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말]
이 소설은 타자에 의해 규정된 삶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인간의 고통스러운 노력, 그리고 그 과정에서 드러나는 인간군상의 이기심과 추악한 인간 본성에 대한 이야기다. 과연 한 개인이, 한 인간이 타자와의 갈등에서 벗어나 온전히 자신의 주체성을 지키며 살아갈 수 있을까? 우리가 스스로 규정하는 자아와 타자가 규정하는 자아 사이의 차이는 어떻게 극복될 수 있을까? K는 이러한 불일치 속에서 끝없는 불행과 고뇌를 겪으며 몸부림친다. 그는 자신의 주체성을 지키려 하지만, 객관이라고 믿는 것이 타인의 조작과 왜곡을 통해 얼마나 멀어질 수 있는지 점점 더 깨닫게 된다. 경찰관 K는 우리의 일부이며, 우리 모두가 겪고 있는 내적 갈등의 한 단면일 뿐이다. 그의 고통은 개인의 것이지만, 그가 몸부림치는 주체성과 타자의 경계는 우리 모두가 마주하고 있는 문제이다.
마침내 우리는 이렇게 묻는다. 인간이 진정한 자유를 얻기 위해서는 타자로부터 얼마나 멀리 떨어져야 하는가? 아니면, 불가피한 타자와의 갈등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스스로를 재구성하고, 그 안에서 삶의 진정한 의미를 찾아야 할 것인가?
[책 속으로]
여러 해 동안 길을 잃고 헤맸다. 잃어버린 시간, 방황의 시간을 통해 때로는 스스로를 위로하며, 때로는 자신을 비하하면서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했다. 그 사건을 마치 아무것도 아니었던 것처럼 살아가려 했었고, 심지어는 기억에서 완전히 지우려고도 노력했다.
사무실은 회색 블라인드와 패널 벽, 갈색 응접탁자와 자이언트 소파, 녹색 부직포와 유리로 덮인 회의 탁자, 그리고 업무용 컴퓨터가 놓인 책상 뒤에 걸린 태극기와 국정지표로, 여전히 관공서의 모습 그대로였다. 시답지 않은 서류를 챙기다가 의식 한쪽에서 멈춰있던 상념이 오래된 전구처럼 깜박거렸다. 알 수 없는 기분에 휘청거리고 서류의 글자가 흐릿해지면서 숨을 쉴 수 없을 정도로 가슴이 답답하였다.
-p. 8
무난한 경찰청 입성이었고 커리어 전망은 나쁘지 않았다. 그러나 이 부서에서 어떤 요인이, 또는 어떤 우연이, 내 인생 최초의 파멸을 불러왔다. 스스로도 몰랐던 어떤 개성과 언어적 태도가 그 추락의 단초를 제공하고 있었다. 이것은 어떤 부패나 직권남용이라는 형사법적 법률위반과는 사뭇 다른 현상이었다.
돌이켜 보면, 이 부서로의 부임이 시작이 아니라 훨씬 이전부터 몰락은 내면에서 점차 진행되고 있었다. 입신양명에 대한 자신은 물론 주변의 기대가 내 능력과 의지보다 더 크게 느껴졌다. 아무리 주변을 둘러보아도 내면을 위로하거나 손을 내밀어 줄 누구도 없는 듯했다. 외로움과 고립감이 계속해서 나를 에워싸고 있었다. 버거웠다.
-p. 14
인생에서 내 의지가 얼마나 영향을 미칠 수 있을까? 시간을 거슬러 다르게 행동했거나 다른 사람과 인연이 되었다면 그 사건은 일어나지 않았을까? 하지만 지난 시간을 후회하거나 원망하는 것은 부질없는 일이며, 아쉬운 감정보다는 감내하는 이성이 필요하다. 인생은 우연의 연속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과거, 현재, 미래가 연결되어 ‘일어날 사건’을 만들어낸다. 일단 일어날 사건이 일어나면 그것은 더 이상 우연이 아니다. 우리는 주어진 결과를 받아들이는 숙명의 여정에 있다. 인도에서 열린 아태 지역 협력 회의에서 대만 대표단과의 만남은 나에게 과거의 인연을 현재로 소환하여 주었고, 그 사건이라는 미래의 불행을 예고하고 있었다.
-p. 70
당시에는 그의 이중성이 나에게 미치는 영향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가 필요 이상으로 다가오는 태도를 나에 대한 인정과 존중으로 착각했다. 나의 창의적인 업무 방향성과 그의 경험적 업무 전문성을 잘 결합해 국제 치안 협력 업무를 멋지게 발전시킬 수 있다고 순진하게 믿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아부는 내가 강하지 못하거나 그의 이익에 해가 되면 언제든 철회될 수 있는 전략적 아부였음을 몰랐다. 그 아부 속에 내재된 철저한 생존을 위한 일시적 순종에서 묻어나오는 독기를 파악하지 못했다. 순진함의 대가는 혹독했다.
-p. 123
지시가 내려진 지 하루 만에 그가 내 사무실에 들어와 “직원들이 힘들어해서 그 일을 못 하겠습니다.”라고 말했다. 계장이 이러한 반응을 보인 것은 그의 업무 능력상 혼자 할 수도 있는 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나에 대한 완전한 적대감의 표현이었다. 그가 업무 지시를 거부할 만큼의 당면 현안이 있었거나, 지시된 MOU 체결 업무가 난해하거나 특별히 힘든 업무는 아니었다.
-p. 181
누군가는 쉽게 말한다. 조직의 상사가 저항이나 반감을 산 것 자체가 ‘부덕과 불찰’, ‘리더십의 부재’를 증명한다고. 가혹한 처벌은 당연하다고. 우간다 항명사건 이후, 고향 선배인 질서과장 앞에서 받은 자존심의 상처, 외국인인 알렉스와의 만남에서 존재감 상실, 그녀가 준 케이크를 쓰레기통에 버린 일, 그리고 대만 출장 동행에 대한 거부 의사로 이어지는 일련의 사건들이 나에 대한 적대의식을 최고조로 끌어올렸다.
-p. 228
그는 겉으로는 티백 녹차 한 잔을 내밀며 예우하는 척했지만, 눈빛과 몸짓에서는 나를 철저히 분석하려는 기색이 역력했다. 마치 요리할 재료를 세밀하게 살피듯, 그의 시선은 나를 이리저리 훑었다.
“불미스러운 일로 여기에 와서, 조사관님을 비롯하여 여러 사람을 힘들게 해서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
그는 당연히 자기 일을 하는 것뿐이라며, 마치 무슨 칼자루를 쥔 듯 실실거리는 웃음을 흘렸다. 조사가 시작되자, 그는 거만한 태도로 말을 건넸다. 그의 태도는 자신이 우월하다고 느끼는 감정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앞서 보여준 어색한 예우는 단지 겉치레에 불과했고, 비록 그가 경감이라는 하위 계급에 속할지라도, 지금 이 순간에는 총경의 목줄을 끊을 수 있는 사냥꾼의 위치에 있다는 자신감에서 나온 양면적인 감정의 표현이었다는 것을 금방 알아차릴 수 있었다.
-p. 339
카프카의 소설 『변신』에서 갑자기 벌레로 변한 그레고리처럼, 나도 이제 조직에서 벌레가 되어버렸다. 그의 또 다른 소설 『성』에서 K가 아무리 애써도 성안의 사람들에게 접근할 수 없었던 것처럼, 성안에서 지위가 낮지 않았던 나마저도 성밖의 K처럼 그들에게 접근할 수 없게 되었다. 오로지 유형의 형벌을 받아 경찰 조직의 주변을 맴돌 처절한 운명에 맞닥뜨리고 있었다. 경찰 조직 내에서 나를 대변해 줄 모든 요소가 하나씩 사라지면서, 점점 변신한 벌레처럼, 성밖의 K처럼 지쳐가고 있었다. 아니, 서서히 죽음을 맞이하고 있었다.
-p. 381
유형이 주는 좌절된 욕망의 회한이 내 의식과 상관없이 수시로 엄습해와, 일과를 하루하루 보내려면 마지막 남은 힘까지 쥐어짜내야 했다. 이 처절한 고립적 의식 속에서 겉은 반질반질한 칠흑의 표면을 가지고 있지만, 내면은 썩어가는 고래의 사체처럼 언제 터질지 모르는 팽창을 간신히 견뎌내고 있었다.
-p. 47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