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 107~108
시집, 아주 좋았습니다. 시 한 편 한 편에 감동했습니다. 정확히 표현할 수는 없지만, 어쩐지 기운이 나는 시였습니다. 앞으로 좀 더 열심히 해야겠다, 포기하지 말고 씩씩하게 살아야겠다, 노력해서 제대로 된 인간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었던 건 이 시집을 준 하야카와 유키나 덕분입니다. 유키나 덕분에 나는 새로 태어났습니다. 고맙습니다.
앞으로도 좋은 시, 많이 써 주길 바랍니다. 유키나가 언제까지나 지금처럼 가족과 함께 행복한 나날을 보낼 수 있기를 바랍니다.
P. 279~280
“다시는 스스로를 전과자로 지칭해서는 안 됩니다. 기소되지 않았으니 레이토는 전과자가 아니에요. 어리석은 행동을 반성하는 건 매우 바람직한 일이에요. 하지만 비굴해져서는 안 되지요. 기소된 적도 없는 자의 지문을 데이터베이스에서 파기하지 않았다니, 그게 오히려 불합리한 일입니다. 마땅히 그 점에 대해 분개해야지요. 분개하지 않는 건 레이토가 비굴해져 있기 때문이에요. 똑똑히 기억해 두세요, 비굴해지는 건 일종의 어리광입니다. 어차피 나 같은 사람은, 이라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그렇게 해 두는 게 속 편하니까요. 하지만 그런 식으로 도망치는 게 언제까지나 허용될 만큼 이 세상은 만만하지 않아요. 녹나무 파수꾼이라면 더욱더 그렇습니다.”
P. 289
“그런데 야나기사와 씨의 얘기라면 모순이 완벽히 사라지지. 어쨌든 이상한 건 그게 사건의 진상이라고 쳐도 어떻게 야나기사와 씨가 그런 걸 알고 있느냐는 거야. 그에 대한 야나기사와 씨의 대답은, 어떤 사람에게서 들었다, 이 세상의 부조리를 낱낱이 지켜보는 숙명을 짊어진 인물에게서 얻은 정보다, 라는 것이었어. 그게 누군지는 밝힐 수 없다는 주석을 달아서.”
P. 324~325
“항상 하던 것과는 맛이 조금 다르지만 이것도 좋군요. 아니, 오히려 더 맛있는 것 같기도 하고.”
“첫 요리, 대성공이네요.”
“레이토, 아까 무를 넣기 전에 미리 전자레인지에 돌렸지요?”
“그렇게 하면 무가 더 폭 익어서 좋대요.”
치후네는 무를 젓가락으로 자르며 날숨을 내쉬었다.
“정말 부드러워……. 그런 비법이 있다니, 전혀 몰랐어요. 재미있네요, 요리법을 잊어버린 덕분에 더 손쉽고 더 맛있게 만드는 방법을 알게 된다니. 그리 생각하면 차례차례 잊어 가는 것도 그리 나쁜 일은 아닌지도 모르겠군요. 어차피 별로 대단한 기억도 아니니까요.”
P. 326
“녹나무에 맡긴 염원은 반영구적으로 남게 됩니다. 다만 두 가지 예외가 있어요. 첫째는 같은 사람이 두 번 이상 예념하는 경우인데, 먼저 맡긴 염원은 나중 것으로 갱신됩니다. 요즘 말로는 업데이트라는 게 될까요. 또 한 가지는 예념한 당사자가 수념하는 경우인데, 그 염원은 녹나무에서 완전히 소실됩니다. 그 뒤에는 아무도 수념할 수 없어요. …… 그러니 그 방법을 이용해 추억을 되찾더라도 기회는 단 한 번이에요. 두 번은 없습니다. 예념한 당사자의 수념이 금지 사항이 아니지만, 감행할 거라면 그 점을 명심하도록 하세요. 그게 파수꾼의 역할입니다.”
P. 350
“햇볕이 쨍쨍 내리쬐는 가운데 한 소년이 사막을 걷고 있었습니다.” 고요히 가라앉은 행사장에 치후네의 허스키한 목소리가 울렸다. “소년이 찾고 있는 건 신비한 영험을 가진 여신이었습니다. 그 영험이란 미래를 보여 준다는 것입니다. 소년은 왜 미래가 보고 싶은 걸까요? 그건 지금까지 너무도 힘겹고 고통스러운 나날이었기 때문입니다. 전쟁이 일어나고 전염병이 퍼져 사랑하는 사람들과 헤어지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연달아 재해가 닥쳐 소중하게 여겨 온 것들을 모두 잃고 말았습니다. 이토록 끔찍한 일들뿐이라니, 내 인생은 대체 앞으로 어떻게 되는 걸까, 하고 불안에 떠는 나날이었습니다. 그때 미래를 보여 준다는 여신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래서 소년은 여신을 찾아 긴 여행을 떠났습니다.”
P. 370
“그 녹나무에 내 보물을 맡겼다면서요. 지금껏 살아오면서 가장 행복했던 날의 추억. 그렇죠?”
P. 377
레이토는 종이봉투에서 꺼낸 밀초를 촛대에 꽂고 성냥으로 불을 붙였다. 그리고 휠체어 앞에서 몸을 낮춰 그의 이름을 불렀다. “모토야.”
소년이 레이토의 얼굴을 보고 있었다. 초점이 어긋나지 않았다.
“지금부터 뭘 해야 하는지 알고 있지?”
모토야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고 입술이 달싹였다.
“레이토 씨가…….” 힘없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나한테…… 정말 좋은 꿈을…… 보여 주는 거예요.”
“꿈이 아니야. 실제 있었던 일이야. 네가 직접 체험한 거야. 그리고 그걸 보여 주는 건 내가 아니라 너 자신이야. 모두 다 모토야, 너의 추억이야.”
“나의 추억…….”
“응, 너의 추억을 마음껏 즐길 시간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