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전산화를 기반으로 한 ‘사이버 문화 혁명’으로 경제 관련 문제는 쉽게 해결되겠지만, 이전에 없던 ‘한가한 시간 문제’는 남게 된다. 아렌트는 이 문제에 대한 해결책도 제시한다. 먼저 “일하지 않은 자 먹지도 말라” 식의 노동을 의무로 여기는 도덕적 계명을 떨쳐 버려야 한다. 그다음 한가한 시간을 노동이 아닌 다른 활동으로 채워야 한다. 하지만 일에서 보람과 자긍심을 느끼던 인류가 일에서 해방된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이에 대해서 아렌트는 그럴싸한 답을 내놓지 못한다.
-01_“존재론적 특이점” 중에서
지렁이 목숨보다 인간의 목숨이 더 중요하다고 볼 근거가 자연에는 없다. 존재하는 것들의 중요성은 인간이 정한 것이다. ‘단지 수단이 아니라 언제나 동시에 목적으로 대하라’는 칸트의 정언 명령은 인간에 대한 것이다. 지렁이는 적용 대상이 아니다. 인간의 자격을 갖춘 존재자만이 정언 명령의 주체요 대상이 되는 것이다. 이때 인간 자격의 핵심 요소는 ‘이성’과 ‘도덕성’이다. ‘이성’은 스스로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다. 도덕성은 스스로 판단한 옳은 일을 선택해 행하는 능력이다. 이성과 도덕성에 따라 자율적으로 행위한 경우에만 행위자는 그 행위에 책임 능력이 있다.
-03_“기계와 책임” 중에서
시노하라 마사다케(篠原雅武)는 기후 위기나 인공지능의 발전은 칸트에게 정점에 이른 근대적 세계 이해가 한계에 봉착했음을 보여 준다고 말한다. 그에 따르면 이제 세계는 인간적 척도를 초월한 시공을 지닌 곳으로 새롭게 이해된다. 그리고 지구는 인간의 왕국이 아니라 여러 존재자 중 인류도 한때 거주한 곳으로 드러난다. 이제 철학은 이런 변화와 더불어 인간의 존재 방식도 바뀌게 됨을 인정하고, 그런 가운데 어떻게 살지를 물어야 한다. 시노하라는 퀭탱 메이야수(Quentin Meillassoux), 마르쿠스 가브리엘(Markus Gabriel), 그레이엄 하먼(Graham Harman) 등 21세기 철학자들의 작업을 소개한다. 이들이 근대적 인류가 소멸된 상태에서 인간 세계를 둘러싼 배경으로서의 세계를 사유하기 때문이다.
-06_“물자체와 인식 능력” 중에서
코로나 19 팬데믹을 계기로 소위 ’AI·에듀테크‘가 쏟아져 나왔다. 디지털 기기를 사용한 교육 기술인 이것이 교육 현장에서 실제로 얼마나 도움이 되었는지는 의문이다. 상업적으로 개발된 AI·에듀테크를 수업 현장에 억지로 끼워 넣었다는 비판도 많다. 전염병을 피해 2년 넘게 온라인에서 비대면 수업을 받은 학생들의 읽고, 쓰고, 말하는 능력이 전 세계적으로 현저히 떨어졌다. 기존의 AI·에듀테크가 대면 수업 빈자리를 충분히 메꾸지 못한 것이다. 향상된 성능의 인공지능 기술이 등장하기 전이라, 기술적 제약도 많았을 것이다. 생성형 인공지능이 나온 지금 단계에서도 컴퓨터 모니터 앞에서 진행되는 교육은 사람과 사람 사이 대면 교육의 대체물이 아니라 보완제 역할이 적절해 보인다.
-09_“철학 에이전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