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국민 작가 사노 요코가 고백하는 오랜 증오와 죄책감
《시즈코 상: 그럼에도 엄마를 사랑했다》는 사노 요코가 2010년 72세의 나이로 세상을 뜨기 전 일본의 한 잡지에 약 1년여 간 연재한 에세이들이다. ‘나는 못된 딸’이라는 자책으로 평생 동안 스스로를 옭아매 온 사노 요코. 그는 이 책에서 엄마 시즈코 상의 생애와 자기 삶을 차례 대로 톺아보며 엄마를 향한 증오심과 죄책감이 어디에서부터 비롯되었고 서로가 서로에게 얼마나 큰 고통과 상처를 주고받았는지 낱낱이 고백한다.
《수짱과 고양이》, 《100만 번 산 고양이》 을 비롯한 많은 그림책과 《언덕 위의 아줌마》, 《그래도 괜찮아》 등 다양한 수필집이 국내에도 소개되는 등, 사노 요코는 사후에도 일본과 한국에서 큰 사랑을 받고 있다. 일러스트레이터이자 작가로서 큰 성공을 거두었지만 평생 엄마를 사랑하지 않았다는 죄책감에 시달려 온 사노 요코는 말년에 이르러 특유의 시크한 태도, 무관심한 듯하면서도 섬세한 사유, 솔직하고 단단한 문장력을 바탕으로 《시즈코 상: 그럼에도 엄마를 사랑했다》를 발표하여 수많은 독자를 울렸다.
치매에 걸려 좋았던 기억도 나빴던 기억도 천천히 지워 가는 엄마를 보러 실버타운으로 향하는 길. 그때마다 어린 시절 엄마로부터 받은 폭력과 학대, 오빠와 동생의 죽음, 전후 겪어야 했던 가난 등 아리도록 쓰라린 기억이 면면히 재생하는 가운데 고단했을 엄마 시즈코 상의 삶 또한 교차 편집되어 펼쳐진다. 완전히 늙어 버린, 그래서 내가 알던 엄마가 아닌 뭔가 작고 사랑스러운 존재가 되어 버린 엄마를 마침내 온전히 바라보고 용서하게 되는 순간까지의 모든 이야기가 절절하다.
엄마와 딸, 그 사이에 흐르는 복잡하고 모순에 찬 사랑
딸 사노 요코와 엄마 시즈코 상. 그들의 갈등은 어디에서부터 비롯된 걸까. 사노 요코는 생애 첫 기억일지도 모를 그 기원에 대해 아주 정확히 기억한다. 제2차 세계대전 중 태어난 사노 요코는 중국 베이징에서 부유한 유년기를 보내지만, 네 살 즈음 엄마와의 힘든 관계가 시작되었다고 고백한다. 한번은 엄마의 손을 잡았는데 시즈코 상이 “쯧.” 하면서 딸의 작은 손을 뿌리쳤던 것. 그렇게 사노 요코는 두 번 다시 엄마의 손을 잡지 않겠노라고 결심한다. 인생의 파노라마를 되감아 마주한 첫 장면에서 매몰차게 자신을 거절하는 엄마를 발견한다면, 그 딸은 어떤 마음으로 엄마를 대할 수 있을까. 사노 요코는 유년의 결심대로 엄마를 부정하고, 엄마에게 반항하며, 언제나 엄마와 맹렬히 싸우는 딸로 평생을 살게 된다.
종전 후 사노 요코의 일가족은 일본으로 돌아오지만 장남(사노 요코의 오빠)을 비롯하여 칠 남매 중 세 아이가 죽고 사 남매만 남는 비운을 겪는다. 첫째 아들을 잃은 엄마는 말 그대로 광란 상태에 빠졌고, 그때부터 사노 요코를 향한 가혹한 학대가 시작된다. ‘학대’라는 말이 무엇인지조차 모르던 어린 사노 요코는 속수무책으로 폭력을 견뎌야 했지만 훗날 시간이 흘러 어른이 된 사노 요코는 자식을 잃은 고통이 엄마를 그토록 폭력적으로 만든 게 아니었을까 추측해 본다. 전쟁과 연이은 죽음, 상실과 지독한 가난. 격변하는 시대의 혼란과 아픔이 한 가정사에 고스란히 반영되는 모습을 우리는 사노 요코의 작품을 통해 여실히 확인할 수 있다.
모던 걸이었던 엄마. 아버지를 만나 결혼 후 전쟁과 가난 속에서도 칠 남매를 낳은 엄마. 자식 셋을 잃고 나머지 사 남매를 지키기 위해 독하디 독하게 굴 수밖에 없던 엄마. 아버지를 여의고 사 남매를 대학까지 교육시키키 위해 최선을 다해 일한 엄마. 또한, 일찍 세상을 떠난 장남 대신 집안의 장녀가 된 나. 입을 꾹 다물고 엄마의 학대를 견디면서도 절대로 고분고분하지 않던 나. 청치마 한 장으로 사계절을 나고 라면 한 그릇을 친구들과 나눠 먹어야 했지만 가난에 굴하지 않고 삼수 끝에 미대생의 꿈을 이룬 나. 단 한 번도 엄마의 인정을 받은 적 없지만 일러스트레이터로서 작가로서 충실히 살아낸 나. 엄마 시즈코 상의 생과, 나 사노 요코의 생. 다단하게 얽히고설킨 날실과 씨실을 사노 요코는 가닥가닥 천천히 풀어내 보인다. 딸에게 조금도 다정할 수가 없던 엄마의 인생과 그런 엄마를 증오할 수밖에 없었던 딸의 이야기가 구구절절 와닿는다.
도무지 듣지 않을 수 없는, 이 세상 모든 딸들의 목소리
얼마나 엄마가 미웠는지 말하는 사노 요코의 목소리엔 꾸밈이나 과장됨이 전혀 없다. 당신은 정말 지독하게 나쁜 엄마였고 나는 맹수처럼 격렬히 반항하는 못된 딸이었다고 그저 툭툭 내뱉는 문장 문장마다 진심 담겨 있어 깊은 울림을 준다. 이를 두고 정혜윤 작가는 추천사에서, 엄마를 향한 딸의 ‘복잡하고도 모순에 찬 사랑’이라고 말한다.
‘엄마는 대체 내게 왜 그랬을까?’라는 질문의 답을 찾는 과정은 곧 ‘나는 누구인가, 나란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에 대한 답을 찾는 과정이기도 했다. 지극히 보통의 ‘선량한 시민’이자 ‘일반 대중’으로서의 엄마 시즈코 상은 정말 반짝거렸지만, 딸 사노 요코에게만큼은 폭력적이고 매정했다. 그럼에도 시즈코 상은 가장 마음이 맞지 않던 딸 사노 요코를 가장 신뢰했다. 이 아이러니한 모녀 관계를 보며 끈질기게 떠오르는 물음들이 있다. “엄마란, 자식이란, 가족이란 무엇인가?” 하는, 단순하지만 그 답을 쉽게 말할 수가 없는 물음이다. “엄마란 당연히 자식들에게 한없이 다정한 존재이지, 딸이라면 응당 고분고분 제 도리를 다 해야지.” 하는 세상의 흔한 통념은 이 책 앞에서 얼마나 덧없고 그릇된 답인가. 따뜻하고, 안정적이고, 세상 무엇보다 고귀한 혈연이란 말로는 가족이란 집단을 표현할 수 없다고, 사노 요코는 말한다. 세상에는 이런 딸도, 이런 엄마도 있다. 너무 일찍 세상을 떠나 버린 아버지와 형제들, 그리고 남은 가족의 관계를 모두 짚어 보는 사노 요코의 담담한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다 보면 이 세상 무수히 많은 딸들이 저마다 쏟아 내는 가족 이야기가 동시에 들리는 듯하다. 덕분에 가족이라는 독특하고도 끈질긴 관계에 대하여 다시금 생각해 보게 된다.
사노 요코를 사노 요코로 만들어 주고 살게 해 준 엄마 시즈코 상. 사노 요코를 끝까지 살게 한 엄마 시즈코 상. 그런 엄마에게 마지막으로 전한 사노 요코의 진심은 “고마워요, 고마워요! 엄마, 곧 갈게요.”라는 한 문장 속에 고스란히 담겼다. 말년에 이르러서야 전하게 된 사노 요코의 본심을 읽는 순간, 독자는 눈물은 흐를지언정 저마다의 크고 작은 내면의 상처가 치유되는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