객관적 덕에서 비롯된 ‘최고선’이야말로
개인과 공동체가 추구해야 하는 궁극적 행복이다!
아리스토텔레스 윤리학의 핵심인 ‘행복론’은 철학뿐 아니라 심리학, 정신의학, 신경의학 등 인간의 심리적 문제 치유(terapia) 영역에도 자주 등장하는 주제다. 오늘날의 행복은 ‘내가 행복하다고 느끼면 행복하다’는 긍정적 자신감과 주관적 만족으로 대체된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행복은 주관적 감정이 아닌 객관적인 덕과 관련이 있으며, 일생에 걸쳐 이루어지는 완전한 삶이자 최고선이다.
행복과 좋은 삶의 추구,
아리스토텔레스 윤리학 3부작
아리스토텔레스는 윤리학에 관한 중요한 저작으로 세 작품을 남겼다. 『니코마코스 윤리학』을 포함해서 『에우데모스 윤리학』과 『대도덕학』이 그것이다. 이 세 작품은 『정치학』과 더불어 실천철학적 작품에 속한다. 윤리학의 주된 관심은 인간의 ‘행복’(잘 삶/성공, eudaimonia)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에 따라 덕(아레테)을 잘 사는 삶(eu prattein)에서 가장 중요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그리고 좋은 삶을 인생의 궁극적 목적으로 삼는다. 하지만 플라톤과 달리 아리스토텔레스는 ‘최고의 좋음’을 파악하기 위해 학문적 훈련이나 형이상학적 교육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보지 않는다. 그는 ‘잘 살기’ 위해서는 친애(philia), 쾌락, 명예, 부와 같은 ‘좋음’을 전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적절한 방식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윤리학을 공부해야만 하는 것이다.
‘개별적 좋음들’은 분리되어 이해될 수 없다. 개별적 상황을 일반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선 적절한 교육과 습관을 들임으로써 그 상황을 파악할 수 있는 능력을 배울 수 있어야 한다. 개별적 상황 속에서 특정한 행위를 잘 선택하는 것은 이성에 의해 뒷받침되어야 한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는 단순히 일반적 행위 규칙을 배우는 것만으로는 개별적 경우에 우리의 행위를 선택하게 해주는 실천적 지혜인 프로네시스(phronesis)를 획득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행위, 숙고, 감정, 사회적 관계를 아우르는 기술(technē)을 통해 개별적 상황에 적합한 행위를 실천함으로써, ‘잘 삶’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가능할 수 있다.
『대도덕학』에서 ‘대’(magna)가 의미하는 것은?
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는 어째서 ‘동일한 내용을 동일한 방식으로’ 다루는 거의 같은 주제의 윤리학 관련 작품을 3종이나 남겼을까? 현존하는 『아리스토텔레스 전집』(Corpus Aristotelicum)에는 윤리학적 저작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니코마코스 윤리학』과 『에우데모스 윤리학』 이외에 진작 여부가 논란이 되고 있는 『대도덕학』과 짤막한 작품인 『덕과 악덕에 대하여』가 있는데, 마지막 작품은 위서(僞書)로 간주되고 있다. 『대도덕학』은 그중에서 물리적 규모로 따지면 세 번째 크기를 가지며, 전통적으로 『대윤리학』 혹은 『대도덕학』(Ēthika megala, Magna moralia)으로 불려 왔다.
『대도덕학』이라는 제목은 독특하다. ‘대’(magna)라는 말을 덧붙여 불렀기 때문이다. 『대도덕학』을 구성하는 두 권 전체가 포괄하는 영역은 『에우데모스 윤리학』을 구성하는 전체 여덟 권이 포괄하는 영역과 맞먹는다. 제2권이 도중에서 중단된 채로 전해지지만, 『대도덕학』 제1권이 다루는 주제는 『니코마코스 윤리학』이 제1권부터 제6권까지 다루고 있는 주제를 두루 포괄한다. 그 결과 이 책의 ‘각 권’(biblia, 두루마리)은 다른 윤리학 저서의 ‘각 권’보다 큰 공간을 차지하게 되었다. 이처럼 『대도덕학』을 구성하는 한 권이 다루는 영역이 다른 윤리학 서적 한 권이 다루는 영역보다 크기 때문에, ‘크다’라고 불리게 되었다는 해석이 있다.
『니코마코스 윤리학』과 『에우데모스 윤리학』의 제목 속 ‘니코마코스’와 ‘에우데모스’는 저자라기보다는 편집자거나 작품을 헌정 받은 사람으로 추정한다. 그래서 ‘대’(大)는 ‘나이가 많은’이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니코마코스의’라는 형용사를 가진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 서적은 『니코마코스 윤리학』인데, 『대도덕학』과 구별하기 위해 『니코마코스 윤리학』을 『小 니코마코스 윤리학』으로도 부른다. 『니코마코스 윤리학』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아들인 ‘니코마코스’에게 헌정되거나 그를 교육하기 위한 책이며, 『대도덕학』은 ‘大 니코마코스’, 즉 아리스토텔레스의 아버지 ‘니코마코스’에게 헌정된 윤리학 책이라는 것이다.
『대도덕학』의 논술에는 유감스럽게도 논지의 불분명함과 불철저함, 논리 전개의 서투름, 서술 방식에서 명료함의 결여가 있다. 이 책의 논리적 전개 부족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아직 성숙하지 못했던 자신의 젊은 시절에 쓴 윤리학이라는 책의 성격에 기인하는 것으로 볼 수 있으며, 또한 아리스토텔레스 이외의 누군가에 의해 쓰였다고 하는 책의 성격에 기인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 저작 중
『대도덕학』만이 이전 철학자들을 철학사적으로 개관!
『대도덕학』이 다른 두 윤리학 저작과 다른 철학적 특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이 책의 중심된 주제는 ‘덕(aretē) 이론’ 및 ‘좋은 것’(agathon)들에 대한 고찰이다. 이 책에서 아리스토텔레스 윤리학의 중심 개념인 행복 논의는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차지하고 있는 행복 개념만큼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하지 않는다. 이 작품은 행복이 ‘외적인 좋음’(명예, 건강, 부 등)에 의존한다는 주장을 펼치는데, 이는 이 책이 다른 윤리학 저작보다 행복을 위한 ‘외적 좋음’과 ‘운’의 중요성을 더 강조한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다양한 연구 영역에서 그 이전의 사람들이 해당 문제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는지를 endoxa(통념)의 형식으로 살피고, 경우에 따라서는 그것을 비판한다(『니코마코스 윤리학』 제7권 제1장, 『에우데모스 윤리학』 제7권 제2장). 그렇지만 윤리학 저작 중에서 이전의 철학자들에 대한 ‘철학사적’ 개관은 오직 이 책에서만 이루어지고 있으며, 다른 두 윤리학에서는 그러한 역사적 개관을 찾아볼 수 없다. 또 『니코마코스 윤리학』과 『에우데모스 윤리학』에서는 플라톤의 ‘혼의 삼분설’에 대한 언급을 찾아볼 수 없으나, 이 책은 덕 이론의 토대가 되는 방법이 아니라 혼의 영양 섭취 기능이 윤리학과 무관하다는 맥락에서 혼의 삼분설을 언급하고 있다(제1권 제4장 1185a21 참조).
『니코마코스 윤리학』은 덕의 구성요소로서 행위와 감정의 양 측면에 초점을 맞추는 반면, 이 책의 덕 이론에서는 감정의 측면이 강조되고 있으며, 덕은 감정의 ‘중간임’(중용)으로 파악되고 있다.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볼 수 있는, 행위와 감정에 수반하는 즐거움과 고통도 이 책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또 이 책에서는 감정(파토스)이 칭찬의 대상이 되고 있지만,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는 “우리는 감정에 따라서 칭찬받지도, 비난받지도 않는다”라고 분명히 밝힌다. 이 책에서는 감정이 직접적 가치평가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이다. 그 밖에도 이 책에는 산술적 비례에 따른 시정적(diorthōtikon) 정의(『니코마코스 윤리학』 제5권 제4장 1131b25-1132b20)에 대한 논의가 나오지 않는다. 또한 『니코마코스 윤리학』 제2권 제1장에서 언급되는 ‘지성적 덕’(dianoētikē aretē)에 대한 논의도 찾아볼 수 없다. 지성적 덕에 관련해서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는 기술(테크네)과 지식(에피스테메)을 구별하고 있으나 이 책에서는 양자가 구별 없이 사용된다. 특히 『대도덕학』은 ‘자제력 없음’(아크라시아)을 다루는 논의 방법이 『니코마코스 윤리학』과 기본적으로 다르다.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는 악한 사람과 자제력 없는 사람이 명확하게 구별되고 있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 윤리학의 주제인 행복은 잘 살고 잘 행동하는 것이며, 이는 덕에 의해 결정된다. 소크라테스에게서 덕은 지적인 덕에만 한정되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덕을 지적인 덕과 성격적 덕으로 나눠서 설명하면서, 지적인 덕을 성격적 덕의 활동보다 더 높이 평가한다. 『에우데모스 윤리학』에서는 행복은 지적인 덕과 성격적 덕의 활동이 결합할 때 가능하다고 설명된다. 그리고 『대도덕학』에서는 지적인 덕에 관한 설명을 성격적 덕의 설명에다 포함시켜 하나의 덕, 즉 성격적 덕의 활동만을 강조하고 있다.
개인과 공동체가 행복할 수 있는
아리스토렐레스 행복론의 정수
『대도덕학』의 주제가 ‘인간적인 좋음’을 다루고 공동체를 위한 ‘정치적 좋음’을 탐구하는 것이기에, 행복에 대한 논의에서 영원하고 신적인 좋음은 배제되며, 인간의 좋음인 덕의 활동과 사용이 중요하게 다뤄지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외적 좋음’ 역시 덕의 좋은 활동을 위한 가능성으로서 설명되고 있다.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는 외적 좋음과 행복을 구분하기 위해, 여러 다양한 논쟁이 계속되고 있지만, 『대도덕학』에서는 외적 좋음의 가능성으로서의 능력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또한 『니코마코스 윤리학』 제10권에서는 쾌락과 행복을 구분하기 위해 애썼다면, 『에우데모스 윤리학』과 『대도덕학』에서는 행복이 최고의 아름다운 쾌락과 동일한 것으로 기술된다. 이는 『대도덕학』이 『에우데모스 윤리학』과 노선을 같이하는 것임을 보여 주는 것이며, 특별히 지적인 덕을 생략했다는 사실은 공동체를 위한 ‘대중들에게 행복을 설명하기 위해 계산된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더 나아가 이런 점이야말로 오히려 플라톤의 색깔을 지우고 아리스토텔레스 자신만의 색깔을 드러내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대도덕학』은 “그러므로 우리는 아무래도 좋음에 대하여 이야기해야 하는 것이고, 더구나 그것은 무조건적인 좋음이 아니라 우리에게서의 좋음이다. 신들의 좋음에 대해서는 아니니까”(『대도덕학』 1182b3-4)라고 말한다. 관조와 같은 지적인 덕으로서의 행복, 그리고 행복을 지적인 덕만으로 이해하는 것은 ‘신적인 좋음’에 관해 말하는 것이며, 이것은 경험 세계에 사는 우리 대중들에게는 무리한 요구일 것이다. 또한 공동체를 위한 우리 모두의 목표는 덕에 맞게 행하는 활동이므로 『대도덕학』에서는 덕의 활동을 도울 수 있는 능력으로서의 외적 좋음이 필수적이라는 점이 강조되고 있다.
『대도덕학』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좋음에 관한 여러 분석을 통해 최고의 좋음인 행복이 있다는 점을 긍정한 다음, 그 행복은 여러 좋음들의 구성들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라고 설명한다. 즉 덕의 활동을 위한 가능성으로서 필요한 외적 좋음은 상식의 차원에 있는 것이며, 또 우리 경험 세계에 바탕을 두고 있는 것이다. 결국 『대도덕학』에서 아리스토텔레스 행복론의 핵심은 혼의 좋음(덕)과 신체의 좋음(건강, 외모 등), 그리고 외적 좋음인 재물이나 권력, 가문 등을 모두 포함한 것으로, 이는 인간적인 좋음인 동시에 경제적 필요를 충족하기 위한, 즉 ‘좋은 삶’을 살기 위해 국가 공동체가 나아가야 할 목표를 통해 성취된다는 점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