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언가를 미워하는 다른 사람을 보면 가장 먼저 이 사람은 무엇을 중요하게 여기는 건지 떠올리는 습관이 생겼다. (…) 상대방 역시 나처럼 딱히 좋은 것의 집합은 아닌 모양이라고. 그런 습관은 상대가 나를 곤란하게 해도 그를 견딜 수 있게 해주는 힘을 내게 길러준다. 미움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생각할수록 사람을 더 잘 견디게 된다는 건 조금 이상하지만, 정말로 그렇다. 무언가를 좋아한다는 건 그것대로 멋진 일이다. 그러나 무언가를 미워한다는 것 또한 때로는 좋은 일이다. 거기에는 거기서 찾아낼 수 있는 것들이 있다._9쪽
그러나 그 와중에도 호두라는 세상 제일의 개 때문에, 다른 개들은 순식간에 호두보다 못생겨진다. 엄마의 가장 큰 문제는, 엄마가 수많은 개 중 호두를 가장 사랑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엄마의 인성에 문제가 있는 게 아닐까 걱정하는 대신, 제발 남의 개 흉 좀 그만 보라고 말하며 웃음을 터뜨린다. 엄마는 민망해하면서도 여전히, 다른 개는 호두보다 못생겼다고 꿋꿋이 속삭인다. 모든 걸 똑같이 좋다고 말하지 않는 게 자신의 사랑이라는 듯이. 흉보는 일과 사랑은 붙어 있다는 듯이. 거기에서 나는 균등하지 않은 사랑을 발견한다._15쪽
이토록 많은 말이 오가는 세상에 말 한마디가 그토록 크게 사람을 흔들 수 있다는 걸 생각하면 놀라고야 만다. 나를 흔들던 말 또한 나를 이쪽으로 데려왔음을, 내가 무언가를 그 안에서 발견했다는 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그 밤 안도 속에서 깨달은 건 나를 격려해주는 이가 없어도, 심지어 누가 나를 흔들어놓고 수면 아래로 밀어 넣는다 해도, 나는 내가 원하는 걸 쉽사리 포기하지 못하는 사람이란 사실이었다. 그로 인해 생겨난 불안과 슬픔과 무력감, 또 그에 따른 오기와 반발심을 동력 삼으며, 나는 내 안에서 끝내 살아남은 무언가를 마주했다._25쪽
사랑하는 것, 욕망하는 것 앞에서 결코 아무렇지 않을 수 없는 스스로가 찌질하고 옹졸하고 우스꽝스럽게 느껴질 때. 나는 담담한 척 자조를 공유하면서 이런 마음이 나 혼자만의 것이 아니라는 걸 확인하고 안심한다. 그런 자조가 모두에게 사랑받고 싶다는 의미는 아닐 것이다. 누가 아무 이유 없이 그런 사랑을 받는다고 깎아내리려는 의미도, 훌륭해지려는 노력 없이 날로 먹고 싶다는 의미도 아닐 것이다. 어쩌면 그건 사랑과 관심이 차별을 포함한다는 걸 이미 너무나 잘 아는 사람들의 우스갯소리. (…) 어쩌면 그건 대인배는 못 되어도 소인배는 되고 싶지 않은, 쾌활한 중인배들의 한숨._39쪽
오래전에는 배반하는 용기만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배반당하는 데도 용기가 필요하다. 내 심연을 들여다볼 용기.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언제나 내가 아는 그 사람이길 바라는 걸 그만두는 용기. 그 애가 낯설어지길 바라는 용기. 그 애가 저 자신에게 온 초대장을 들고 제 세상으로 나가도록 밀어줄 용기. 언젠가 내 온 마음을 다한 존재의 뒤편에 놓여야만 한다는 슬픔을 감내할 용기. 내가 미처 몰랐던 건 누군가를 향한 커다란 사랑에도 불구하고 그런 용기란 정말로 아프다는 것이다. 무뎌지기까지 꽤 많은 시간이 필요할 만큼._61쪽
때로 아름다움이란 좋은 것의 집합이다. 누구나 가지긴 어려울 정도로 비싸고 세련된 우아한 무언가다. 배제하고 엄선해낸 결과다. 그 사실을 수긍하기까지의 고통을 기억하면서. 이제 나는 동거인과 함께 그런 아름다움을 지향점으로 둔다. 거기 미치지 못하더라도, 그래야 나아갈 수 있으니까. 내 할머니의 손녀답게 말해보자면, 어쩌면 아름다움은 더 나은 곳으로 가기 위한 걸지도 모른다. 하지만 때로 아름다움이란 그리움이다. 별 볼일 없는 물건이 풍기는 소중한 사람과의 기억이다._75쪽
냉장고를 다 고친 뒤 나가려던 기사는 머뭇거리더니 부탁드릴 게 있다고 했다. 홈페이지에 들어가 칭찬 글 하나를 올려달라는 것이었다. “아시겠지만 그런 게 정말 큰 힘이 돼요, 이 일을 하다보면 응원이 필요하거든요….” 방금 전까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던 그가 겸연쩍어 하는 걸 보자니, 좁은 곳에서 1시간 동안 생면부지의 사람과 마주보고 있어 곤란했던 건 나뿐만이 아닐 수도 있겠다 싶었다. 그도 곤란한 나머지 아무 말이나 건네본 거라면? 뭘 해야 할지 몰라 친밀감에라도 기대보려 애쓴 거라면? 뭐가 되었든 전혀 모르는 사람의 응원이야말로 힘이 될 때가 있는 법이었다._80쪽
어떤 자연스러움은 누군가에게 훈련의 영역에 있지. 그런 게 언제나 조금씩 나를 상하게 만든다고, 개를 쓰다듬으며 생각한다. 아무 불편도 모르는 얼굴, 그래야 한다고 주장하는 멸균된 얼굴은 역시 내 것이 아니다. 훈련해봤자 조금 상한 얼굴을 더 자연스럽게 여기는 내 관점은 아무래도 끝내 바뀌지 않을 모양이다. 그래선지 어떨 땐 사람들의 얼굴이 다 조금씩 상한 것처럼 보이곤 한다._105쪽
내가 모르는 얼굴에 그가 모르는 얼굴을 포개면서. 마침내 아침엔 잘 몰랐던 사람을 와락 삼키고 싶다. 벌레 소리와 풀 소리와 물 소리 그리고 상대의 비린내. 그걸 느낄 저녁만을 기다리느라 그리도 질질 시간을 끌었노라고, 내 안에 꿈틀대는 것들이 멋대로 날뛰게 내버려두고 싶다. 아침이 되면 강제로 헤어지고 싶다. 하루치 불가피한 특별함과 감정의 부산물에 눈물짓고 싶다. 전날 밤까지는 그렇게나 생동적이고 낭만적이던 것이 더는 아름답지도 관능적이지도 않다는 데, 내가 간신히 쥐었던 것이 아침 햇살에 파스스 사라져버리는 일에 놀라면서…._117쪽
오히려 내가 나온 딥페이크 사진은 그가 한 인간으로서 어떠한지에 대해 말해준다. 그는 사람을 사람으로서 마주하는 법에 대해 알지 못한다. 그는 여성이 의견을 내면 고립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는 자신과 무관한 한 여성의 삶에 굴욕을 주기 위해 시간을 쏟아왔다. 그 시간들은 이제 그의 일부로서 존재하고, 그로 하여금 그의 영혼은 크게 손상되어 있다. 그러니까 딥페이크 사진은 그에 대한 은밀하고도 낯선 진실들을 품는다. 그를 사회적으로 곤두박질치게 만들기 충분한 진실. 사람들이 그의 곁에서 도망가기에 충분한 진실. 어떤 모습을 가장해왔든, 그가 역겨운 짓을 저질렀다는 건 변함없다는 진실._141~142쪽
하지만 사는 일엔 후회가 있다. 호두와 함께 살게 되면서, 내 가족은 개의 꼬리를 자르는 이 세상을 후회하게 되었으니까. 그 개를 데려온 동생과 쭉 같이 살기 위해, 어느 때보다 온갖 데 열심인 나의 지금은 후회에서 온 것이니까. 동생의 후회란, 실은 동생이 더 입체적인 삶을 꿈꾼다는 증거이니까. 그 꿈이란 꾸는 것, 꿔오는 것, 빌려오는 것이라서. (…) 다만 고작 품만 빌려가고도 울음을 터뜨리는 동생을 어색하게 끌어안고 등을 두드리다 보면 좀 궁금해진다. ‘얘는 죽고 싶어서 우는 걸까, 살고 싶어져서 우는 걸까…?’ 그럼 거기 답하듯 호두라는 이름의 후회가 뭉뚝한 꼬리를 흔들며 자신의 부드러운 몸을 갖다 댄다. 뜨끈뜨끈, 다 잔뜩 살아 있다._181쪽
대충 얼버무리고 계산하는 동안 아이스크림을 받아든 사장의 얼굴이 갑자기 길을 잃은 아이마냥 훅 일그러졌다. 이마는 아직 화를 내고 있었지만 눈은 당황한 것처럼, 웃는 것처럼, 우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의 다른 손엔 여전히 수화기가 들려 있었다. 그걸 보는 내 마음도 어쩐지 찌그러지는 것만 같아서 후다닥 나왔다. 사장의 고함은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낮 동안의 열기가 무색하리만큼 선선한 바람이 불어왔다. 사람들은 서로에게 상처를 입힌다. 그러나 내가 사람들에게 배워온 것 또한 그 밤의 바람 같은 것이었다. 사람들은 서로를 당황시킬 수 있다. 사람들은 서로의 무언가를 무너뜨릴 수도 있다._208쪽
평범은 때로 사람을 기진맥진하게 한다. 누군가 서투르고 어색한 차림으로 거리에 나설 수 있게 만들어주는 것, 평소와 다른 오늘을 허락해주는 것. 그 승인은 그 애를 더 아름답게 만들어줄 것이다. 그 애가 기존의 자신보다 조금 더 멀리 가보도록 격려해줄 것이다. 그 애가 다시 그전의 자신으로 돌아가더라도, 평범을 견디며 서서히 나아갈 만큼의 힘을 만들어줄 것이다._233~234쪽
“같이, 많이 웃고 살아!” 그 말을 의식하면서 나는 영훈과 자주 배를 잡고 웃는다. 나는 영훈이 밖에서는 하지 못할 쓰레기 같은 발언을 내 앞에선 마구 해대서 웃고, 영훈은 벽에 붙어 자는 내 잠버릇 탓에 벽지가 내 다리 모양으로 노래져서 웃는다. 함께 낄낄대다 보면 시시껄렁한 일들에도 빛이 스며들어 할머니가 왜 거듭 그렇게 말했는지 알 것도 같다._24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