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래 같은 시
미치조는 ‘시란 쓰는 것이 아니라 노래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는 문학 스승으로 사사했던 무로 사이세이에게 "내 시 같은 거라도 라디오에서 방송하는 일이 생길까요, 해 준다면 좋을 텐데…”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처럼 시인 스스로는 꿈에서나 그리는 일이었지만 현재 미치조 작품에서 나온 곡은 약 500곡에 달한다.
미치조 시의 음악적 특성은 당시 일본 문단을 반영한 것이기도 하다. 1920년대 일본 문단은 세계를 휩쓴 모더니즘과 프롤레타리아가 양립하는 구도였다. 뒤이은 1930년대, 미치조가 활동하는 때는 그에 대한 반발로서 '사계파'와 같은 서정성과 음악성을 중시하는 전통에의 회복 움직임이 형성되던 시기였다. 서정시의 거장들인 사이세이나 하기하라, 주야 등이 대표 주자들이다. 이들의 시는 또한 '시는 음악'임을 주장한 서구 시인 베를렌 등과 공명하고 있었다. 이렇듯 미치조의 시는 유럽의 낭만시와 일본 사계파의 두 토양 위에 피어난 꽃이었다.
가루이자와 오이와케의 풍광을 오롯이 담은 시
아사마산 중턱에 자리한 가루이자와 오이와케는 일본 문학사에도 ‘가루이자와 문학’이라는 장르가 존재할 만큼 많은 문인이 머무르며 창작을 한 곳이다. 기타하라 하쿠슈, 아리시마 다케오,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호리 다쓰오, 무로 사이세이 등 여러 문학가들이 바로 그들이다.
그중에서도 다치조는 단연 눈에 띈다. 당대의 서정시인이었던 호리 다쓰오는 그의 시에 대해 “자네 시집 《원추리꽃에 부쳐》는 (…) 아무튼 우리 속의 먼 소년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듯한 조용한 시골 생활 등으로 여름 동안 충분히 즐길 수 있는 책일세. 그러나 그리고 곧 또 우리에게 그 시골 생활 그 자체와 함께 잊혀 버릴 (…)자네는 즐겨 자네를 늘 가득 채우고 있는 정체 모를 슬픔을 노래하고 있지만 자네에게 가장 좋은 것은 이 정체 모를 슬픔 그 자체가 아니고 오히려 그 자체로서는 시시할 것 같은 그런 슬픔을 그야말로 소중히 소중히 하고 있는 자네의 특별한 내면세계인 것 같네. 그러한 자네의 순금 같은 마음을 언제까지고 소중히 하게”라고 편지에 써서 보내기로 했다.
오이와케는 이처럼 문인들에게 예술적 영감을 주고 정신을 고양시키는 곳이기도 했지만, 한편 폐결핵 환자들이 머무는 요양처이기도 했다. 미치조도 마찬가지로 이곳에서 장기간 투병했다. 그는 이처럼 생과 사의 명암이 교차하는 중층적인 공간을 수없이 오가며 내부의 서정적 공간으로 구축해 나갔다. 말하자면 오이와케는 미치조 시를 배태한 모태이자 영혼이 안식하는 마음의 고향이었던 것이다.
사랑의 시
1부 〈원추리꽃에 부쳐〉의 첫 시 〈첫 사람에게(はじめてのものに)〉는 미치조의 아유코에 대한 사랑의 마음을 담은 시다. 아유코는 시인의 시 세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인물이다. 시인은 이 시에서 그녀를 ‘원추리꽃’으로 표상한다. 이 들꽃은 중국에서는 ‘망우초(忘憂草)’로 표기되고, 일본 시가에서는 이 꽃을 《만엽집(万葉集)》(8세기 중엽)부터 ‘와스레구사(忘れ草, ワスレグサ)’라는 시적 이름으로 노래했다. 말뜻을 풀어 보자면 ‘잊어버림/잊힘’의 비애를 표상하는 꽃인 셈이다. 시인은 이러한 일본의 시가적 전통을 수용하여 여름에 만난 그녀의 이미지를 잘 표출하고 있다. 이 책에 수록된 시인의 첫 시집과 두 번째 시집을 지탱하는 시상은 이러한 여름철 고원을 노랗게 뒤덮는 원추리꽃에 담긴 사랑의 설렘과 비애감이다.
아련한 첫 사랑의 동경은 결국 계절처럼 끝이 나고 약혼녀 아사이와의 만남이 따스한 5월의 바람처럼 미치조에게 새로 다가온다. 그 감정 상태가 사후 시집 《다정한 노래》에 담겼다. 미치조는 1938년 8월, 폴 베를렌이 쓴 시에 가브리엘 포레가 곡을 붙인 연가곡 〈다정한 노래(La bonne chanson)〉을 듣고 며칠 후 바로 스케치북에 ‘La bonne chanson’을 써 넣었다고 전한다. 이것이 그의 사후 시집의 제목이 되었다. 이 시집에서는 차츰 죽음의 그림자가 뚜렷해지면서 애써 불안을 희석시키려는 양가적 모습 또한 읽을 수 있다.
다정한 시인, 다치하라 미치조
미치조가 시인으로 성장한 때는 1930년대 전쟁 시기였다. 그가 문단 활동을 시작한 해는 1937년으로 중일 전쟁이 시작되던 해이기도 하다. 또 사망한 1939년 봄은 제2차 세계대전의 폭풍 전야였다. 이런 암울한 시대였음에도 그의 시는 여전히 건강하고 밝은 서정의 세계를 다정하게 노래한다.
그는 온화하고 다정다감한 성품에 그 삶도 더없이 정갈하고 건강했다. 시인을 닮아 그의 시 역시 비애와 고독감을 노래하면서도 까칠함이나 분노는 찾아볼 수 없다. 다치하라 미치조는 이처럼 존재하는 모든 것에 대하여 또 자신이 잃어버린 모든 것에 대하여 그토록 자상한 시인이었다. 5월 따스한 바람처럼 불어오는 그의 시를 음미해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