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대단한 분이에요.” 매그덜린 수녀가 수도원장의 손님 자격으로 저녁 식사를 하러 간 뒤, 휴는 캐드펠과 나란히 회랑을 가로지르며 입을 열었다. “제가 보호 조치를 제공할 것도 없이, 차라리 숲 전체의 통솔권을 그분께 드리는 편이 나을 것 같은데요. 저런 분을 링컨에 모시고 갔어야 했는데……! 우리에게 맞선 자들과 달리 저분의 적들은 실패했잖습니까. 내일 수녀님을 모시고 남쪽으로 가는 길은 참 즐거운 여정이 될 것 같습니다. 배울 것도 많겠고요. 전 그저 저분이 베풀어주는 어떤 조언이든 열심히 귀 기울일 작정입니다.”
--- 37쪽
캐드펠은 이제 그 가느다랗고 활동적인 눈썹의 움직임이나 검은 눈이 빛을 발하는 순간을 잠시도 놓치지 않고 전부 읽어낼 만큼 그를 잘 파악하고 있었다.
“제 이름은 엘리스 압 키난입니다. 어머니가 오아인 귀네드의 사촌이셨죠. 아버지가 작고하시자 오아인은 저를 삼촌 댁에 데려다 놓고 엄하게 감시했어요. 그렇게 전 그리피스 압 메일리르 삼촌 댁에서 사촌 엘리드와 형제처럼 성장했습니다. 그리피스 숙모는 오아인의 먼 친척이고, 삼촌 역시 내각에서 고위직을 차지한 인물이에요. 오아인은 우리 모두를 아끼고 있으니, 만일 제가 이렇게 잡혀 있는 줄 알면 그냥 내버려두지 않을 겁니다.”
--- 49쪽
엘리드는 입을 꾹 다문 채 떨리는 걸음을 옮겨 그를 따라 바깥 마당으로 나왔다. 당장은 여자들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날이 쌀쌀해 바깥에는 남자들만 남아 있었다. 의례적인 접대를 마친 뒤 프레스코트 부인과 멜리센트는 곧장 접객소로 물러간 모양이었다. 말에 오를 채비를 갖춘 웨일스인 일행이 휴와 함께 문지기실 부근에 모여 느긋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말들은 안장을 얹은 채 자갈밭을 짓밟으며 나직하게 울음소리를 내었다. 엘리스도 에이논의 등자 옆에 서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고향으로 돌아가게 된 것이 그리 기쁘지 않은 듯 얼굴이 잔뜩 굳은 채였다. 캐드펠이 급히 그쪽으로 향하자 모두가 그의 표정을 보고는 놀라 신경을 곤두세웠다.
“나쁜 소식이오.” 캐드펠이 무뚝뚝하게 말했다. “장군, 당신의 노고가 허사로 돌아갔구려. 출발을 잠시 연기해야 할 것 같소. 방금 진료소에서 나오는 길이오. 길버트 프레스코트가 사망했소.”
--- 129~130쪽
행동을 멈추자 생각할 시간이 생겼다. 캐드펠은 모든 그림을 이어 맞출 두 개의 퍼즐 조각에 대해 그 어느 때보다 꾸준하고도 깊은 생각에 빠져 있었다. 에이논 아브 이셀의 금 핀, 그리고 직접 본 적은 없지만 사람을 질식시켜 죽음을 재촉한 수수께끼의 천이 바로 그것이었다. 그런데 정말 그 천을 본 적이 없을까? 물론 의식하고 본 적은 없다. 그러나 그 물건은 틀림없이 이곳에 있었다. 여기, 이 수도원의 진료소, 바로 그 병실에 말이다. 그리고 천을 찾는 작업을 시작한 것도 바로 그날이었다. 죽음이 발견된 순간부터는 수도원 정문이 폐쇄되어 그 누구도 밖으로 나갈 수 없었다. 그렇다면 사건 이후 바깥출입이 자유로웠던 시간은 얼마나 될까? 수사들이 모두 식당으로 간 시각과 길버트의 죽음이 알려진 시점 사이에는 누구든 검문 없이 밖으로 나갈 수 있었을 것이다.
--- 205쪽
“전하,” 그는 이렇게 입을 열었다. “제 기억이 정확하다면, 언젠가 전하께서는 길버트 프레스코트의 죽음과 관련해 살해된 사람의 몸값은 살해범의 목숨만이 대신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곧 또 다른 죽음이 있어야 한다는 의미입니까? 웨일스 법에서는 끝없는 유혈과 반목을 막기 위해 피의 대가에 상응하는 물질적인 보상을 허용하고 있지요. 저로선 전하께서 굳이 웨일스 법을 외면하고 노르만 법을 취하시리라 보지 않습니다만.”
“길버트 프레스코트는 웨일스 법에 따라 살지 않았소.” 오아인이 대단히 날카로운 눈길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러니 그의 죽음에 웨일스 법을 적용할 수도 없지. 게다가 재산이나 가축으로 보상한들 그의 미망인과 자녀들에게 무슨 가치가 있겠소?”
--- 272쪽
캐드펠이 상처를 살피자 그는 주검이나 다름없는 자에게 괜한 수고 말라는 듯 서글픈 미소를 지어 보이면서도 얌전히 몸을 맡겼다. 상처 자리를 닦아내고 새 붕대를 감아주는 동안에도 신음 한 번 내지 않고 고통을 참았으며, 약물을 입에 넣어주자 어떻게든 목구멍으로 넘기려 애를 썼다. 그가 감사를 표하고 마침내 편치 못한 잠에 빠져드는 것을 확인한 뒤, 캐드펠은 밖으로 나와 휴가 남겨두고 간 이들 중 하나를 찾아내서는 서둘러 와달라는 전언과 함께 슈루즈베리로 보냈다.
--- 31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