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컷은 자기 나이와 신체 조건, 그리고 처한 환경에 따라 새끼를 낳을지 말지 결정한다. 새끼에게 헌신할지 말지, 또한 얼마나 헌신할지도 자신의 상황과 주변에 도와줄 존재가 있는지에 따라 결정한다. -15쪽
당시 아일랜드는 영국에 속한 북부든 독립한 남부든 기독교가 지배적인 곳이었다. 성을 바라보는 관점이 보수적인 데다 사생아를 양육하려면 사회적 비용도 드니 사생아들을 골치 아픈 존재로 바라보았을 것이다. 이런 가운데 엄마가 알아서 아이를 죽였다면, 국가나 교구 차원에서는 크게 고민할 문제가 아니었으리라. -23쪽
아멜리아 같은 베이비 파머가 많았던 이유는 버려진 가여운 여성이 많았기 때문이 아니라, 여성과 아기를 버린 몰염치한 남성이 많았기 때문이다. 또한 그들로 인해 원치 않는 임신과 출산을 한 어머니와 아기를 사회에서 환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29쪽
먼저 ‘과부’라서 살해하는 경우다. 《동아일보》 1924년 1월 10일 자는 당시 평양 형무소 수감자 1,204명 중 여성이 103명인데 그중 “해산 후 영아를 압살한 과부가 많다”고 보도하고 있다. 이해 전라남도에서도 과부 영아 살해 사건이 발생했다. -33쪽
영아를 살해할 수밖에 없는 근본 이유는 부계 사회이기 때문일 것이다. 한 명의 법적 아버지만을 인정하고, 그 아버지를 중심으로 혈통을 잇는 사회라서 벌어진 일들이다. -38쪽
18세기에 산업혁명이 일어나면서 런던에 많은 사람이 몰려들었다. 빈민도 급속도로 늘었다. 교구에서 이들을 구조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도움을 받지 못한 사람들이 버린 아기가 교회 계단, 문 앞, 쓰레기 더미에서 빈번하게 발견되었다. 매해 1천 명 정도의 아기가 버려졌다. -53쪽
엄마들이 증표를 남긴 이유는 아기들은 입소하자마자 세례를 받고 새로운 이름을 부여받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나중에 아기를 찾을 수 없기에 아기를 식별하기 위해 증표를 남긴 것인데, 엄마들은 물건뿐 아니라 시나 메모 또는 편지를 남기기도 했다. -57쪽
영국은 1861년 〈개인에 대한 범죄법Offences Against The Persons Act〉 제27조에 ‘2세 미만 아기 유기는 형사 범죄로서 5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는 조항을 마련한 이후 아동 유기를 허용하는 어떤 예외 사항도 두지 않았다. 영국에는 아동을 특정한 곳에 유기하는 것을 허용한 미국의 〈안전한 피난처 법Safe Haven Law〉 같은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58쪽
보육원 아이들은 마지막 기차가 운행된 1929년까지 살던 곳을 떠나 전국에 흩어졌다. 이 때문에 원가족이나 친척과 재회할 가능성이 희박해졌다. 심지어 보육원에 함께 있던 자매나 형제가 서로 다른 지역으로 이주하거나 다른 가족에 입양되면서 헤어지는 일까지 벌어졌다. -64쪽
고아 기차를 탄 아이 중 극히 일부는 사회 지도층이 되었다. 또 어떤 아이들은 주어진 삶을 받아들이고 만족한 삶을 살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들 모두에겐 지울 수 없는 트라우마가 있다. 바로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떠나야 했다는 것이다. 태어나고 자란 곳을 떠남으로써 혹시 자신을 찾았을지 모를 부모나 친척과 연결될 길이 끊겼다. 심지어 형제자매와도 강제로 헤어져야 했다. -68쪽
〈보호출산법〉은 심리, 신체적으로 어려운 경우 보호 출산을 선택할 수 있다고 명시하고 있다. 하지만 세부 조항에도 관련 매뉴얼에도 심리, 신체적 어려움이 무엇인지에 대한 명확한 정의나 가이드라인이 없다. -75쪽
원가족과 살지 말지 결정하는 것은 아동의 고유한 권리다. 원가족 공동체 안에서 성장하면서 스스로 내릴 판단이다. 그 권리를 사회나 국가가 먼저 박탈하는 것은 아동 인권을 침해하는 일이다. 보호출산제와 베이비 박스가 영아 유기를 줄일 수 있을까. 아이를 잘 버리게 하는 것보다 애초에 아기가 버려지지 않게 법과 제도를 탄탄하게 마련하고, 원가족을 더 지원하는 방향으로 가야 하지 않을까. -79쪽
그런데 보호 종료 아동이나 자립 준비 청년 모두 적절한 표현은 아닌 듯하다. 보호 종료 아동을 먼저 보면, 퇴소를 했으니 ‘보호 종료’는 맞지만 이미 ‘아동’기를 지난 이들 아닌가. 자립 준비 청년이란 말도 문제가 있다. 자립 ‘준비’는 퇴소 후가 아니라 퇴소 전에 해야 하는 것 아닐까. 따라서 나는 이 책에서 ‘복지시설 생활을 마치고 사회로 나온 젊은이’라는 의미에서 이들을 ‘보호 종료 청년’으로 부르려고 한다. -84쪽
왜 부랑아나 독신 청년 혹은 보호 종료 청년, 전쟁고아 등이 일차 대상이었을까. 혹시 자립이란 미명하에 사회의 주변인 또는 문제의 소지가 있어 보이는 사람들을 추방하거나, 이들에게 드는 사회적 비용을 절감하려는 의도는 아니었을까? -91쪽
2000년대 접어들면서 보호 종료 청년들을 바라보는 시각에 변화가 생긴다. 변화의 문을 연 건 비영리 공익재단 아름다운재단이다. 2000년 김금자 할머니는 아름다운재단에 1억 원을 기부한다. 자신처럼 고아인 청년들을 위해 써 달라고 했다. 이 일을 계기로 아름다운재단은 2001년부터 보호 종료 청년들에게 교육비와 주거비를 지원하는 등 이들이 자립할 수 있도록 여러 도움을 주고 있다. -93쪽
“저를 장애인 취급을 하면서 정신과 약을 먹였는데, 저는 항상 먹기 싫다고 했거든요. 안 먹으면 이번엔 원장님이 형들을 불러와 가지고 때리게 했어요.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먹었죠. 강제로 먹인 거죠. 고등학교 때는 좀 많이 힘들었어요.” -102쪽
A와 C는 인터뷰 도중 “요즘 보육원 애들은 우리(자신들) 때와 다르다”는 말을 거듭했다. 무엇이 다르다는 것일까. 첫 번째 다른 점은, 장애아가 많아졌다는 것이다. 그런데 장애 전문 보육교사는 없다. 두 번째는 가정 학대를 당한 아이가 많이 들어오고
있고 그중에는 행동 장애를 보이는 아이도 많다는 것이다. -115쪽
보육교사는 어쩔 도리가 없다고 한숨을 내쉰다. 아동 인권을 보호해야 한다는 사회적 인식은 높아졌지만, 어디까지가 인권 보호고, 침해고, 아동 학대인지 구체적인 가이드라인이 없어 교사들은 난감할 때가 많다고 한다. -118쪽
1970년대와 80년대는 정부와 정부가 허가한 해외 입양기관들이 유기 아동과 고아를 적극적으로 해외로 입양 보낼 때였다. 아이당 받는 입양 수수료가 높아 정부도 해외 입양기관도 얻는 이익이 컸기 때문이다. -133쪽
인터뷰 내용을 정리하며 나는 보호 종료 청년들의 자립 성공 여부는 ‘부모를 알권리’에서 시작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성인이 되었다는 이유로 얼마간의 돈을 한시적으로 쥐여 주면서 자립에 성공하기를 바라는 것은 너무 무책임하고 가혹한 일이라고 분개했다. 그들이 좌절하거나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것은 그들 앞에 놓인 자립의 길이 너무 고단하기 때문일 것이다. -140쪽
이해 국민총생산GNP이 320달러였으니 입양은 큰 이익을 남기는 ‘사업’이었다. 한 아이당 막대한 수수료를 받고 해외로 입양시키는 남한의 행태를 알아 1970년대 북한에서는 “남한에서 아기는 새로운 수출품”이라고 비난할 정도였다. -151쪽
해외 입양은 높은 수익을 보장하는 데다 “좋은 일”을 한다는 사회적 찬사까지 덤으로 얻을 수 있는, 일석이조의 사업 아이템이었다. 하지만 입양 보낼 아기가 있어야 유지되는 사업이다. 정부가 원가족 지원을 늘리고, 미혼모에 대한 사회적 낙인이 사라져 미혼모가 양육하겠다고 나서면 가장 위기에 몰리는 사업이기도 하다. -153쪽
김씨는 입양 목적인 이민 비자(IR-4, 미국 시민권자에게 입양된 아이들에게 발급된다)로 미국에 갔다. 이 비자로 입양된 아이들은 10년 동안만 영주권을 얻는다. 만기 전 시민권 취득 절차를 밟지 않으면 불법체류자가 되는 것이다. 학대를 일삼던 입양부모가 김씨의 시민권에 신경을 썼을 리 없다. 한 살 무렵 입양된 김씨는 열한 살 때 불법체류자가 되었다. -162쪽
1990년대가 되면서 해외 입양인들이 본격적으로 귀환하기 시작했다. 해외로 보낸 아기들이 성인이 되어 돌아온 것이다. 이들은 비자를 연장해 한국에 계속 머물면서, 한국 방문 후 다시 입양된 국가로 돌아가서, 또는 제3국에 거주하면서 끊임없이 한국을 향해 외치고 있다. 자신이 어디서 왔는지 아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를 말이다. -170쪽
최근까지도 국내 입양인 당사자들의 목소리를 들을 기회는 거의 없었다. 그동안은 입양기관, 입양부모, 입양 연구자가 주로 목소리를 냈다. 이들은 다양한 매체를 통해 입양이 아동을 위한 최선의 복지이자 ‘선행’인 것처럼 말해 왔고, 그것이 지배적인 시각이 되었다. 과연 당사자들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까. -178쪽
제가 입양인으로 살아 보니까 입양인이 가장 위로를 받는 순간이 입양부모님이 잘해 주고 이런 것도 너무 행복하지만, 내가 어떻게 잘 버려졌는가에 대해서 아는 순간이에요. 정말 아무렇게나 엄청 금방 빠르게 버려졌는가, 아니면 정말 피치 못하게 아주 어렵게, 어렵게, 간절하지만 어쩔 수 없이 이별을 했는가, 이런 사실을 알았을 때 좀 위로를 많이 받거든요.” -183, 184쪽
입양인이 입양가족 안에서 행복하지 않기 때문에, 입양부모에게 감사하지 않기 때문에 자신의 출생 정보와 친생부모를 알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기원을 알려는 것은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누구나 누려야 할 기본권이다. -18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