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는 권력욕을 가리는 빈말이었을까?
일본의 유신 지사들도, 박정희와 김재규도 ‘유신’에 중독된 사무라이들이었다!
자신이 믿는 가치를 위해 죽어도 좋다는 일본 유신의 관념은
번영과 전쟁의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다 세계대전으로 그리고 파멸로 일본을 이끌었다.
유신 지사 박정희 역시 국가를 탈취하고 번영시키고 마침내 파멸 직전에 이르렀다.
한일 역사의 문제적 인물들을 움직인 동력, 그것이 ‘유신’이다!
#1. 10월 유신은 ‘쇼와 유신’의 후계자다: “자네들은 ‘유신’을 계속하라!”
1936년 2월 29일, 며칠 전 시작한 청년 장교들의 2.26쿠데타가 이제 막 끝나려 하고 있었다. 일본국 육군 1사단 보병3연대 6중대장 안도 데루조 대위는 황도파 청년 장교의 한 명으로서 군부 내 라이벌인 통제파로부터도 인정을 받을 정도로 신망이 두터웠다. 안도는 쿠데타를 말렸으나, 결국 쿠데타가 일어나자 그 누구보다 열심히 현장을 지휘하고 성공을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상부의 비겁함과 배신으로 고립되고, 거기에 더해 무력의 차이가 엄청났다. 처음부터 역부족인 싸움이었다. 토벌군의 투항 권유 방송이 계속되자 안도는 부하들에게 투항을 명령한 뒤 자신의 목에 대고 권총 방아쇠를 당겼다(총기 불량으로 즉사하는 데 실패하고 후에 사형당했다).
당시 청년 장교들은 무엇을 위해 떨쳐 일어났던 것일까? 2.26쿠데타는 메이지 유신으로 겉모습만 바뀐 일본을 다시 한번 철저히 바꾸고자 한 ‘쇼와 유신’이었다. 가난한 농민의 자제들과 만나 일본의 지옥 같은 현실에 눈뜬 청년 장교들은 새로운 일본을 꿈꾸었다. 안도 데루조는 자결을 말리는 부하에게 이렇게 말했다. “자네는 전에 이 중대장을 혼낸 적이 있지. 중대장님, 언제 궐기하는 거냐고 말이야. 이대로 두면 농촌은 구할 수 없다면서. 결국 농민들은 구하지 못하고 말았네.” 이어 안도 데루조는 부하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자네들은 ‘유신’을 계속하라.”
‘쇼와 유신’을 내걸고 궐기한 청년 장교들과 그들의 사상적 지도자 기타 잇키는 이후 재판에서 사형과 투옥 등의 처벌을 받으며 역사의 무대에서 퇴장당했다. 안도는 살아남은 부하들이 ‘유신’을 계속하기를 바랬지만 그의 꿈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안도 데루조의 유언과도 같은 말에서 ‘유신’은 우리가 익히 아는 역사적 사건이 아니라, 국가와 민족을 위해 자신(과 타인)을 희생해도 좋다는 하나의 강력한 운동이자 관념임을 알 수 있다.
#2. 일본은 신이 지켜주는 나라다: 제 목숨이 먼저인, 유신 지사를 흉내낸 사이비들
유신은 선언이 아니다. “이제 일본이 재통일되었으니 ‘유신’을 선포한다.”는 거창한 의식 같은 건 없었다. 지금은 메이지 유신 원년으로 불리지만, 1868년 당시는 한쪽에서는 신정부가 수립되고 다른 쪽에서는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는 난세의 시기였다. 유신(維新)이라는 말은 사서삼경(四書三經) 중 《서경(書經)》에 기록된 표현이다. 고대 중국의 주나라가 체제를 완전히 새롭게 정비해 멸망의 위기를 극복하고 되살아난 사건을 유신이라고 한다. 막부를 뒤집어엎은 신정부세력은 자신들의 성공을 어떻게 표현할까 고민하다가 《서경》에서 ‘유신’이라는 표현을 찾아 사용했다.
메이지 유신의 성공은 여러 유신 지사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투쟁한 결과 주어진 선물이었다. 수십 년이 지나 청년 장교들의 2.26 쿠데타가 ‘쇼와 유신’을 내걸었던 것처럼,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에서 유신은 자신의 신념에 따라 목숨을 걸고 행동에 나서는 이들의 대의명분이 되었다. 하지만 성공 신화는 어느새 연속된 실패담과 괴담으로 이어졌다. 대의명분을 내걸고 일본제국의 번영과 성공을 부르짖으며 사실은 자기 앞가림에만 열중하거나, 자기 생각에 현실을 뜯어 맞추며 부하와 동료, 국민을 태연히 위험에 빠트리는 자들이 일본을 이끌었다. 이상하고 기묘한 우연이 모여 일본의 성공을 이루었지만, 그것은 언제라도 허물어질 수 있는 위험한 질주였다. 일본 근현대사에 흔적을 남긴 문제적 인물들은 과감하게 상식에서 벗어난 행동으로 역사 진행을 앞당기거나 궤도를 이탈하곤 했다. 만주침략, 중일전쟁, 동남아시아 침략과 태평양전쟁… 거침없던 일본의 질주는 결국 가미카제와 ‘1억 옥쇄’ 그리고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떨어진 원자폭탄으로 종결되었다. ‘유신’의 종말은 그만큼 파괴적이었다.
대한민국 독립에 공헌한(?) 비밀 독립지사로까지 불리는 무타구치 렌야는 버마와 인도의 접경지역에서 벌어진 임팔전투에서 부하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황군은 먹을 것이 없어도 싸워야 한다. 무기가 없다, 탄약이 없다, 먹을 것이 없다 등은 퇴각의 이유가 될 수 없다. 탄약이 없다면 칼로, 칼이 없다면 맨손으로, 맨손도 안 되면 다리로 걷어차라, 다리도 당하면 이빨로 싸워라. 일본 남아에게 야마토 정신이 있다는 것을 잊었는가? 일본은 신이 지켜주는 나라다.” 자기 파괴적인 유신-관으로 무장한 일본은 이처럼 파괴적인 생각을 앞세워 미국, 중국, 소련 등과 전쟁을 시작했으나 세 방향 모두에서 패배하고 말았다. 유신이 마침내 당도한 초라한 결말이었다.
#3. 성공한 ‘쇼와 유신’ 5.16과 한국의 유신 지사들: 박정희와 김재규
일본에서 파멸을 맞은 유신은 바다 건너 한반도에서 조용히 부활하였다. 1945년 8월 15일, 한반도는 마침내 일제강점기의 식민지 역사에서 해방되었다. 공과에 대한 평가는 각각 다를지라도, 해방 이후 지금 대한민국의 모습을 만드는 데 가장 크게 기여한 것은 역시 박정희일 것이다. 조선 말기와 대한제국 시기를 경험한 이들과 달리, 박정희를 비롯해 박정희의 마지막 폭주를 막은 김재규 등은 ‘일제’가 주인 행세를 하는 땅에 태어나 자란 세대들로 이들은 ‘유신’의 세례를 받고 ‘유신’의 공기 속에서 성장했다. 그들에게 ‘유신’은 반짝이고 매력적인, 마땅히 남자라면 따라야 할 강력한 힘의 상징이었다.
한국은 1972년의 ‘10월 유신’ 이전에 이미 ‘유신’과 만났다. 박정희와 그를 따르는 청년 장교들의 ‘5.16’은 당시 제3세계에 흔했던 여느 군인들의 쿠데타와 달랐다. 메이지 유신 전후의 사무라이들, 군국주의로 치닫던 시기의 황도파 청년장교들, 세계전쟁을 꿈꾼 이시와라 간지와 군부가 앞장선 혁명을 주창한 기타 잇키 등을 잇는 한국의 유신, 더 적나라하게 이야기해 일본에서 실패한 ‘쇼와 유신’의 한국판이었다. 가난한 농민의 자제들인 사병들로부터 일본의 진짜 현실을 전해 듣고 새로운 일본의 장래를 추궁(당)했던 안도 데루조와 황도파 청년 장교들처럼, 박정희는 스스로 체험하고 발견한 가난한 대한민국의 농촌을 구원하고, 산업화된 대한민국을 건설하고 싶어 했다. 5.16 이후 전투적으로 진행된 산업 발전은 가까이는 만주국의 경험, 더 거슬러서는 전쟁과 국가총동원체제로 성장한 일본 유신의 한국판이었다.
하지만 일본의 유신이 폭주해 일본 국민 전체를 인질로 삼아 위기에 이르렀듯(이들은 1억 전 국민이 죽어서라도 천황과 일본 국토를 지킨다는 ‘1억 옥쇄’를 진심으로 실행하려고 했고, 그 1억 명에는 식민지 조선의 백성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박정희의 유신 역시 폭주해 국민 살해의 임계점에 도달했었다. 부마항쟁 당시 몇백만 명을 죽여서라도 나라와 정권을 지키겠다는 박정희의 뜻을 막아낸 것은, 한때 그가 사랑하고 믿었던 김재규였다. 일본 유신 지사들과 영웅적 군인들에 매혹되었던 김재규는 국민을 지키고 이 땅에 민주주의를 가져오기 위해 최후 결단을 내렸다. 주군 박정희를 버리고 그에게 몇 발의 총알을 선사함으로써 유신 지사로서 충정을 다했다. 김재규는 마지막 유신 지사였고, 박정희의 죽음으로 유신은 마침내 긴 폭주의 역사를 끝낼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