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한국 사회가 식민지와 냉전의 풍파를 거치면서 근대주의의 시각에서 역사의 기억을 개편해 왔고 그 결과 전통과 근대의 이분법이 자국사 해석에 강하게 투영됐음을 알고 있다. 전통의 마지막과 근대의 시작이 접합한 전환기로서 한국 근대사의 시공간을 설정하고 개화와 수구의 배역을 역사의 주체에 부과한 다음 그 배역에 어울리는 역사 서사를 만들어 왔음도 알고 있다.
이것이 이 책의 제1장 「개화와 수구」(노관범)의 출발 지점이다. 책의 도론으로서 개화의 관점에 관한 총론적인 물음을 던지는 차원에서 한국 사회에서 생성된 ‘개화와 수구’의 인식틀, ‘개화와 수구’의 역사 서사, 그리고 가장 중요한 영역으로 ‘개화와 수구’의 현실 인식을 검토하였다.
특히 갑오개혁의 개화와 이에 대한 저항으로서 수구가 맞부딪친 가운데 대한제국의 언론 매체에서 ‘개화와 수구’의 현실 인식 및 개화의 성찰과 혁신을 추구하는 개화 담론을 전개했음을 규명하였다. 이것은 개화 주체의 사상사에서 개화 언어의 사상사로 개화사상의 접근법을 변화시킴으로써 개화사상사의 본격적인 국면이 갑오개혁 이후의 시기에 설정될 수 있음을 보인 것이다.
이 책의 제2장 「개화와 개벽」(김지현)은 한국의 문명개화 관념의 수용 국면에서 이와 동시적으로 분출한 도교 전통의 종교적인 개화에 대한 논고이다. 구체적으로 조선 후기 종교 결사와 권선서, 종교적 말세론과 도덕 개화, 그리고 개화와 개벽 등에 관하여 논했다. 이는 한국의 개화사상 이해의 당연한 전제로 작용했던 문명개화 관념의 상대화에 기여한다.
전근대 동아시아 도교 전통의 종말론과 종교적 구원을 위한 도덕 개화는 개항기 한국의 개화사상을 조명할 새로운 지적 자원으로서 의미가 있다. 개항기 조선 왕실과 정부 관료의 도교 문화와 도덕 개화, 그리고 민간 동학의 개벽사상이 보여주는 한국 개화사상의 근대적 진로는 문명개화에 편향된 개화 인식의 성찰과 극복을 위한 새로운 영감을 불어넣는다.
이 책의 제3장 「시무개혁」(한보람)은 개항기 조선 정부의 개혁 정책을 개화 개념으로 포착하여 자명하게 개화 정책이라고 간주해 왔던 연구 관심의 인식론적 반성을 제기하는 논고이다. 유교적인 개혁론이 시무 개념과 결합했던 조선시대 사상사의 역사적 흐름을 고려하여 조선 말기 박규수 그룹의 대외 개방 정책과 국가 개혁 정책의 역사적 성격에 부합하는 개념은 개화가 아니라 시무임을 강조했다.
이런 견지에서 조선 정부의 개혁을 ‘시무개혁’으로 규정하고 경화학계 내부의 시무개혁 세력, 개항과 시무개혁, 개화정책과 시무개혁 등을 차례로 논하였다. 개항 이후의 정세 변화에 조응하여 박규수 그룹의 후속 세대에서는 시무의 본디 의미에 합당하게 새로운 시무 방향을 모색하여 조선의 부국강병에 친화적인 통상·재정 개혁 정책을 추구했음을 논했다.
이 책의 제4장 「문명개화」(김종학)는 문명개화의 시각에서 한국 개화사를 새롭게 체계화한 논고이다. 한국에서 문명개화 관념의 수용과 이와 결부된 역사적 실천의 국면에 따라 한국 개화사를 크게 개항 후 문명개화의 전파, 갑신정변 후 문명개화의 잠복, 갑오개혁 후 문명개화의 부활로 구획하여 각 단계의 역사적 상황을 서술하였다.
이 논고는 한국 개화사의 체계적인 이해를 제공함은 물론 한국 개화사의 역사적 이해에 한국 개화사상의 관습적인 이해 방식이 얼마나 유효한가 하는 문제를 제기했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다. 비밀결사 개화당은 권력의 탈취를 목적으로 활동한 정치적 욕망의 주체이고 개화사상의 실천에 관한 자아의식은 의외로 찾기 어려우니 개화당 이해의 본질적인 키워드는 사상이 아니라 권력임을 강조했다.
이 책의 제5장 「동도서기와 구본신참」(장영숙)은 한국 개화사상의 조류에서 문명개화의 길과는 다르게 유교 전통과 서양 근대의 조화와 절충을 추구한 조선 정부의 동도서기 정책과 그 역사적 흐름의 통시적인 이해를 추구한 논고이다. 개항기 조선 정부의 동도서기 정책에 선행하여 조선의 개항에 이르기까지 해방론海防論과 채서론採西論을 중심으로 조선 사회에서 진행된 화이론적 대외 인식의 변화를 검토했고, 조선 정부의 동도서기론의 역사적 흐름으로 대한제국 초기의 구본신참론을 확인하는 가운데 서양 신법 수용론의 확산과 서양 신문명의 도래에 따라 동도서기론이 동교서법론東敎西法論으로 변화했음을 서술했다. 동도서기의 중심이 동도에 있었다면 동교서법에 이르러 동도는 동교로 축소되고 서기가 서법으로 확대되었음을 논하였다.
이 책의 제6장 「대한제국 전기 언론의 문명론과 유교」(김태웅)는 대한제국 전기 언론 매체와 유교 지식인의 개화사상을 검토한 논고이다. 구체적으로 『독립신문』의 문명론과 유교 인식, 『황성신문』의 문명론과 유교 인식, 그리고 중추원 언론의 시무개혁론을 검토하였다. 이 가운데 『독립신문』과 『황성신문』의 문명론을 비교하면 전자는 사회진화론의 반영을 후자는 유교식 언표의 활용을 특색으로 하면서도 교육 진흥, 산업 발전, 균세 외교 등을 공유했음을 알 수 있다. 양자의 유교 인식을 비교하면 전자는 유교망국론과 기독교수용론을, 후자는 수시변통론과 변법자강론을 골자로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아울러 대한제국 언론계의 중요한 일부를 구성하는 중추원의 경우 중추원을 통한 유교 지식인의 헌의 내용을 시무개혁론으로 제시하였다.
이 장의 필자는 본래 조선 후기 실학 전통에 접맥된 시무개혁론이 개항을 전후하여 내수외양론, 내수외교론, 내수자강론 등으로 전개되다가 마침내 문명개화론과 변법자강론으로 분화함을 논한 바 있는데 이 논의를 적용한 해석으로 볼 수 있다.
이 책의 제7장 「대한제국 말기 언론의 문명론과 유교」(정숭교)는 대한제국 말기(순종 치세) 언론 매체와 유교 지식인의 개화사상을 검토한 논고이다. 구체적으로 『황성신문』, 『대한매일신보』, 그리고 『대동학회월보』를 대상으로 각각의 문명론과 유교관, 그리고 세계관을 규명했다. 『황성신문』의 경우 이 세 영역에서의 핵심 주제를 각각 ‘보수를 위한 개진’, ‘유교개혁론’, ‘세계주의’로 제시하였고, 『대한매일신보』의 경우 각각 ‘주체적인 문명수용론’, ‘유교비판론’, ‘국수주의’로 제시하였으며, 『대동학회월보』의 경우 각각 ‘신구학 절충론’, ‘유교수호론’, ‘동양주의’로 제시하였다. 문명과 유교와 세계를 바라보는 각 매체의 개별 관점의 규명은 물론 그러한 관점들의 비교를 통해 매체 간 상호적 이해의 도달에 성공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