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는 끝나지 않는 텍스트다. 우리 모두 셰에라자드의 끝나지 않는 다음 얘기를 기다리던 왕이 되어 애태우던 시절이 있지 않은가. 시간과 함께 갈수록 풍성해지고 나도 그 속의 인물이 되는 놀라운 공간이다.(p.9)
비교문학자로서 고흐와 함께 별은 더 빛나고, 카프카와 함께 성에 결코 들어가지 못해도 맬컴 라우리와 함께 화산 아래 가슴 졸이며 살아도 그게 전부가 아님을, 안셀름 그륀이 말한 “그 어둠에 들어가 나의 작은 어둠을 사라지게 할 수 있음”을 알았다. 도시마다 같이 걷고 싶은 작가가 있다.(p.10)
걷는 이, 페렉이 있다. 그를 따라 파리를 걷는 일은 그야말로 발자크가 말한 “오! 파리를 떠도는 일이란! (…) 거닐음은 하나의 예술, 눈으로 즐기는 식도락…”을 함께하는 일이다. 파리에 발을 들인 이는 발자크 이전에도 이후에도 걸었다. 《사물들》의 실비와 제롬은 작정하고 길을 나선다. 탐미의 시선은 팔레 루아얄에서 생제르맹, 샹 드 마르스에서 에투알, 뤽상부르에서 몽파르나스, 생루이섬에서 마레, 테른에서 오페라, 마들렌에서 몽소 공원까지 만족을 모른다.(p.16)
무프타르라는 이름만으로 허기를 느낄 수 있다.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의 카메라에 포착된, 귀여운 꼬마가 어깨높이로 올라오는 기다란 포도주병을 들고 의기양양하게 내려오는 거리가 무프타르 가다. “결정적 순간”을 노리던 작가가 본능적으로 포착한 그 장면이 오래된 골목을 단번에 소개한다. 유쾌함, 풍부함, 남의 장바구니 속 물건이 궁금한 호기심, 구경거리들. 좁은 골목길의 주인은 넘쳐나는 식재료와 무너질 듯 쌓아 올려진 물건들이다.(p.37)
오래전, 파리가 근대성으로 주목받던 시대는 이제 사라지고 없다. 대신 근대성의 유적지로 남았다. 빛의 도시는 스무 살의 조이스가 설레고 경계하던 자본주의의 도시였다. 국경 앞에 멈춰 서버린 벤야민이 있고 전설이 되기 전의 브르통이 있었다. 에릭 아잔Éric Hazan은 “중세의 그림자를 완전히 떨치게 된 것은 보들레르의 〈백조〉에서가 아니라 페렉의 《사물들》이 나오고 나서다.”라고 말했다. 중세의 그림자는 생각보다 훨씬 짙고 길었다. 가문의 명예가 무거운 파리지앵들은 선조와의 비교, 명맥을 잇는 일이 늘 버겁다. 어깨에 드리운 대가들의 그림자를 완전히 떨쳐 낸 이가 페렉이다. 세월이 흐른다고 거저 사라지지는 않아서 아잔의 말대로라면 페렉에 와서야 완전히 떨쳐 낼 수 있었다. 그만큼 페렉의 걸음은 가볍다.(p.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