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에 대한 관심과 기록은 1884년 이후부터 서서히 늘어나기 시작했다. 1885년 관료였던 윤치호는 “커피 한 잔을 마시고 서원으로 돌아왔다”라고 일기에 기록했다. 퍼시벌 로웰의 표현처럼, 도포 차림에 한 손은 뒷짐을 지고 조선의 최신 유행품인 커피를 마시는 조선 관리의 모습을 그려 볼 수 있는 내용이다.
_〈커피, 언제 우리나라에 들어왔을까?〉
고종이 우리나라에서 일찍 커피를 즐긴 애호가임은 틀림없다. 그러나 최초의 커피 애호가는 아니다. 고종이 마시는 커피는 ‘근대화를 향한 의지’가 아니라 정반대의 길에서 장구한 조선 왕조의 망국을 재촉한 상징처럼 다가온다.
_〈망국의 상징, 고종의 커피〉
나라가 도탄에 빠졌을 때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마음에 조국을 떠난 한인들. 그 덕에 이들은 아주 일찍이 커피 농사를 지어 깨끗한 향미와 신맛, 부드러운 감칠맛이 특징인 고품질의 코나 커피를 생산했다. 이들은 때때로 하와이의 푸른 바다를 바라보며 고국 생각에 잠겨 코나 커피를 음미하는 호사 아닌 호사를 누렸을 것이다.
_〈코나 커피 농사에 뛰어든 하와이 한인 이민자들〉
조선호텔은 일제 강점기 모던 걸과 모던 보이가 드나드는 커피 명소가 됐다. 단발머리에 서구식 옷과 신발로 꾸미고 화장을 한 최승희의 모습을 보고 많은 남성과 여성들이 모던 보이, 모던 걸이 되어 낭만을 한껏 누렸다.
_〈최승희와 조선호텔 커피숍 선룸의 스타 마케팅〉
이상에게는 사업 자금도 충분했다. 몰락한 양반으로 이상을 입양해 엄격하게 교육한 큰아버지가 1932년 세상을 떠나면서 이상도 유산을 받은 것이다. 이 돈으로 1933년 7월 청진동에 연 다방이 바로 ‘제비’였다. 지금의 ‘그랑서울’ 빌딩이 들어선 곳이다.
_〈문인들의 아지트가 된 이상의 ‘제비’ 다방〉
소설가 박완서는 C-레이션에 들어 있는 인스턴트커피를 코코아 가루와 같은 것이려니 하고 먹었다가 “기절하게 쓴맛”을 경험했다. 미국의 풍요로움과 부강함을 보여 주는 C-레이션, 예의나 염치도 굶주림을 이겨낼 수 없던 시절 초콜릿을 달라고 손을 벌려 애걸하는 어린이들의 모습, 구호 물자로 허기를 면하며 가난하고 힘겹게 살아온 시절을 기억하는 그에게 커피는 ‘쓰고도 슬픈 맛’이었을 것이다.
_〈C-레이션 커피, 인스턴트커피 시대를 열다〉
커피가 생활 속에 널리 펴져 가기 시작하면서 커피에 대한 별별 소문이 나돌기 시작했다. 커피가 회충약으로 그만이라는 소문이 전국으로 퍼지면서 커피가 인기를 끌었다. 검은 빛깔의 커피를 진하게 마시고 장이 자극을 받아 설사를 하는 사람이 많아지자 뱃속에 기생충이 모두 죽어 생긴 효능이라는 소문이 돌기 시작한 것이다.
_〈전쟁 시기 각성제와 구충제로 각광받은 커피〉
쿠데타가 일어난 지 2주가 되던 1961년 5월 29일 서울 시내 다방은 일제히 커피를 팔지 않겠다는 광고를 걸었다…명목상은 시내 각 다방 스스로가 혁명 과업 수행에 발맞추어 커피 판매를 중단하고 생활의 검소화와 불필요한 외래품 배격에 앞장선다는 결정이라고 했다.
_〈커피 불허의 시대〉
오래전 조병화 시인은 부산의 녹원다방에서 처음 마담이 직접 가져다 준 모닝커피를 마신 적이 있다고 했다. 모닝커피는 피난지 부산에서 아침을 거른 사람들이 인근 다방에 모여 달걀노른자를 띄운 커피 한 잔으로 하루를 시작하면서 생겨난 독특한 커피라고 할 수 있다.
_〈오래된 기억의 유물, 모닝커피와 도라지 위스키〉
‘커피 한 잔’이 우리 가요사에 커다란 획을 그으면서 새로운 음악다방 문화가 형성됐다. 이전까지는 다방이 주로 문화 예술인들이나 ‘사장족’들이 문학을 이야기하거나 연락소 삼아 드나드는 살롱과 사무실과 같은 곳이었으나, 이때부터 어른들이 대화를 위해 드나들며 한복 입은 마담이 서빙하는 커피를 마시는 소위 ‘노털 다방’과, DJ가 신청곡을 받아서 팝송과 포크송을 틀어 주는 젊은이들의 다방이 분리됐다.
_〈펄시스터즈의 ‘커피 한 잔’, 다방 찬가가 되다〉
커피믹스는 해방 이후 근대화를 목표로 한 빠른 경제 성장 속에서 하나의 미덕으로 받아들여진 ‘빨리빨리’ 문화와 정보와 재료가 함께 버무려지는 통합과 융합 과정에서 생겨난 초유의 발명품이라고 할 수 있다.
_〈커피믹스의 탄생에는 ‘비빔밥 문화’가 있다〉
불혹의 나이를 넘어 커피를 좀 마셔 본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자판기에 대한 추억이 있다. 어쩌면 ‘빨리빨리’를 외치는 한국인들에게 자판기는 고단한 시절을 함께한 추억으로만 남길 수 없는 유산이 됐다.
_〈커피 자판기의 등장과 다방의 위기〉
티켓 다방은 인구 밀집도에 비해 유흥 시설이 그다지 발달되지 않은 탄광촌에서 최고의 유흥 수단이었다. 탄광촌인 강원 태백, 정선 고한과 사북, 함백, 영월 등지에는 티켓 다방이 군락을 이루고 있었다. 이곳을 거점으로 인근의 동이나 리 단위는 기본이고 시군 경계를 넘어선 곳까지 배달이 이뤄졌다.
_〈티켓 다방, 강원도 탄광촌에서도 성행〉
난다랑이 인기를 끌던 1980년대 중반을 지나면서 프랜차이즈 커피숍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커피숍의 체인점 시대가 열린 배경에는 난다랑의 인기뿐만 아니라, 사실 1988년 서울 올림픽을 앞두고 1987년부터 커피 수입 자율화가 시작됐기 때문이다.
_〈난다랑, 프랜차이즈 커피 전문점 시대를 열다〉
스타벅스의 국내 진출은 거의 모든 신문과 방송에서 크게 다룰 만큼 하나의 사건이었다. 일각에서는 봉지 형태의 싸고 달달한 ‘믹스 커피’와 간편하게 따 먹을 수 있는 ‘캔 커피’가 꽉 잡고 있을 무렵이라 생소한 ‘에스프레소’ 베이스의 값비싼 ‘테이크아웃 커피’가 성공할 수 있을지에 대한 회의적인 시선도 있었다.
_〈스타벅스 돌풍과 ‘앵커 테넌트 효과’〉
학림다방은 1960년대 서울대 출신 문인들의 아지트였다. 천상병, 전혜린, 이덕희, 이청준, 김승옥, 김지하, 김광규, 박태순, 황석영, 황지우 등 한 시대를 이끌었던 젊은 문인들과 이인성, 김민기 등 음악·미술·연극 등 예술계 인사들이 드나들던 곳이다. 이곳에 낮에는 커피를 마시고, 밤에는 술잔을 기울이며 시국과 문학에 대해 토론을 이어갔다.
_〈서울의 미래 유산이 된 학림다방〉
커피 자판기의 찬란했던 과거를 대신하고 강릉이 커피 도시로 자리 잡았더라도 커피 자판기는 여전히 건재하다. 화려한 커피숍 아래 길가에서 고즈넉한 바다를 바라보고 서 있는 커피 자판기 주변에는 여전히 포모 사피엔스가 서성인다.
_〈강릉은 어떻게 커피 도시가 됐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