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랑이 사는 2층 주택 단지는 백여 가구가 가로수 길을 사이에 두고 나란히 마주 보고 있었다. 모두 목조 주택으로 깔끔한 하얀색 벽에 집마다 지붕 색이 달랐다. 그림책에 나오는 유럽의 한적한 마을처럼 예쁜 동네였다. 주랑이네 집은 빨간색 지붕에 현관문조차 강렬한 빨간색이었다. 주랑의 엄마가 선택한 색이다. 침대 위의 빨간색 이불과 베개도 엄마가 준비했다. 유독 빨간색을 좋아하는 걸 보면 엄마 취향도 꽤 독특했던 모양이라고 주랑은 생각했다. (……) 아침 공기가 선선했다. 현관 앞에서 주랑은 아침 햇살에 더 선명해 보이는 붉은 지붕을 올려다보았다. 옆집 초록 지붕과 비교되어 유난히 서늘한 기운이 뿜어져 나오는 것 같았다. _14쪽, ‘초록 지붕 집 도강비, 빨간 지붕 집 우주랑’에서
“비켜, 우주랑! 여자라고 안 봐줘.”
주랑은 누구에게 맞아 본 경험이 처음이었다. 그저 멍하고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가슴 밑바닥에서 무언가 끓어오르는 느낌이 들었다. 그것은 가슴 위로 점점 올라오며 머리끝으로 뻗어 갔다. 머리털이 성난 고양이 털처럼 곤두선 느낌이었다. 주랑은 자세를 살짝 낮추고, 민기의 팔을 잽싸게 어깨 위로 잡아끌어 몸을 홱 돌렸다. 그러자 민기의 몸이 공중으로 붕 뜨며 한 바퀴를 돌고는 바닥으로 내동댕이쳐졌다. _30쪽, ‘성난 고양이처럼 곤두서는 머리털’에서
주랑은 잠자리에 누워 이불을 목까지 끌어당겼다. 열두 살이 된 후로 모든 게 예전 같지 않았다. 정확히 계산하면 3월에 생일이 지나고 도강비가 이사 온 무렵부터 변화가 생긴 것 같았다. 얼마 전 강비가 어깨에 걸쳐 준 붉은 망토에서 나던 냄새가 이불에서도 났다. 쇠 냄새 같기도 하고 비릿한 피 냄새 같기도 했다. (……) “도깨비한테 홀린 거야?” 그때 허공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얘들아, 나는 지금 도깨비감투를 쓰고 있어.” 주랑과 건우 앞에 다시 강비가 반짝 나타났다. 두 아이가 후다닥 돗자리 밖으로 뛰쳐나갔다. 강비가 손을 펼치자 도깨비감투가 휘리릭 손안에서 사라졌다. 건우가 강비 손을 덥석 잡고는 위아래로 흔들며 이리저리 살펴봤다.
“가, 강비야! 너 귀신이야?” _50~61쪽, ‘셋이 10인분’에서
“그러니까 엄마가 뿔 달린 도깨비라고요?” “뿔은 안 달렸고, 사람이랑 똑같이 생겼어. 단지 태생만 도깨비일 뿐이야.” “살아 있어요?” 아빠가 고개를 끄덕였다. 주랑은 이제껏 죽은 줄로만 알았던 엄마가 살아 있다는 말에 기쁜 마음보다 화가 앞섰다. “어디 살아요?” “공존하지만, 인간은 갈 수 없는 다른 차원에. 네 엄마는 도깨비 수장의 딸이야. 지난주에 도깨비 수장인 할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이제 그 자리를 물려받았어. 그래서 옆집에 사는 도깨비들이 일주일간 집을 비운 거고. 네가 도깨비 기운이 강해져서 인간 세상이 네게 위험해졌어. 도깨비 수장을 미워하는 요괴가 많거든.” 주랑은 머리를 한 대 세게 얻어맞은 것 같았다. 믿기 어려운 이야기였다.
‘도깨비가 있다는 것도 믿기지 않는데 내가 도깨비라고? 그리고 내가 위험하다고?’ _64~66쪽, ‘씨름 한판’에서
아빠는 주랑을 바라보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 “나한테 이런 힘이 있단 말이야? 너처럼 채찍 같은 것도 손바닥에서 꺼낼 수 있어?” “그건 내 손안에 감춰진 도깨비방망이야. 너도 곧 받을 거야. 어쨌거나 조심해야 해. 이유도 없이 인간을 해치면 도깨비 세계에서도 징벌받아.” 주랑이 고개를 끄덕였다. 가슴이 콩콩 뛰었다. 늘 우유부단하고 기죽어 있던 자신이 도깨비라니. 힘이 세고 요술도 부릴 수 있는 도깨비라는 게 믿기지 않았다. 하지만 인간이 아니라는 것 또한 묘하게 마음을 불안하게 했다. ‘그래서 그동안 친구들이랑 어울리지 못하고 겉돌았던 건가? _66~70쪽, ’씨름 한판‘에서
“주랑아, 그만해!” 주랑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강비를 바라보았다. “혹시 내가 그런 거야? 난 상상만 했는데.” 강비가 불안한 얼굴로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그때 준영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건우에게 달려들었다. (……) “찾았다. 잡종 도깨비.” 주랑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머리 위에서 초록색 나뭇잎이 물결치듯 넘실거렸다. 나뭇가지가 버석거리며 서로 부딪치더니 먹구름이 몰려왔다. _77쪽, ’씨름 한판‘에서
“코리야, 어떡해. 우리 도깨비 집에 갇혔어.”
주랑은 천장을 받치고 있는 대들보와 지붕의 뼈대 같은 서까래를 쳐다보다 까무룩 잠이 들었다. (……) “씨름에서 이긴 도깨비가 오늘의 승자야.” “그래, 덤비라고. 납작한 네 코를 오늘 더 납작하게 눌러 줄 테니까.” 주변 곳곳에서 놀던 도깨비들이 씨름터로 달려가 소리치며 둘의 주변을 에워쌌다. 으라차차 기합 소리와 서로를 헐뜯고 약 올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무도 주랑에게 관심이 없었다. (……) 주랑이 말했다. “오도깨비가 도대체 어디 숨었는지 도무지 찾을 수가 없어요.” “주문을 외우면 들릴 거야.” “주문이요?” “그거 있잖아, 그거! 그게 뭐더라? 자네는 아는가? (……) “얘들아, 오도깨비 봤니?” 한 아이가 주랑을 바라보았다. “오도깨비가 숨으면 절대 못 찾아. 주문을 외워, 아주 조용히. 잘 봐.” 아이가 입 모양으로 말했다. 주랑은 아이의 입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어디선가 들어 보았던 낯익은 주문이었다. _97~99쪽, ‘낯익은 주문’에서
준영은 핏발 선 눈으로 주랑을 잡아먹을 듯 노려보았다. 준영의 목소리가 아닌 거칠고 탁한 목소리가 우렁우렁 울렸다. “잡종 도깨비, 수장의 핏줄인 너를 인간 세계에 숨겼을 거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겠어. 집에 말 피를 칠해 놓고 감쪽같이 숨었을 줄이야. 이제야 복수할 수 있게 됐구나. 미련하고 멍청한 도깨비들. (……) “잡종 도깨비야. 누가 널 원할까? 네 어미, 네 아비 모두에게 너는 짐이 아닐까?”
인간도 아니고 도깨비도 아니었다. 어느 곳에도 속할 수 없는 불필요한 존재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혹부리 영감이 서서히 주랑에게 다가왔다. 그때 혹부리 영감 뒤에 안개가 걷히고 공원 뒤 숲이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벤치에 부딪쳤던 건우가 몸을 일으켜 세우고 풀숲을 쳐다봤다. _122~125쪽, ‘이 잡종아, 누가 널 원할까?’에서
“이, 이런 잡종 도깨비에게 당하다니.” 혹부리 영감의 얼굴이 괴상하게 일그러지더니 몸이 흐물흐물 녹아내렸다. 진득진득한 시커먼 구정물 웅덩이에 준영이 쓰러져 있었다. 곧 구정물이 먼지처럼 흩어져 사라졌다. 주랑은 돔으로 달려갔다. 돔은 바람 빠진 풍선처럼 강비의 몸을 바짝 쪼이고 있었다. 강비가 정신을 잃을 것 같았다. 주랑은 방망이로 돔을 힘껏 내리쳤다. 한참을 격렬하게 내리치자 돔에 균열이 한 줄씩 생겼다. 이윽고 돔이 쩍 갈라지며 사라지고, 강비가 바닥에 풀썩 쓰러졌다. 정신을 차린 건우가 뛰어와 강비를 끌어안았다. 주랑이 숨을 거칠게 몰아쉬었다. “강비야, 괜찮니?” 강비가 힘없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주랑의 손을 잡고 일어섰다. 건우는 쓰러져 있는 준영에게 다가갔다. “준영아, 정신 차려.” 준영이 부스스 몸을 일으켰다. 주위를 둘러보던 준영이 겁에 잔뜩 질린 채로 몸을 웅크렸다. “괴물이, 내 몸에 들어왔어. 아무것도 내 맘대로 할 수
가 없었어.” _138~139쪽, ‘도깨비 대 요괴의 결투’에서
“도깨비 세계에 사흘이나 갇혀 있었는데, 우리 세계에서는 십 분이지 뭐야.” “네가 우연히 도깨비 세계에 들어간 건 아니야. 네게 도깨비방망이가 필요해서 코리가 인도한 거야. 코리도 도깨비 세계의 영물이야. 그래서 네 주변에 머물러 있던 거고.” 주랑이 무릎에 앉은 코리의 등을 쓰다듬었다. _141쪽, ‘우리 모두의 세계로 돌아와’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