주 잠깐 우리 앞에 멈춰 섰다. 머리를 한쪽으로 돌리고 있어서 우리는 그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여전히 고통을 호소하고는 있었지만 이제 진통제 효과가 나기 시작했는지 신음 소리는 확연히 작아져 있었다. 그와 우리의 거리가 무척 가까웠기 때문에, 만일 뽑히지 않았더라면 그의 두 눈은 분명 우리를 노려보았을 것이다.
ㅡ47~48쪽
나는 나를 둘러싼 모든 것의 관객일 뿐 아무것도 건드릴 수 없었다.
타인과 함께하는 공간에서 내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전형적이고 공격적인 남성성을 흉내 내는 데 점점 더 능숙해진 덕분이다. 나는 그것 역시 거울 앞에서 연습했다.
거울은 내 모든 거짓말과 아픔, 명멸하는 아름다움의 증인이었다. 그 앞에서 나는 나를 보지 않고도 보는 법을 배웠다. 로봇이 되는 법을 배웠다.
ㅡ57쪽
“나는 고기도 생선도 아니야, 제이.” 나는 두 손으로 그의 얼굴을 감싸고 내 얼굴 가까이 끌어왔다. “나는 나를 위한 이름을 큰 소리로 말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 내게 꼭 맞는 이름을. 하지만 나는 그런 이름이 없어. 난 그게 두려워. 두려움에 빠지는 게 싫지만. 난 한 번도 내 몸을 보여준 적이 없어. 썩어가는 고깃덩어리로 변해가고 있으니까. 도저히 그 미로에서 빠져 나올 길을 모르겠어. 사람들이 바라는 모습이 되려고 나도 무진 애를 썼지. 내 뺨을 때리면서까지 꿈을 멈추려고 했어. 마법의 거울 속에서 별들에 둘러싸여 춤을 추는 환상적인 네 모습을 보는 꿈을 꾸다가 새벽에 깨어나 내 뺨을 때리는 마음을 넌 모를 거야. 다른 사람들을 속일 수는 있어. 내가 잘하는 일이기도 하지. 하지만 이건, 여전히, 여기 있어.” 나는 제이의 얼굴에서 손을 떼고 두 손으로 내 가슴을 가리켰다.
ㅡ134~135쪽
홀로 고립된 여성으로서, 성적으로 왜곡된 남성으로서, 살아있음을 느끼기 위해 이따금 엉덩이를 들어올려야 하는 사람으로서 혼자 굴욕감을 참아야 했다.
남성성을 가장하고 출산 후 엄마가 자랑스러움을 느꼈다는 사나이로 행세하며 사냥의 신을 피해 다님으로써 나는 야만적인 상황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 잔혹한 벌을 받는 다른 사람들을 보면서 도저히 나는 그런 형벌을 버텨낼 자신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ㅡ157쪽
그녀가 내게 더욱 세게 밀착해올수록 나는 더 저항했고 더 멀어졌다. 여자가 도발해낸 발기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 나는 내 몸을, 그것이 그리는 평면과 곡선을 과도하게 인식하게 되었다. 도저히 나 자신을 버릴 수 없었다. 에스트레야의 느리고 아름다운 곡선과 하나가 될 수 없었다.
지금 내가 내 안의 여성을 배반하고 있는 게 아닐까, 온몸으로 거부하던 남성성에 항복하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남자 별, 여자 별만 있는 이분법적 태양계의 중력의 덫에 걸려 그 궤도를 도는 눈먼 천체였다. 바로 그 덫이 내 껍데기 속에 나를 차곡차곡 접어넣어 내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다른 여자에게 삽입할 수 있는 가능성을 막았다. 에스트레야는 칼립소였고 나는 내가 오디세우스가 될까 봐 두려웠다.
ㅡ178~179쪽
“난 네가 발베르데 거리에서 내 엉덩이에 올라타는 녀석들이랑 같은 차림새를 하고 여기 오는 걸 보는 게 가슴 아파. 그러고는 화장실에 들어갔다 나올 때는 엉덩이를 흔들면서 목소리가 변해서 나오지. 여기 들어온 지 십 분 만에. 얘야, 고작 십 분 만에! 그러니 그 반대도 이제는 놀랍지 않아. 화장을 지우고 하이힐을 벗으면 너는 또다시 저 반대쪽에 가 있어. 그건 널 죽이는 거야, 죽이는 거라고.”
ㅡ201~202쪽
타격은 계속되었다. 이제 내 몸은 내 몸이 아니었다. (중략)
두세 번 일어나려고도 해보았지만 관절이 없는 것처럼 다리가 풀려버렸다. 달려서 도망치는 건 꿈도 꿀 수 없었다. 나는 에우헤니아의 부츠를 떠올렸다. 계단 어디에 그대로 있어야 할 텐데……. 삼킬 수도 없을 정도로 입 안 가득 피가 고였다. 무릎을 접고 팔꿈치를 세워 몸통을 지탱하려고 애쓰며 피를 토해냈다.
“이 호모 새끼가 간까지 토하겠어! 거기를 갈겨!”
ㅡ226~227쪽
내 직업은 월급은 쥐꼬리만 하고 근무 시간은 굉장히 길었다. 책을 파는 일이 나를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으로 만들어주지는 못했지만, 글과 더불어 살면서 실제건 전설이건 간에 다른 사람들의 삶과 가까이 지낼 수 있었다. 나 자신의 삶을 온전히 꾸릴 수 없는 나로서는 꼭 필요한 것이었다. (중략) 내 삶은 삶이 아니었지만, 서점에는 나의 무한한 갈망을 살찌울 수 있는 끝없는 환상의 이야기들이 가득했다.
ㅡ235~236쪽
나는 여자 옷을 모두 쓰레기통에 버렸다.
스커트, 드레스, 스타킹, 신발만 버린 것이 아니라 그 이상의 것을 모두 버린 것이 분명하다. 나는 추워서 다리가 저릴 때까지 쓰레기통 앞에 서 있었다. 진눈깨비가 방금 박박 밀어버린 머리 위로 미끄러져 얼굴 위에서 녹아내리던 것을 기억한다. 더는 떨고 있을 수 없었을 때 나는 그곳을 떠났고 다시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자살을 선택할 결단력이 없는 나 자신, 이 모든 아픔으로부터 나를 해방해줄 최후의 용기에 도달할 수 없는 나 자신이 치욕스러웠다.
ㅡ239쪽
“난 당신처럼 되고 싶지 않았어요. 비겁한 좀팽이 남자들이 당신을 대하는 것처럼 사람들이 나를 대할까 봐요. 그래서 내가 그런 남자 중 하나가 되려고 온 힘을 다했죠. (중략) 우리도 행복해질 수 있는 거, 맞죠, 마르가리타? 허락하신다면 검은색 금박 앨범은 내가 가질게요. 나한테 필요한 물건이거든요. 그 앨범을 넘겨 보면서 우리도 자부심을 품고 살 권리가 있다는 거, 불행은 저들이 우리에게 덮어씌운 것일 뿐, 우리가 마녀의 표식이 새겨진 채 태어난 게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하니까요.”
ㅡ267~26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