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의 시간을 아우르며 몰아치는 매혹적인 이야기
30대 여성 ‘영두’가 창경궁 대온실 보수공사의 백서를 기록하는 일을 맡게 되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영두는 석모도 출신으로, 2003년이던 중학생 때 창덕궁 담장을 따라 형성된 서울의 동네인 원서동에서 유학을 한 경험이 있다. 어떤 이유 때문인지 ‘창경궁’이라는 말을 듣고는 마음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끼며 처음엔 그 일을 맡기를 꺼린다. 그곳에서 아주 크게 인생이 꺾인 적이 있었다는 듯이. 그러면서 당시 하숙했던 ‘낙원하숙’의 주인 할머니 ‘문자’와 그 할머니의 손녀 ‘리사’와 함께 생활했던 과거의 일을 가슴 아프게 회상한다.
한편 현재의 대온실 보수공사와 더불어 일제강점기에 대온실을 만든 일본인 후쿠다 노보루의 이야기가 씨실과 날실처럼 교차된다. 작가는 이러한 서사의 양 축을 통해 작품에 대한 몰입도를 더욱 높이는 가운데 다양한 재미를 선사한다. 후쿠다의 이야기는 무언가에 인생을 걸고 몰두한 한 사람의 오랜 여정을 독자로 하여금 찬찬히 따라가게 한다. 이는 실제 창경궁 대온실 공사의 총책임자 후쿠바 하야토와 그의 회고록을 상황 전개의 축으로 삼고 있으나 많은 부분을 작가가 소설적으로 장면화한 것이다. 작가는 이를 비롯해 창경궁과 연관된 다양한 인물들을 근대의 역사적 장면들과 결부지어 생생하게 형상화함으로써 소설 전반의 흥미와 깊이를 탁월하게 더한다.
현재의 보수공사 중 모두를 놀라게 한 비밀이 땅 밑에서 발견되며 이야기는 반전을 맞는다. 그곳에서 발견된 흔적이 문자와 연관이 있음을 영두는 예감하며 그 일을 파고든다. 그러면서 문자가 겪은 어린 시절의 사건을 알게 되는데… 문자는 현대사의 거친 파고 속에서 평생토록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한 비밀을 품고 살아온 인물이다. 영두는 문자가 간직해온 그 오래된 비밀을 파헤치며 자신의 상처와도 올곧이 마주하게 된다. 문자 할머니가 오래전 자신에게 “정신을 차갑게 깨우는 사랑”을 주었듯이, 오래도록 용서하지 못했던 자신의 과거를 비로소 껴안을 수 있게 되면서. 그렇게 ‘대온실 수리 보고서’는 상처로 인한 슬픔을 수리하며 삶을 재건하는 영두만의 기록으로 남게 된다.
철저한 고증과 치밀한 취재로 쌓아올린 압도적인 스케일,
그 속에서 살아 숨 쉬는 사람들의 찬란한 목소리
추천사를 쓴 시나리오 작가 정서경이 “크고 작은 사건들이 하나의 장소로 모여드는 이 거대한 이야기”라고 쓴바, 『대온실 수리 보고서』에는 나뭇잎에 퍼진 자잘한 잎맥처럼 다양한 군상이 망라되어 있다. 특히 강화에서 함께 자라온 친구 은혜와 그의 딸 산아가 영두와 함께 일상을 보내는 대목은 작가가 새로운 가족의 모습을 제안하는 듯도 보인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혼자 남게 된 영두와 공인중개사로 일하며 혼자서 아이를 키우는 은혜, 그리고 어린 나이임에도 일찍 철이 들어 다른 사람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게 된 산아 세 사람이 함께 밥을 먹고 매일매일의 고민을 나누는 대목들은 이야기 중간중간에 삽입되어 때로는 웃음을 주고 때로는 곁에 있는 사람의 소중함을 곱씹게 한다.
영두의 성장을 보여주는 방대한 이야기인 만큼 이 안에는 사랑 이야기도 담겨 있다. 원서동에서 만난 영두의 첫사랑 ‘이순신’과의 일화는 이 작품에 또다른 활기를 부여하며 읽는 재미를 높인다. 어린 날의 수치심 때문에 상처를 주고 놓쳐버린 첫사랑과의 에피소드는 사랑하는 이에게 난생처음 자신의 마음을 솔직하게 드러내 보인 순간 느낀 설레는 감정, 스스로의 마음도 정확히 알지 못해 타인에게 생채기를 내는 순간의 안타까움을 동시에 느끼게 하며 영두의 성장을 촘촘히 따라가게 만든다.
그밖에도 『대온실 수리 보고서』에는 건축사사무소의 개성적인 사람들, 그들이 작업하는 건축물의 세부묘사와 그 아름다움 등등 이야기를 풍성하게 하고 재미를 더하는 요소가 군데군데 가득 차 있다. 이는 다양한 목소리를 품으면서 다층적인 세계를 보여주는 걸출한 장편소설만의 힘이기도 하다.
소설 말미에 붙은 긴 참고자료의 목록은 이렇듯 이야기를 겹겹으로 구성하기 위한 작가의 치밀함을 엿보게 한다. 작가는 이 방대한 자료들을 섭렵하고 그것을 토대로 작가로서의 역량을 유감없이 발휘해 행간에 숨어 있는 사람들의 얼굴과 생생한 목소리를 상상력을 통해 고스란히 되살려냈다.
일제의 잔재로 각인되어 환영받지 못했으나 많은 우여곡절 끝에 살아남은 창경궁 대온실은 질곡의 역사를 거치면서도 살아남은 이들의 숭고한 삶과도 비견할 수 있을 것이다. 잊지 않고는 살 수 없었던 과거의 상처를 딛고 끝내 마주하는 이 감동적인 이야기는, 보수공사로 보강되어가는 대온실처럼 상처받은 이들의 삶을 다시 세운다.
들여다볼 자신이 없어 묻어버린 과거의 상처는 결국 해결되지 않은 거대한 공동(空洞)으로 남게 될 것이다. 집을 짓는 목수가 나무를 한켜 한켜 쌓아가듯 그때그때의 슬픔을 들여다보고 다독이다보면 튼튼한 집 한채가 우리의 눈앞에서 빛날지도 모른다. 인생이라는 찬란한 비밀의 집을 우뚝 세운 이 압도적인 이야기를 통해 우리 시대 귀한 작가로 자리매김할 김금희 소설의 저력을 이제 마주할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