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이레의 산문을 읽으면서 눈물이 났다”
김화진 소설가 추천
『정년이』 원작자 서이레,
창작과 삶에 관해 털어놓는 첫 산문집
웹툰 『정년이』 첫 화가 공개되었을 때, 독자들은 단번에 범상치 않은 작품이 등장했음을 눈치챘다. 모두의 생각대로 여성들이 욕망하고 갈등하고 사랑하는 이야기는 ‘여성서사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는 찬사를 받으며, 2019년 오늘의 우리만화상을 시작으로 2020년 웹툰 최초 올해의 양성평등문화상, 2024년 부천만화대상 등을 수상하며 이 시대 가장 사랑받는 웹툰으로 자리매김했다. 나아가 2023년 국립창극단 창극으로 무대에 올랐고, 2024년에는 드라마화되면서 국내를 넘어 해외에서까지 큰 인기를 얻기에 이르렀다.
『정년이』는 단순히 재미있는 콘텐츠를 넘어 우리 전통 문화예술에 대한 대중의 관심을 끌어 올렸다는 점에서 더욱 높은 평가를 받는다. 이 거대한 흐름의 시작에 작가 서이레가 있다. 2015년 두 여성의 창업 이야기를 그린 『보에』로 데뷔해, 『소녀행』 『라나』 『정년이』까지 네 편의 웹툰을 선보인 그는, 뚝심 있게 여자 주인공을 내세운 작품들을 써왔다.
『정년이』도 그 재미없는 이야기의 연장선이었다. 여자 나오고, 여자들이 나오고, 여자들이 많이 나와서 뭘 하고……. ‘또 나만 재밌는 얘기를 하겠군’ 생각했다. 나쁘지만은 않았다. 작가로서 인기작을 만들고 싶은 욕심이 왜 없겠는가. 하지만 세상에 인기작은 차고 넘친다. 나 하나쯤은 나만 좋은, 재미없는 얘기를 만들어도 괜찮을 것 같았다. 어쨌든 나는 재밌으니까!
_본문에서
『미안해 널 미워해』는 픽션 쓰기에 몰두하던 그가 처음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진솔하게 털어놓은 산문집이다. 유년 시절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저자의 자양분이 되어준 관심, 취향, 애호의 대상부터 작가가 되기 위해 겪은 우여곡절과 엄마와의 갈등, 부족한 자기 확신 등 “삶을 보고 만지고 문질러서” 써낸 애달프고도 웃긴 이야기들이 곡진하게 담겼다.
옆자리에 ‘정년이’가 앉아 있었다
그림을 못 그리는 웹툰작가의 지난한 여정
등장한 지 약 10여 년 만에 ‘서이레’는 여성들이 가장 믿고 보는 웹툰작가 이름 중 하나가 되었다. 글과 그림을 홀로 쓰고 그린 것으로 오해하는 이들도 적지 않았는데, 그는 이 책에서 ‘그림을 못 그리는 웹툰작가’의 정체성을 가감 없이 보여준다. 초등학생 때부터 만화와 소설을 탐독하며 이미 글쓰기에 욕심내는 청소년으로 성장했으나, 그림에서만큼은 재능을 싹틔우지 못했다고 회상한다. 다만 그 덕에 만화 동아리에서의 앤솔러지 출품 등 글작가와 그림작가의 ‘협업’이라는 재미를 어려서부터 체득할 수 있었다고 덧붙인다.
또 저자는 인터넷소설 카페에 남이 쓴 글을 올렸다 혼쭐이 나기도 하고, 열심히 쓴 ‘해리 포터’ 팬픽에 대한 사람들의 무관심에 주눅 들기도 하고, 빼어난 이야기를 쓴 만화 동아리 후배에게 질투를 느끼기도 했던 지난 시절을 솔직하게 고백한다. 자칫 부끄럽고 못난 구석으로 비출지라도 어려서부터 외길을 고집하며 글쓰기를 연마해온 일화들은 “없다기엔 아쉽고, 있다기엔 애매한” 재능을 지닌 뭇 범재들에게 깊은 공감대를 불러일으킨다.
그뿐만 아니라 글쓰기로 먹고살겠다는 딸을 인정하지 않던 엄마와의 오랜 갈등, 대중적인 취향에 관한 고민, 여성국극 웹툰을 쓰기 위한 악착같은 자료 수집, 자연재해처럼 찾아온 우울증, 웹툰작가의 열악한 처우와 연재 환경까지 작가로서의 삶에 관해서도 꼼꼼하게 옮겨 적는다. 이를 통해 서이레라는 개인의 삶의 단면을 드러내 보이는 동시에 웹툰작가를 둘러싼 현실 문제들도 두루 펼쳐 보인다.
훌륭한 작품을 보면 왜 그리 질투가 나는지! 하지만 뒤돌면 어느새 부족함도 질투도 연기처럼 사라지고 쓰고 싶은 욕망만 남는다. 천재를 미워할 시간도 아깝다. 그 시간에 글 써야지! 남 미워한다고 내 작품이 나아지진 않는다. 욕망을 갖게 했으면 재능도 줬어야 한다고? 나는 욕망만으로도 행복한…… 욕망의 노예다.
_본문에서
“내 애정은 유난한 면이 있었다”
온 마음을 쏟아온 살뜰한 사랑의 기록
저자의 내면을 채워온 ‘사랑의 목록’도 흥미롭다. 그가 좋아하는 대상은 얼핏 한정적이면서도 폭넓고, 대상을 향해 쏟아붓는 관심과 애정은 집요하고도 유난하다. 일찍이 “될성부른 오타쿠 어린이”로서 3D 인간들 대신 2D 인물들에 열광하는 어린 시절을 보냈으며, 연재 중 쌓아놓은 분량까지 깎아 먹으면서 게임에 몰두하는 어른으로 자라났다. 부족한 자신을 견뎌주는 성격 나쁜 반려묘 덕만과의 첫 만남과 생활은 애틋하고, 약 7년간의 방영분을 두 달여 만에 섭렵한 〈그것이 알고 싶다〉에 보내는 감사와 존경은 경건하기까지 하다.
“나라가 허락한 유일한 마약, 음악” 역시 빼놓을 수 없다. ‘중이병’을 심화시킨 제이팝부터 애니메이션과 영화 OST, 힙합, 클래식, 밴드음악 등 다양한 장르의 음악은 마음의 치유제이자 삶의 원동력으로 작용했다. 특히 책의 제목이기도 한 〈미안해 널 미워해〉를 부른 자우림에 대한 사랑은 각별하다. 자우림의 노래를 들으며 “처음 입는 교복, 낯선 학교와 날 선 아이들 그리고 덜 자란 마음을” 버틸 수 있었다는 대목은 뭉클함을 선사한다.
그 사람이 노래하자 세상은 분홍 구름이 피어오르는 환상 속 마법의 성이 됐다. 아니 진짜로. 진짜 그랬다. 그 어두컴컴하고 장작 냄새와 구운 달걀 냄새가 피어오르던 찜질방이 향긋한 꿈의 나라가 됐다. 목소리가 예뻤다. 반짝이는 유리구슬 같은 목소리였다. 유리구슬이 은쟁반 위를 도르륵 구르듯 노래했다. 세상에는 이런 아름다운 노래도 있구나. 나는 엉덩이에서 뿌리가 난 사람처럼 움직일 수 없었다. 영원히 그 반짝임 속에 살고 싶었다.
- 본문에서
서이레 작가는 산문 쓰기의 어려움을 토로하지만 천연덕스러운 유머와 기개, 잘 벼린 문제의식과 자기반성은 읽는 이의 마음에 정확히 꽂혀 들어온다. 책을 읽은 독자들 또한 자신의 삶에서 사랑하는 것, 미워하는 것, 사랑하면서도 미워하는 것들을 하나하나 끄집어내고 어루만지는 귀한 시간을 보내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