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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드리 노니다가

라종일의 탐미야담耽美夜譚


  • ISBN-13
    979-11-86963-69-2 (03810)
  • 출판사 / 임프린트
    상상+모색 / 헤르츠나인
  • 정가
    13,800 원 확정정가
  • 발행일
    2024-10-09
  • 출간상태
    출간 예정
  • 저자
    라종일
  • 번역
    김철
  • 메인주제어
    고전소설
  • 추가주제어
    -
  • 키워드
    #고전소설 #현대소설 #고전시가 #향가 #이야기의힘 #어른을위한동화 #야담 #옛이야기 #옛날이야기 #처용가 #헌화가 #구지가 #해가 #지귀설화 #동명성왕 #여우설화 #유리설화 #주몽 #수로부인 #용왕 #처용무 #단군신화 #선덕여왕 #처용 #지귀 #탐미 #테마문학 #삼국유사
  • 도서유형
    종이책, 무선제본
  • 대상연령
    모든 연령, 성인 일반 단행본
  • 도서상세정보
    118 * 188 mm, 144 Page

책소개

헌화가, 구지가, 처용가, 여우설화, 유리설화, 지귀설화 등 옛이야기들이 

아름다우면서도 신비롭고 우아하면서도 현대적인 감성으로 재탄생하여 

아홉구비 이야기 고개를 넘어가는 ‘그순간’의 황홀.

 

라종일의 탐미야담(耽美夜譚) 《밤드리 노니다가》는 라종일 교수가 40여 년 전인 1983년, 천년 넘게 전해져 온 우리 옛이야기인 헌화가 처용가 지귀설화 등 고전시가를 인문학적 상상력으로 다시 써 외국계 잡지사에 영어로 기고했던 원고를 국문학자 김철 교수가 우리말로 유려하게 번역하여 엮은 책이다. 고전교과서 어느 페이지에 말라붙어 있을 법한 건조한 옛이야기를 신선한 사유와 예측할 수 없는 흥미로운 전개에 문학적 감수성을 더해 이야기의 폭과 깊이를 넓히며 입체화하였다. 40년 전이든 2천 년 전이든 아니면 오늘이든, 그 모든 이야기가 품고 있는 자신을 꽃 피워 온전히 드러내는 ‘그순간’을 포착한 작품이다.

 

 

1부 〈미녀와 용〉은 아름다운 수로부인을 중심에 두고 전개되는 '향가'의 향연이다. 수로부인에 대한 한 노인의 헌신을 노래한 '헌화가'에서 시작하여, 수로부인을 탐하는 동해용의 고뇌에 찬 이야기를 '구지가'와 '해가'에서 가지고 왔다. 인간과 대결하는 서양의 용과는 다른 우리나라의 용의 면모를, 미녀를 납치한 용의 마음을 통해 알아보자.

 

“아름다움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 있어요.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를 끝없이 끌어당기는 힘이기 때문이지요. 아름다움이란 아마 근본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어떤 자질일지도 모르겠어요. 그것은 내면적인 어떤 우아한 힘-사람들을 지배하는 힘이지요. 하지만 아름다움이 일으키는 가장 중요하고 큰 힘은 그것이 우리에게 상상력을 부여한다는 점이지요. 아름다움은 우리 자신에 대해, 우리 존재의 본질에 대해, 그리고 우리를 둘러싼 이 세계의 본질에 대해 상상하게 해준답니다.” - 본문 중에서

 

“동해 용왕에게 납치된 수로부인의 이야기를 ‘민중 저항’과 연계시킨 「용과 미녀」의 이야기가 진부하지 않을 수 있는 근거는, 민중 저항의 정치적 힘을 ‘탐미적 상상력’으로부터 끌어낸 작가의 ‘용기’에서 나온다. 그것이 ‘용기’인 이유는, 1980년대 ‘민중문학’의 현장―반(反)미학의 절정을 이루었던―을 경험한 사람이라면 이 ‘미학의 정치화’가 지니는 의미를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 역자 주

 

아름다움의 본질은 일상의 순간을 떠나 비일상을 꿈꾸는 상상력을 낳는 것이다. 

 

 

2부 〈오쟁이진 남자〉는 자신의 아내를 역신에게 빼앗긴 처용의 이야기를 담은 향가 '처용가'에서 가져왔다. 우리는 처용의 마음을 모른 채 “밤드리 노니다가”를 읊조렸다. 아마 누구보다 처음으로 처용의 마음에 들어갔다 나온 이야기가 아닐까 싶다. 아내를 빼앗긴 처용은 절망과 분노에 빠지지 않고 깨달음의 세계로 나아간다. 

 

“자기를 괴롭히던 의심이 바로 눈앞에서 사실로 확인될 때 그의 심정이 어땠을까요? 그가 마주친 광경은 무엇이었을까요? 그 육욕의 현장과 그로부터 생겨난 고통은 처용에게는 오히려 깨달음의 계기가 되었답니다. 번쩍하는 한순간, 그는 그토록 알고자 했던 모든 것을 알게 되었고, 너무나 오래 마음을 괴롭히던 모든 질문에 답을 할 수 있게 되었어요. 인간사를 짓누르고 있는 비참한 거짓과 무지를 꿰뚫어 보았던 거예요. 사랑이니 가족이니 하는 이름으로 우리 스스로 만들어 우리 자신에게 불러온 고통들, 그 감옥으로부터 탈출한 것이지요. 우리의 이기적인 집착이 어떻게 우리를 속이고 고통스럽게 하는지를 보았어요. 인간이 서로 사랑한다는 건 고양이가 쥐를 가지고 노는 것과 같다는 것, 우리는 남을 사랑함으로써 사랑에 실패한다는 것, 그리고 우리의 사랑에는 이미 배신이 깊이 뿌리박혀 있다는 사실을 그는 깨달았어요. 내면의 빛과 함께 해방이 찾아왔어요. - 본문 중에서

 

「오쟁이 진 남자」에서 처용은 아내의 간통 현장을 목격하고 분노 대신 덩실덩실 춤을 춘 ‘대인배’ 또는 역신(疫神)의 무릎을 꿇린 ‘왕무당’의 이미지를 벗어나, 애욕(愛慾)의 허망함으로부터 인간 실존의 근원적 고통을 꿰뚫어 봄으로써 무한한 자비(慈悲)의 경지에 이르는 보살(菩薩)로 현신(現身)한다. 천년 넘게 무속(巫俗)의 전통 속에 또는 저속한 스캔들의 그늘 속에 묻혀 있던 처용은 이렇게 그 명예를 회복하게 되었으니 경하할 일이 아닌가.” - 역자 주

 

깨달음은 모든 가능성과 희망을 내려놓은 절망의 순간에 한줄기 빛으로 다가온다. 고통을 승화하여 자유와 해방에 이르는 구원의 빛을 발견한다.

 

 

 

3부 〈사람이 되기 위하여〉는 사람이 되고 싶은 여우의 마음을 담은 ‘여우 설화’에서 이야기를 가져왔다. 쑥과 마늘만 먹으며 백일을 견뎌 인간이 된 단군의 어머니 곰, 웅녀가 먼저 있지 않았겠는가. 여우도 웅녀와 같은 길을 걸으려 고난을 참지만, 한 여성으로 인간 사회를 견뎌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전통적인 대가족 아래서는 보통 삼대가 함께 사는 데다, 시시때때로 찾아오는 친척들도 있고, 아예 들러붙어 사는 군식구들까지 있었지요. 게다가 수없이 많은 역할들이 있었어요. 이를테면, 효성스러운 며느리이면서 손주며느리인 데다, 사랑스럽고 품위 있는 아내이면서 집안 살림을 꾸리는 훌륭한 주부의 역할까지 - 여우가 사람이 되려면 이 모든 걸 해내야 했고, 그건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지요. 따뜻한 엄마이면서 자애로운 올케여야 했고, 찾아오는 모든 손님에게는 친절한 안주인이어야 했으며, 착한 이모, 고모, 기타 등등이어야 했어요. 그녀가 해내야 할 역할의 목록은 한도 끝도 없었어요. 하지만 이 모든 어려움은, 자신의 동물적 감정과 행동을 억누르고 정숙한 부인처럼 행동해야 하는 마지막 시련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어요.” - 본문 중에서

 

“사람으로 변신하고 싶은 욕망 끝에 비참한 죽음에 이르는 여우의 이야기 「사람이 되기 위하여」의 결론도 놀랍고 신선하다. “인간이 된다는 건 이만큼 어려운 일이노라. 그러니 착하게 살아라” 하고 끝맺는 이 설화의 교훈주의적 상투성은 “사람처럼 보이는 우리가 실은 여우, 늑대, 뱀, 물고기, 지네가 아닐까?”라는 마지막 한 마디에 깨끗이 무너진다.” - 역자 주

 

욕망과 본성을 거스르며 인간답게 산다는 일 오히려 동물처럼 살기도 쉬운 일이 아니다. 

 

 

4부 〈아버지를 찾아서〉는 ‘유리 설화’와 ‘주몽 설화’를 그 근간으로 하고 있다. 고구려를 세운 주몽의 아들 유리는 자신을 남기고 떠난 아비를 그리워한다. 부정의 결핍 속에 유리는 아버지를 만나기 위해 주몽이 남긴 수수께끼를 풀기 시작한다. 과연 주몽이 숨긴 건 무엇이었을까? 유리는 무엇을 깨달았을까?

 

“무엇보다 유리는 그동안 자기가 찾아 헤매고 집요하게 매달렸던 문제 하나를 끝냈을 뿐이라는 걸 깨달았어요. 해답은 바로 자기 눈앞에 있었건만, 그걸 보지 못했을 따름이지요. 이제 그는 또 다른 문제, 즉 자신의 운명을 찾는 출발점에 서게 되었어요. 자기의 뿌리가 무엇이든 아버지가 남긴 징표의 신비가 무엇이든 간에, 이제 그가 해야 할 일은 이 세상에서 자기만의 장소를 찾아내는 것이었어요. 이것이야말로 아버지를 찾는 일과는 별도로 유리 자신이 해내야 할 새로운 문제였어요” - 본문 중에서

 

“「아버지를 찾아서」의 유리(琉璃)는 더 이상 신비와 초현실의 안개로 가려진 건국 설화의 영웅이 아니다. 고투 끝에 마침내 아버지가 남긴 수수께끼를 푼 유리는 이제 “자기만의 장소를 찾아내야” 하는 새로운 과제 앞에 선다. ‘밤하늘의 별들이 가야 할 길을 비춰주던 행복한 시대’의 주인공이 아니라, 혼돈과 분열로 휩싸인 세계 속에서 홀로 길을 찾아 떠나는 근대적 인간의 전형 ―유리는 그렇게 다시 태어난다.” - 역자 주

 

본질을 찾는 일에서 목적은 본질 그 자체가 아니다. 목적은 찾는 과정 그 자체이고 그 과정에서 나의 자리를 찾는 일이다. 칼을 찾는 것이 아니라, 칼을 들고 어디로 향할 것인가다. 진리의 구도에서 그 완성은 바로 새로운 시작점이다.

 

 

5부 〈빛 없는 불〉은 한순간의 눈빛에 불타올라 재가 되어버린 지귀의 사랑이야기인 ‘지귀설화’를 자기고백 형식으로 담아냈다. 신비롭고 슬프고 아름답기 그지없다.

 

“그건 내 전생의 일부, 영원히 뻗어 있는 무한한 시간 저쪽에서 시작된 나의 전생에 뿌리박힌 ‘업(業)’의 결과였을까? 

아니면 단지 호기심이었을까? 

어떤 경우든 간에, 내가 살그머니 머리를 들어 여왕의 행차를 잠깐 바라보았을 때, 여왕도 그 순간에 가마 밖을 바라보았어. 

바로 그 찰나,

아마 한 호흡도 안 될 그 순간, 

나는 그녀를 보았고 그녀의 눈도 나를 포착했어.” - 본문 중에서

 

“그것은 금으로 만든 단순한 장신구가 아니었지. 

내가 그토록 오래 동안 절망 속에 찾아 헤매던 

그 빛이 거기에 있었어. 

불길이 서서히 내 안에서 피어오르기 시작했어. 

나를 평온하게, 차갑게 식혀주는 

불. 

그 불 속에서 사라져 가면서 나는 

마침내 내가 차갑게, 자유로워지는 걸 느끼며 

깊은숨을 들이마셨지.” - 본문 중에서

 

“‘낭만주의’, ‘낭만적 사랑’ 같은 관념이나 실천은 세계사적으로 18세기 이후, 주로 독일 낭만주의 등을 통해 출현하는 것으로 흔히 알려져 있다. 내가 늘 경이롭게 생각하는 것은, 한반도에서는 이미 천 년도 더 전에 ‘불타는 사랑의 화신(化身/火身)’―열정이 불이 되어 그 불에 타 죽었다니!―을 그린 ‘슈퍼 낭만적’ 지귀(志鬼) 설화가 등장했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또 한 천 년쯤 후에는 숨 막히는 주자학적 이데올로기로 중무장한 ‘열녀 춘향전’ 같은 것이 우세종 러브스토리로 판을 친다. 이것도 희한한 일이다. 역사는 진보한다느니 하는 믿음은 역시 의심스럽고, 문예사조사니 뭐니 하는 것도 귀담아들을 것이 못 된다. 라종일 교수가 지귀의 입을 빌려 들려주는 「빛 없는 불」은 다른 의미에서 경이롭다. 이 이야기 속에서 지귀는 흔히 말하듯 이루지 못할 비극적 사랑의 주인공도 아니고, 화마(火魔)를 물리치는 주술적 존재도 아니다. 지귀의 가슴 속에서 어느 날 갑자기 타오르기 시작한 뜨거운 불길은, 그의 말에 따르면, “조만간 먼지와 흙으로 돌아갈” 우리 인간의 “본질이자 실체”이며 “깨달음”의 개시(開示)다. 구도의 길에 들어선 지귀가 꿈결처럼 마주친 여왕의 눈길은 말 그대로 관음보살(觀音菩薩)의 현현(顯現)이자 궁극의 순간(Epiphany)이다. 진리의 불 안에서 모든 번뇌와 고통을 소진(燒盡)하고 마침내 니르바나(Nirvaṇa)에 이른 지귀 선사(禪師)의 법열(法悅) 넘치는 황홀한 게송(偈頌)을 듣고 나 역시 숨이 막혔다. 〈나를 평온하게, 차갑게 식혀주는 불. 그 불 속에서 사라져 가면서 나는 마침내 내가 차갑게, 자유로워지는 걸 느끼며 깊은숨을 들이마셨지〉.” - 역자 주

 

사랑과 깨달음은 다르지 않으며, 사랑과 깨달음은 즉시 나를 움직이게 하는 들끓는 불과 같은 것이다. 그것은 인연이 닿는 단 한번의 눈길로도 들끓어 오를 수 있다. 사랑은 일상의 삶과 비일상의 꿈 어딘가에서 들끓어 오른다. 

 

 

 

 

목차

 들어가며 

 

  1장 용(龍) 과 미녀 | 헌화가(獻花歌)와 구지가(龜旨歌)

  가질 수 없는 아름다움에 대하여 

 

  2장 오쟁이 진 남자 | 처용가(處容歌)

  배신으로부터 깨달은 구원 

 

 3장 사람이 되기 위하여 | 여우 설화

  동물의 마성(魔性)에 관한 순수한 슬픔 

 

 4장 아버지를 찾아서 | 주몽(朱蒙)과 유리(琉璃) 설화

  결핍과 신비를 품은 칼의 반쪽 

 

 5장 빛 없는 불 | 지귀((志鬼) 설화

  단 한번 눈길에 부서진 영혼 

 

 역자후기 

본문인용

-

서평

그림 없는 그림책, 혹은 시 아닌 시집 같은 

낯선 감성으로 다가오는 우리 옛이야기 모음집

 

헌화가, 처용가, 여우설화, 유리설화, 지귀설화와 등

고전시가와의 새롭고 낯선 조우

 

이다지도 놀라우면서도 아름답고 신비로운

옛이야기를 읽어본 적이 있는가?

 

 

주영대사와 주일대사 등 정부 고위직을 역임했던 외교안보 전문가이자, 정치학, 외교학, 국제정세 등을 가르치는 정치학자인 라종일 교수의 마흔에는 과연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공직자와 학자의 면모로만 알려져 있던 라종일의 젊은 날을 지배했던 감성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스스로를 이야기꾼으로 여기며 건조한 옛이야기 속에 감춰 있던 아름다움과 신비로움을 건져 올려 새로운 이야기로 되살려낸 감성은 어찌하여 40년이 흐른 지금에도 이토록 생생하게 다가올 수 있는 걸까?

라종일의 탐미야담(耽美夜譚) 《밤드리 노니다가》는 라종일 교수가 40여 년 전인 1983년, 천년 넘게 전해져 온 우리 옛이야기인 헌화가 처용가 지귀설화 등 고전시가를 인문학적 상상력으로 다시 써 외국계 잡지사에 영어로 기고했던 원고를 국문학자 김철 교수가 우리말로 유려하게 번역하여 엮은 책이다. 고전교과서 어느 페이지에 말라붙어 있을 법한 건조한 옛이야기를 신선한 사유와 예측할 수 없는 흥미로운 전개에 문학적 감수성을 더해 이야기의 폭과 깊이를 넓히며 입체화하였다. 40년 전이든 2천 년 전이든 아니면 오늘이든, 그 모든 이야기가 품고 있는 자신을 꽃 피워 온전히 드러내는 그 순간을 포착한 작품이다.

《밤드리 노니다가》가 세상에 다시 나오기까지는 연세대 국문과 김철 교수의 우연한 발견이 계기가 되었다. 노 교수의 책장 어딘가에서 오랜 잠에 빠져 있던 영문원고 《The Dragon and the Beauty》를 발견한 김 교수는 그 빛나는 매력에 취해 한치의 머뭇거림도 없이 이 원고를 직접 번역하겠다는 의지를 라종일 작가에게 전했고, 섬세하고 지적인 문체와 긴장감을 유지하면서도 조화와 변화의 리듬감을 살린 번역으로 그 아름다움을 되살려냈다. 

이야기가 한 장면 한 장면 전개될 때마다 저절로 머릿속으로 그림이 그려지는 듯하고, 옛이야기라는 서사임에도 시적 감성이 느껴지는 번역이었다. 본래 영문원고가 담고 있었던 사유의 깊이와 품위 있는 지적유희의 매력도 잘 살아났다.

아, 이렇게 사랑스러운 원고라니! 라는 감탄이 나왔다.

 

 

장르를 특정할 수 없는 이야기의 매력

 

라종일의 탐미야담 《밤드리 노니다가》는 장르를 가름하기 어려운 책이다. 말하자면, ‘고전시가의 인문학적인 새로운 해석’이라는 이름표를 붙일 수는 있는데, 시적인 정조와 소설적 서사, 인문학적 전개와 나아가 동화적 서정을 두루 지닌 원고로 어느 한 장르에 묶어 둘 수 없는 원고다. 게다가 사유와 깨달음의 향취를 문장 곳곳에서 만날 수 있기에 더욱 그렇다. 분야에 얽매이지 않고 지적인 감흥이 폭발하듯 장르를 넘나들며 전개되는, 그야말로 ‘이야기란 이런 것이다’를 증명하고 있는 책이다. 그래서 이 모호한 정체성을 ‘라종일의 탐미야담(耽美夜譚)’으로 명명할 수밖에 없었다.

원래 우리 고전문학에서 ‘야담’은 ‘野談’, 즉 저잣거리에 떠도는 이야기 모음집을 말하는데, 탐미야담에서의 야담은 ‘夜譚’, 즉 ‘밤드리 노니다가’ 이야기 속으로 빠져드는, 밤의 신비로운 감성을 담은 이야기 모음집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탐미(耽美)’는, 이 책의 궁극적 목적이 ‘이야기의 아름다움’을 찾아가는 것임을 뜻하는데, 이 고요하고 나지막하고 사랑스러운 원고는 ‘탐미탐미탐미’ 하지 않고도 탐미를 따라간다. 흥미롭고 아름답고 신비롭다. 무엇보다 낯선 까끌거림이 놀랍다. 

 

 

모든 이야기들의 그순간, 에피파니

 

《밤드리 노니다가》라는 제목은, 이 이야기의 서사 너머에 존재하는 이야기의 또 다른 본질에 대해 생각하며 정하게 되었다. 라종일의 탐미야담에는 바로 ‘이야기 고개’를 넘어가는 ‘그 어떤 순간’에 대한 깊은 사유가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밤드리 노니다가’는 8구체 향가인 〈처용가〉의 둘째 행에 놓인 싯구이다. 처용이 밝은 달 아래 밤늦도록 놀다가 집에 들어가기까지, 결정적인 사건이 일어나기 바로 직전, 충분히 삶의 희로애락을 경험하였지만 막상 자신에게 큰 변화로 이어질 어떤 사건을 앞두고 아무것도 모른 채 맞는 그 늦은 밤의 긴장감과 흥분을 맞닥뜨리는 ‘그순간’에 멈춰 섰다. 모든 이야기는 ‘그순간’을 맞이하여 그때까지의 서사와는 다르게 방향을 수정하고, 또 다른 줄기의 이야기와 이어지고, 놀라운 상황과 조우하고, 확장하며 이야기의 결말로 들어서며 깨우침에 이르게 된다. 그순간은 평면적인 이야기의 어깨를 세우고 머리카락을 곤두세우며 분위기를 부풀리게 한 후-독자 모두가 귀를 쫑긋 세우는 순간이다-푸르륵 꺼져간다.

교과서에 박제된 옛이야기들은 모두 ‘그순간’이 거세되어 있다. 이 이야기들은 원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던 소문 같은 것들이었다. 잠시만 생각해 봐도 이야기를 전하는 사람마다 형태와 내용이 조금씩 달랐을 것이고, 그 이야기마다 ‘그순간’ 역시 각기 다른 지점에서 청자들을 웃고 울렸을 것임을 추측할 수 있다. 이야기를 듣던 사람들은 자기 무릎을 탁 치며 그순간 어떤 깨달음을 깨우쳤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살아 숨쉬던 이야기를 활자에 구속하면서 그순간은 사라져 버렸다. 이런 의미에서 라종일의 탐미야담에서 다시 건져 올린 ‘그순간’은 바로 탐미의 정점이 된다. 

라종일은, “마치 가슴에 번개가 치듯 모든 걸 뒤바꾸는 깨달음이 내게 일어났어. 불, 어둡고 뜨거운 불 - 인간을 만든 본질이자 실체인 그것. 나의 존재를 휘어잡고 간단히 제압해 버리는 그 어마어마한 빛 없는 어두운 불을 마주하면 나의 그런 노력은 얼마나 연약했는지.”라는 식으로 그순간을 재생한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의 정점은 이렇게 터져 나왔다.

“바로 그 찰나, 아마 한 호흡도 안 될 그 순간, 나는 그녀를 보았고 그녀의 눈도 나를 포착했어. 그녀가 웃었던가, 아니 찡그렸던가?”

단 한번 눈길에 부서진 내 영혼, 바로 그순간, 그녀의 미소. 

문장이 아니라 현실에서의 탐미의 궁극을 발견한 순간의 느낌으로 전율이 일었다. 이렇게 세상 모든 이야기의 그순간은 바로 에피파니(Epiphany), 궁극의 순간으로 승화한다. 라종일은 이곳에서 탐미적 상상력을 완성한다. 

 

 

탐미 속에서 발아하는 이야기의 힘

 

헌화가에서 소를 몰고 지나가던 견우노인은 아름다운 수로부인에게 “곶ᄒᆞᆯ 것가 받ᄌᆞᄫᅩ리이다.”라고 수줍은 고백을 하며, 꽃 한송이 곱게 피어 있는 험한 벼랑 위로 한발 내딛는다. 견우노인의 발은 벼랑 위 꽃 한송이로 향하지만, 그 용기가 진정으로 향한 곳은 수로부인 쪽이었다. 탐미란 그런 것이다. 본질을 지극히 원하면서도 오히려 본질을 떠나가는 길 위에 핀 꽃을 조용히 응시하는 것. 단 한번의 눈길에 영혼이 부서진 그순간만으로도 족한 그런 것. 라종일 작가는 기꺼이 벼랑 위로 올라 꽃을 향해 손을 뻗었다. 

김철 교수는 역자후기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바라건대, 이 오해와 착각의 산물을 읽는 독자들이 더 많은 오해와 착각을 낳아주기를. ‘이야기’는 그렇게 지속되어야 한다.”고.

 

 

 

 

 

저자소개

저자 : 라종일
정치학자. 외교안보전문가. 동국대 석좌교수. 서울대 정치학과를 졸업하고 영국 케임브리지대학교 트리니티 칼리지에서 정치학 박사를 취득했다. 경희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와 미국의 스탠퍼드대, 미시간대, 남가주대, 프랑스의 소르본대 등 해외 유수의 대학교에서 연구 및 교환 교수, 영국 케임브리지대에서 펠로를 역임했다.
대통령직인수위원회 행정실장, 국가정보원 해외 담당 차장, 대통령비서실 국가안보 보좌관, 국가안전보장회의 상임위원장, 주영 대사와 주일 대사를 두루 지냈다. 우석대학교 총장을 거쳐 가천대학교와 국방대학교 석좌교수로 재직했으며, 현재는 동국대 석좌교수, 푸단대학교 객원교수로 재직 중이다.
주요 저서로 『하노이의 길』, 『장성택의 길』, 『낙동강』, 『세계의 발견』, 『사람과 정치』, 『끝나지 않은 전쟁』, 『현대 서구정치론』 등이 있으며, 공저로는 『청년을 위한 정치는 없다』, 『한국의 발견』, 『한국의 불행한 대통령들』 그리고 번역서로는 『정치와 소설』(폴 돌란 저), 『정치학』(아리스토텔레스 저) 등이 있다.
또한 젊은 여성작가인 김현진과의 서신을 엮어 발간한 『가장 사소한 구원』에서 문학적 감성을 선보인 바 있다. 『밤드리 노니다가』는 40여 년 전 젊은 날의 그가 품었던 뜨거운 열정과 문학적 감수성을 ‘우리 옛이야기’ 속에 녹여 신선한 시선과 사유로 풀어낸 작품이다.
번역 : 김철
연세대학교 국문과 명예교수. 『국문학을 넘어서』, 『‘국민’이라는 노예』, 『복화술사들』, 『바로잡은 《무정》』, 『식민지를 안고서』, 『우리를 지키는 더러운 것들』 등의 책을 썼고, 『Reading Colonial Korea through Fiction: The Ventriloquists』, 『抵抗と絶望: 植民地朝鮮の記憶を問う』, 『植民地の腹話術師たち』 등이 번역되었다. 『문학 속의 파시즘』, 『해방 전후사의 재인식』 등을 공저했으며, 『언더우드 부인의 조선 견문록(Fifteen Years Among The Top-Knots)』, 『조선인 강제연행(朝鮮人强制連行)』, 『비구니 승가 설립의 역사(The Foundation History of the Nuns’ Order)』 등을 번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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