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백조의 호수〉 시나리오는 겔체르와 베기체프의 것으로 여러 민족의 옛이야기에 등장하는 백조의 모티프에 근거한 것이었다. 〈백조의 호수〉 시나리오가 다른 보통 발레 시나리오와 구별되는 점은 화해하고 타협하는 대결말 없이 비극으로 끝마친다는 점이다. 여주인공은 서약을 저버린 남자 주인공의 품속에서 숨을 거둔다. 파도가 밀려와 그들을 덮어 버린다. 폭풍이 지나가고 잔잔해진 호수 위로 한 무리의 백조 떼가 떠 있다.
이 테마를 제일 먼저 작품화한 사람은 차이콥스키라고 할 수도 있다. 그가 1871년에 이미 어린이들을 위한 단막 발레극 〈백조들의 호수〉를 썼기 때문이다. 어쨌든 마법사에 의해 백조가 돼 버린 아름다운 오데트를 사랑하게 된 왕자 지그프리트에 대한 발레의 구상이 이 작곡가의 마음을 끌었음은 분명하다. 오데트와 비슷하긴 하지만 소심하지도 상냥하지도 않고 반대로 당당하게 자신을 유혹하는 오딜을 무도회에서 만난 지그프리트는 여전히 같은 꿈을 뒤좇는다. 그리고 자신의 운명적인 실수를 깨닫자 고통과 죽음으로 그 실수를 만회하려 한다. 그런 종류의 줄거리는 차이콥스키에게 익숙한 것이었다. 죽음에 대해 승리를 거두는 사랑이라는 테마는 이전에도 그의 마음을 사로잡은 적이 있었다.
2.
러시아 발레 극장의 역사에서 19세기 후반은 프티파의 시대다. 마리우스 프티파[Мариус И. Петипа, 본명 빅토르 마리우스 프티파(Victor Marius A. Petipa), 1818∼1910]는 오랜 기간 동안 세계 제일의 발레 극장을 지휘했다. 56년이라는 세월 동안 그는 46편의 독창적인 연극들을 창작해 냈다. 그중 수작으로 꼽을 수 있는 것은 〈돈키호테〉, 〈라 바야데르〉, 〈잠자는 숲속의 미녀〉, 〈레이몬다〉와 〈백조의 호수〉 중 1막과 3막으로 이 작품들은 러시아와 해외의 무대에서 꾸준히 상연되고 있다. 그 외에도 그는 〈헛된 조심성〉, 〈지젤〉, 〈파키타〉, 〈코르사르〉, 〈라 에스메랄다〉, 〈코펠리아〉 등 선임자들의 발레를 보존했고 더 풍부하게 만들었다. 프티파는 위대한 작곡가이자 심포니스트인 차이콥스키, 글라주노프와 발레 극장의 결합을 실현시켰다. 그는 페테르부르크 및 모스크바의 무대에서 연기자들을 많이 길러 냈다. 동시에 프티파의 작품 활동은 당시의 모순도 역시 반영한 것이었다.
3.
아그리피나 바가노바(Агриппина Я. Ваганова, 1879∼1951)는 자신의 오랜 경력의 시종(始終)을 러시아 발레 아카데미즘의 수호자로 일관했다. 그녀는 1897년에 무대에 섰으나 발레리나의 칭호를 받은 것은 1915년으로 은퇴를 막 앞둔 시점이었다. 그녀는 지칠 줄 모르는 노력으로 자신의 부족한 점을 극복해 나갔고 드높은 전문적 기교를 달성해 냈다. 그리고 이것으로 인해 복잡한 형태의 발레 연기, 즉 독무에서 그녀는 강점을 가질 수 있었다. 평론가들은 바가노바를 “바리아시옹의 여왕”이라고 불렀다. 사실 그녀는 〈코펠리아〉에서 라보타의 바리아시옹과 〈돈키호테〉에서 숲의 요정들의 여왕의 바리아시옹, 〈곱사등이 망아지〉에서 물의 여왕의 바리아시옹 등에서 겨룰 자가 없었다. 1911년 바가노바가 발레 〈시냇물〉에서 나일라라는 주역을 맡았을 때 이 여주인공이 추는 세 개의 바리아시옹은 전례 없는 빛을 발하며 굉장한 인기를 끌었다. 나일라 이외에도 〈백조의 호수〉, 〈곱사등이 망아지〉, 〈지젤〉 등의 배역들이 바가노바의 레퍼토리에 포함되었다. 그녀가 연기한 지젤은 별로 성공을 거두지 못했는데 이 발레리나의 개성과 잘 맞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포킨 발레 연출작 중에서 바가노바는 순수하게 고전적인 분량만 연기했다. 〈쇼피니아나〉에서 마주르카, 〈사육제〉에서 나비 등이 이에 해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