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 중에 우크라이나 시민의 구호와 군대의 보급에 대한 물류를 담당한 주체는 우크라이나 정부보다는 우버(Uber) 택시였다. 우버는 자체 플랫폼의 AI 기술을 이용하여 국제사회에서 보낸 구호물자를 실은 수천 대의 트럭을 실시간으로 통제하는 총책임자였다. 이 외에도 상업위성을 운용하는 민간기업들이 제공하는 영상은 미 국방부에 비해 양과 질에서 압도적이었으며, 미 국가정찰국(NRO)은 이를 분석하는 데 AI를 활용했다. 실리콘밸리의 AI 상위 업체들은 사실상 거의 다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신흥 기술과 노하우를 실험했고 다시 이를 새로운 사업을 창출하는 기회로 이용했다. 우크라이나 전쟁은 미국의 전쟁 역사상 실리콘밸리의 빅테크 기업이 전통적인 군산복합체를 압도한 최초의 전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적어도 빅테크 기업에게 우크라이나 전쟁은 재앙이 아니라 축복에 가까웠다. 이 전쟁으로 인해 새로운 사업 기회가 확대됐기 때문이다. -23쪽
무엇보다도 남북의 약속이 잘 지켜지지 않았다. 그 이면에는 ‘남북합의서’의 허약함이 숨어 있다. 남북 간의 약속은 남북합의서의 형태로 만들어져왔다. 1971년 남북합의서가 처음 체결된 이후 현재까지 남북은 667회의 남북회담을 통해 258건의 남북합의서를 탄생시켰다. 이렇게 오랜 시간과 노력의 결실로 만들어진 남북합의는 지금 어떤 모습인가? 남북합의서는 동북아 정세의 위기, 남북 관계의 악화 그리고 정권교체로 무력화되어 왔다. 단지 그뿐인가? 아무리 주변 환경이 어렵다고 하더라도 이렇게 모든 합의가 무력하게 사문화될 수 있는 것인가? 남북합의서가 지켜지지 않는 이유 중 하나는 남북합의서가 어떠한 법적 효력을 가지고 있느냐의 문제와 맞닿아 있다. 학술적인 논의와는 별개로 남북합의서는 국가 간 조약과 같은 법적 효력을 갖지 못한 채 선의에 의한 약속, 즉 신사협정으로 취급받고 있다. -58쪽
우리가 대만해협의 군사적 충돌이 한반도로 확대되는 것을 우려하지만, 대만의 군사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현재 남북한 관계의 악화로 인해 한반도에서 군사적 충돌이 먼저 발생하고, 그 충돌이 대만해협으로 확산되고, 중국의 도발 가능성이 높아지는 것을 우려하는 시각도 존재한다. 역사적으로도 선례를 찾아볼 수 있다. 한국전쟁 당시 미국은 한반도 전쟁의 영향이 대만해협으로 확산되는 것을 막기 위해 대만해협에 미군을 투입한 바 있다. 심지어 장제스가 중국군의 주력이 한반도에 투입된 것을 보고 대만 국군을 한반도에 투입하려는 의지를 보이기도 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대만해협의 안보 위기와 함께 대두되고 있는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 문제’이다. 미국의 필요에 따라 주한미군의 일부 전력이 한반도 역외에 전개될 수 있다는 것이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 문제인데, 주한미군이 대만해협을 둘러싼 군사적 충돌에 개입할 경우 한국도 원치 않는 분쟁에 휘말릴 위험에 노출되어 있기 때문이다. -136쪽
일본은 제2차 세계대전 패전 이후에도 중국, 한국을 제외한 서방국가들과 샌프란시스코강화조약을 체결함으로써 피해국 사죄를 유예받았다. ‘가해자 일본’의 자각은 처음부터 희미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냉전 해체 이후 과거사와 관련한 사죄 요구가 분출했다. 1991년 8월 김학순 할머니의 증언으로 표면화된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전후 평화주의의 온실溫室 속에 안주해온 일본인들에게 ‘침략전쟁의 가해자’임을 일깨웠다. 과거사 성찰 없이 반세기를 살아온 일본인은 식민 지배 사죄와 반성 요구에 저항감을 느꼈다. 일본 정부는 국가 책임을 인정하지 않는 ‘사과’ 외교 방식으로 사태를 봉합하려 했으나 피해 당사자들이 거부하면서 장기 미제 현안이 됐다. 그러던 차에 북한의 납치 문제 인정은 ‘가해자’ 일본이 ‘피해자’ 일본으로 탈바꿈하는 절호의 기회였다. 북일 정상회담은 국교 정상화 합의보다 일본이 북한의 ‘피해자’였음을 확인한 것이 더 큰 의미를 띠게 됐다. -165쪽
슬로바키아의 글로벌 싱크탱크인 GLOBSEC은 2023년 말, 앞으로 2년(2024~2025년)간의 우크라이나 전쟁 양상을 두고 다섯 가지 시나리오를 발표했다. 우크라이나 문제에 관한 41명의 전문가를 선별한 뒤, 전쟁과 관련해 고려해야 할 요인(우크라이나 안보 및 군사작전, 2024년 미국 대선, 북한의 러시아 지원 등) 58개에 대한 설문조사 결과를 반영해 각각의 시나리오를 개발한 것이다. 그리고 이들 중 31%는 우크라이나에서의 전쟁이 2025년 이후까지 장기화될 거라고 예상했다. 그 뒤를 이은 시나리오는 하이브리드형 3차 대전이 일어날 수 있다고 봤는데, 즉 중동이나 조지아·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 등 코카서스 국가, 발칸반도,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 전쟁이 발생해 글로벌 차원의 심각한 지역 분쟁이 발생하고, 우크라이나 전쟁에 대한 기억은 오히려 흐려질 거라는 내용이었다. 이 시나리오 또한 전체 41명 중 27%가 가능성을 점쳤다. -184쪽
기후 재난을 극복하기 위해서 ‘군비증강’을 억제해야 한다는 지적은 이미 3년 전부터 제기됐다. 지난 2021년 12월 50명 이상의 노벨상 수상자들이 모였다. 이들은 앞으로 5년간 모든 국가가 군비를 연간 2%씩 삭감하고, 이 돈의 절반을 팬데믹과 기후 위기, 극심한 빈곤에 대처하기 위한 유엔 기금에 투입할 것을 요구했다. 일명 ‘평화 배당’ 캠페인이다. 이들은 이 계획이 “인류를 위한 단순하고 구체적인 제안”이라고 설명한다. 2020년 세계 군사 지출이 2.6% 증가했기 때문에, 2% 삭감은 현실적으로 실현 가능한 수치라고도 말한다. 그러나 이들의 이런 요구를 수용한 정부는 아직까지 찾아보기 어렵다. -23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