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화가, 구지가, 처용가, 여우설화, 유리설화, 지귀설화 등 옛이야기들이
아름다우면서도 신비롭고 우아하면서도 현대적인 감성으로 재탄생하여
아홉구비 이야기 고개를 넘어가는 ‘그순간’의 황홀.
라종일의 탐미야담(耽美夜譚) 《밤드리 노니다가》는 라종일 교수가 40여 년 전인 1983년, 천년 넘게 전해져 온 우리 옛이야기인 헌화가 처용가 지귀설화 등 고전시가를 인문학적 상상력으로 다시 써 외국계 잡지사에 영어로 기고했던 원고를 국문학자 김철 교수가 우리말로 유려하게 번역하여 엮은 책이다. 고전교과서 어느 페이지에 말라붙어 있을 법한 건조한 옛이야기를 신선한 사유와 예측할 수 없는 흥미로운 전개에 문학적 감수성을 더해 이야기의 폭과 깊이를 넓히며 입체화하였다. 40년 전이든 2천 년 전이든 아니면 오늘이든, 그 모든 이야기가 품고 있는 자신을 꽃 피워 온전히 드러내는 ‘그순간’을 포착한 작품이다.
1부 〈미녀와 용〉은 아름다운 수로부인을 중심에 두고 전개되는 '향가'의 향연이다. 수로부인에 대한 한 노인의 헌신을 노래한 '헌화가'에서 시작하여, 수로부인을 탐하는 동해용의 고뇌에 찬 이야기를 '구지가'와 '해가'에서 가지고 왔다. 인간과 대결하는 서양의 용과는 다른 우리나라의 용의 면모를, 미녀를 납치한 용의 마음을 통해 알아보자.
“아름다움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 있어요.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를 끝없이 끌어당기는 힘이기 때문이지요. 아름다움이란 아마 근본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어떤 자질일지도 모르겠어요. 그것은 내면적인 어떤 우아한 힘-사람들을 지배하는 힘이지요. 하지만 아름다움이 일으키는 가장 중요하고 큰 힘은 그것이 우리에게 상상력을 부여한다는 점이지요. 아름다움은 우리 자신에 대해, 우리 존재의 본질에 대해, 그리고 우리를 둘러싼 이 세계의 본질에 대해 상상하게 해준답니다.” - 본문 중에서
“동해 용왕에게 납치된 수로부인의 이야기를 ‘민중 저항’과 연계시킨 「용과 미녀」의 이야기가 진부하지 않을 수 있는 근거는, 민중 저항의 정치적 힘을 ‘탐미적 상상력’으로부터 끌어낸 작가의 ‘용기’에서 나온다. 그것이 ‘용기’인 이유는, 1980년대 ‘민중문학’의 현장―반(反)미학의 절정을 이루었던―을 경험한 사람이라면 이 ‘미학의 정치화’가 지니는 의미를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 역자 주
아름다움의 본질은 일상의 순간을 떠나 비일상을 꿈꾸는 상상력을 낳는 것이다.
2부 〈오쟁이진 남자〉는 자신의 아내를 역신에게 빼앗긴 처용의 이야기를 담은 향가 '처용가'에서 가져왔다. 우리는 처용의 마음을 모른 채 “밤드리 노니다가”를 읊조렸다. 아마 누구보다 처음으로 처용의 마음에 들어갔다 나온 이야기가 아닐까 싶다. 아내를 빼앗긴 처용은 절망과 분노에 빠지지 않고 깨달음의 세계로 나아간다.
“자기를 괴롭히던 의심이 바로 눈앞에서 사실로 확인될 때 그의 심정이 어땠을까요? 그가 마주친 광경은 무엇이었을까요? 그 육욕의 현장과 그로부터 생겨난 고통은 처용에게는 오히려 깨달음의 계기가 되었답니다. 번쩍하는 한순간, 그는 그토록 알고자 했던 모든 것을 알게 되었고, 너무나 오래 마음을 괴롭히던 모든 질문에 답을 할 수 있게 되었어요. 인간사를 짓누르고 있는 비참한 거짓과 무지를 꿰뚫어 보았던 거예요. 사랑이니 가족이니 하는 이름으로 우리 스스로 만들어 우리 자신에게 불러온 고통들, 그 감옥으로부터 탈출한 것이지요. 우리의 이기적인 집착이 어떻게 우리를 속이고 고통스럽게 하는지를 보았어요. 인간이 서로 사랑한다는 건 고양이가 쥐를 가지고 노는 것과 같다는 것, 우리는 남을 사랑함으로써 사랑에 실패한다는 것, 그리고 우리의 사랑에는 이미 배신이 깊이 뿌리박혀 있다는 사실을 그는 깨달았어요. 내면의 빛과 함께 해방이 찾아왔어요. - 본문 중에서
「오쟁이 진 남자」에서 처용은 아내의 간통 현장을 목격하고 분노 대신 덩실덩실 춤을 춘 ‘대인배’ 또는 역신(疫神)의 무릎을 꿇린 ‘왕무당’의 이미지를 벗어나, 애욕(愛慾)의 허망함으로부터 인간 실존의 근원적 고통을 꿰뚫어 봄으로써 무한한 자비(慈悲)의 경지에 이르는 보살(菩薩)로 현신(現身)한다. 천년 넘게 무속(巫俗)의 전통 속에 또는 저속한 스캔들의 그늘 속에 묻혀 있던 처용은 이렇게 그 명예를 회복하게 되었으니 경하할 일이 아닌가.” - 역자 주
깨달음은 모든 가능성과 희망을 내려놓은 절망의 순간에 한줄기 빛으로 다가온다. 고통을 승화하여 자유와 해방에 이르는 구원의 빛을 발견한다.
3부 〈사람이 되기 위하여〉는 사람이 되고 싶은 여우의 마음을 담은 ‘여우 설화’에서 이야기를 가져왔다. 쑥과 마늘만 먹으며 백일을 견뎌 인간이 된 단군의 어머니 곰, 웅녀가 먼저 있지 않았겠는가. 여우도 웅녀와 같은 길을 걸으려 고난을 참지만, 한 여성으로 인간 사회를 견뎌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전통적인 대가족 아래서는 보통 삼대가 함께 사는 데다, 시시때때로 찾아오는 친척들도 있고, 아예 들러붙어 사는 군식구들까지 있었지요. 게다가 수없이 많은 역할들이 있었어요. 이를테면, 효성스러운 며느리이면서 손주며느리인 데다, 사랑스럽고 품위 있는 아내이면서 집안 살림을 꾸리는 훌륭한 주부의 역할까지 - 여우가 사람이 되려면 이 모든 걸 해내야 했고, 그건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지요. 따뜻한 엄마이면서 자애로운 올케여야 했고, 찾아오는 모든 손님에게는 친절한 안주인이어야 했으며, 착한 이모, 고모, 기타 등등이어야 했어요. 그녀가 해내야 할 역할의 목록은 한도 끝도 없었어요. 하지만 이 모든 어려움은, 자신의 동물적 감정과 행동을 억누르고 정숙한 부인처럼 행동해야 하는 마지막 시련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어요.” - 본문 중에서
“사람으로 변신하고 싶은 욕망 끝에 비참한 죽음에 이르는 여우의 이야기 「사람이 되기 위하여」의 결론도 놀랍고 신선하다. “인간이 된다는 건 이만큼 어려운 일이노라. 그러니 착하게 살아라” 하고 끝맺는 이 설화의 교훈주의적 상투성은 “사람처럼 보이는 우리가 실은 여우, 늑대, 뱀, 물고기, 지네가 아닐까?”라는 마지막 한 마디에 깨끗이 무너진다.” - 역자 주
욕망과 본성을 거스르며 인간답게 산다는 일 오히려 동물처럼 살기도 쉬운 일이 아니다.
4부 〈아버지를 찾아서〉는 ‘유리 설화’와 ‘주몽 설화’를 그 근간으로 하고 있다. 고구려를 세운 주몽의 아들 유리는 자신을 남기고 떠난 아비를 그리워한다. 부정의 결핍 속에 유리는 아버지를 만나기 위해 주몽이 남긴 수수께끼를 풀기 시작한다. 과연 주몽이 숨긴 건 무엇이었을까? 유리는 무엇을 깨달았을까?
“무엇보다 유리는 그동안 자기가 찾아 헤매고 집요하게 매달렸던 문제 하나를 끝냈을 뿐이라는 걸 깨달았어요. 해답은 바로 자기 눈앞에 있었건만, 그걸 보지 못했을 따름이지요. 이제 그는 또 다른 문제, 즉 자신의 운명을 찾는 출발점에 서게 되었어요. 자기의 뿌리가 무엇이든 아버지가 남긴 징표의 신비가 무엇이든 간에, 이제 그가 해야 할 일은 이 세상에서 자기만의 장소를 찾아내는 것이었어요. 이것이야말로 아버지를 찾는 일과는 별도로 유리 자신이 해내야 할 새로운 문제였어요” - 본문 중에서
“「아버지를 찾아서」의 유리(琉璃)는 더 이상 신비와 초현실의 안개로 가려진 건국 설화의 영웅이 아니다. 고투 끝에 마침내 아버지가 남긴 수수께끼를 푼 유리는 이제 “자기만의 장소를 찾아내야” 하는 새로운 과제 앞에 선다. ‘밤하늘의 별들이 가야 할 길을 비춰주던 행복한 시대’의 주인공이 아니라, 혼돈과 분열로 휩싸인 세계 속에서 홀로 길을 찾아 떠나는 근대적 인간의 전형 ―유리는 그렇게 다시 태어난다.” - 역자 주
본질을 찾는 일에서 목적은 본질 그 자체가 아니다. 목적은 찾는 과정 그 자체이고 그 과정에서 나의 자리를 찾는 일이다. 칼을 찾는 것이 아니라, 칼을 들고 어디로 향할 것인가다. 진리의 구도에서 그 완성은 바로 새로운 시작점이다.
5부 〈빛 없는 불〉은 한순간의 눈빛에 불타올라 재가 되어버린 지귀의 사랑이야기인 ‘지귀설화’를 자기고백 형식으로 담아냈다. 신비롭고 슬프고 아름답기 그지없다.
“그건 내 전생의 일부, 영원히 뻗어 있는 무한한 시간 저쪽에서 시작된 나의 전생에 뿌리박힌 ‘업(業)’의 결과였을까?
아니면 단지 호기심이었을까?
어떤 경우든 간에, 내가 살그머니 머리를 들어 여왕의 행차를 잠깐 바라보았을 때, 여왕도 그 순간에 가마 밖을 바라보았어.
바로 그 찰나,
아마 한 호흡도 안 될 그 순간,
나는 그녀를 보았고 그녀의 눈도 나를 포착했어.” - 본문 중에서
“그것은 금으로 만든 단순한 장신구가 아니었지.
내가 그토록 오래 동안 절망 속에 찾아 헤매던
그 빛이 거기에 있었어.
불길이 서서히 내 안에서 피어오르기 시작했어.
나를 평온하게, 차갑게 식혀주는
불.
그 불 속에서 사라져 가면서 나는
마침내 내가 차갑게, 자유로워지는 걸 느끼며
깊은숨을 들이마셨지.” - 본문 중에서
“‘낭만주의’, ‘낭만적 사랑’ 같은 관념이나 실천은 세계사적으로 18세기 이후, 주로 독일 낭만주의 등을 통해 출현하는 것으로 흔히 알려져 있다. 내가 늘 경이롭게 생각하는 것은, 한반도에서는 이미 천 년도 더 전에 ‘불타는 사랑의 화신(化身/火身)’―열정이 불이 되어 그 불에 타 죽었다니!―을 그린 ‘슈퍼 낭만적’ 지귀(志鬼) 설화가 등장했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또 한 천 년쯤 후에는 숨 막히는 주자학적 이데올로기로 중무장한 ‘열녀 춘향전’ 같은 것이 우세종 러브스토리로 판을 친다. 이것도 희한한 일이다. 역사는 진보한다느니 하는 믿음은 역시 의심스럽고, 문예사조사니 뭐니 하는 것도 귀담아들을 것이 못 된다. 라종일 교수가 지귀의 입을 빌려 들려주는 「빛 없는 불」은 다른 의미에서 경이롭다. 이 이야기 속에서 지귀는 흔히 말하듯 이루지 못할 비극적 사랑의 주인공도 아니고, 화마(火魔)를 물리치는 주술적 존재도 아니다. 지귀의 가슴 속에서 어느 날 갑자기 타오르기 시작한 뜨거운 불길은, 그의 말에 따르면, “조만간 먼지와 흙으로 돌아갈” 우리 인간의 “본질이자 실체”이며 “깨달음”의 개시(開示)다. 구도의 길에 들어선 지귀가 꿈결처럼 마주친 여왕의 눈길은 말 그대로 관음보살(觀音菩薩)의 현현(顯現)이자 궁극의 순간(Epiphany)이다. 진리의 불 안에서 모든 번뇌와 고통을 소진(燒盡)하고 마침내 니르바나(Nirvaṇa)에 이른 지귀 선사(禪師)의 법열(法悅) 넘치는 황홀한 게송(偈頌)을 듣고 나 역시 숨이 막혔다. 〈나를 평온하게, 차갑게 식혀주는 불. 그 불 속에서 사라져 가면서 나는 마침내 내가 차갑게, 자유로워지는 걸 느끼며 깊은숨을 들이마셨지〉.” - 역자 주
사랑과 깨달음은 다르지 않으며, 사랑과 깨달음은 즉시 나를 움직이게 하는 들끓는 불과 같은 것이다. 그것은 인연이 닿는 단 한번의 눈길로도 들끓어 오를 수 있다. 사랑은 일상의 삶과 비일상의 꿈 어딘가에서 들끓어 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