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년 만이네요.
전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 편지를 씁니다.
편지 쓰는 것쯤이야 간단하겠지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쓰기 시작하니, 놀라울 정도로 마음대로 안 되네요. 곰곰이 생각해보면 펜을 손에 쥐고 제대로 편지를 쓰는 건 10년 만일지도 모르겠어요. 누군가를 진지하게 생각하며 그 사람을 위해 뭔가를 쓴다. 그건 너무 어렵고 쑥스러운 일이군요.
100년 후에는 종이에 소식을 적어 보내는 건 사라지고 없겠죠. 그렇지만 그 글이 엮이는 시간은 분명 깊은 밤일 테고, 에두른 말만 이어져서 무슨 말을 하고 싶었는지 알 수 없게 되고, 몇 번이나 고쳐 썼는데도 구두점은 이상한 자리에 찍혀 있고, 어쨌거나 볼품없고, 그럼에도 절실한 심정에는 변함이 없을 듯한 기분이 듭니다.
나는 지금 볼리비아의 우유니라는 도시에 있어요.
새하얀 소금 호수로 에워싸인 도시. 해발고도 3700미터. 공기는 희박하지만 맑고, 물빛 하늘에는 볼록하게 부푼 구름이 떠 있습니다. 이곳 소금호수는 비가 내리면 물이 얕게 고여 거울처럼 변합니다. 그 거울에 끝없이 열린 하늘이 반사되어 세상이 온통 하늘이 됩니다.
-〈프롤로그〉 중에서
“신입생?”
문을 빼꼼 열고, 숨어들 듯 들어온 그녀를 향해 후지시로가 말을 건넸다. 그녀가 “네”라고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신입생에게 동아리에 들라고 권유하는 시기도 지났고, 올해 획득한 회원은 고작 두 명뿐이었다. 제 발로 동아리 방을 찾아온 귀중한 신입회원 후보를 놓칠 수는 없다는 생각에 후지시로는 최선을 다해 산뜻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쳐다보았다. 커다란 카메라에 눈길이 멎었다. 가냘픈 몸에 매달린 추처럼 보였다.
“매뉴얼 일안리플렉스네. 카메라가 엄청 크다.”
“할아버지한테 물려받았어요. 그런데 무거워서…….”
색이 옅은 얼굴 중심에 자리잡은 핑크빛 입술일 조그맣게 움직였다. 커다란 눈동자가 매우 조심스럽게 이쪽을 바라보았다. 먼지가 석양빛에 반사되어 금가루처럼 춤추고 있었다.
“진짜 무거워 보인다.” 후지시로는 그녀의 경계를 풀어주려고 천천히 얘기하며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신입생용 명부를 건넸다. “일단 여기에 이름과 연락처를 써줄래?”
그녀는 가늘고 흐르는 듯한 필체로 이름을 썼다. 윤기 나는 검은 머리칼은 목덜미 길이로 짧게 커트되어 있었다. 깔끔하고 가지런한 앞머리. 몸집은 작지만 팔다리는 길고, 넉넉한 크기의 티셔츠 소맷자락 사이로 하얀 팔뚝이 보였다. 주소와 전화번호를 적으면서 이따금 겁먹은 고양이 같은 눈빛으로 이쪽을 쳐다봤다. 무리도 아니다. 동아리 방에 들어오자마자 비좁은 소파에 나란히 앉아 있는 무기력한 두 남자. 한 사람은 게임, 다른 한 사람은 개그만화에 푹 빠져서 사진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4월이 되면 그녀는〉 중에서
슬픈 감정과 행복한 감정은 어딘지 모르게 비슷해요.
지금 나는 따뜻한 바람을 느끼고 있어요. 봄이 바로 코앞까지 왔네요. 조금만 더, 조금만 더. 문득 후지의 목소리가 들린 것 같은 기분이 들었어요. 대학 암실에서 내 등 뒤로 들려왔던 그 목소리예요. 바다로 향하는 버스 안에서 모두가 웃었죠. 오시마 선배가 해변에서 ‘4월이 되면 그녀는’을 노래했어요. 모두가 누군가를 사랑하며 살아갔죠.
난 죽는 게 슬펐어요. 그렇지만 죽는 일도 벌어지는 현실이 밉지는 않아요.
지금도 후지를 좋아하는지, 그건 솔직히 잘 모르겠어요.
왜 편지를 보내려고 했는지도.
그런데 지금 마지막 편지를 쓰면서 깨달았죠.
나는 나를 만나고 싶었던 거예요. 당신을 좋아했던 무렵의 나를.
솔직한 감정으로 살아갈 수 있었던 그 무렵의 나를 만나고 싶어서 편지를 썼던 거예요.
나는 사랑했을 때 비로소 사랑받았다.
그것은 흡사 일식 같았어요.
‘나의 사랑’과 ‘당신의 사랑’이 똑같이 겹쳐진 건 짧은 한순간의 찰나.
거역할 수 없이 오늘의 사랑에서 내일의 사랑으로 변해가죠. 그렇지만 그 한순간을 공유할 수 있었던 두 사람만이 변해가는 사랑으로 다가갈 수 있다고 난 생각해요.
안녕.
지금 후지가 사랑하는 사람이 있고, 그 사람이 후지를 사랑해주길 바랍니다.
설령 그것이 한순간일지라도 그 마음을 함께 나눴던 한 인간으로서.
-〈3월의 끝자락에 그는〉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