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잘 정리된 연기 교재가 아니라
결국 삶의 태도에 관한 이야기다.”
배우 지망생들 사이에서는 꼭 한번 듣고 싶은 수업으로 ‘이 사람’의 연기 수업을 꼽는다. 연기라면 이제 더 배울 게 없을 것 같은 경력 배우들도 새로운 작품에 들어갈 때마다 대본을 들고 ‘이 사람’을 찾아간다. 강동원, 원빈, 한지민, 김지훈, 이준혁, 홍경 등 수많은 배우가 믿고 따르는 스승이지만, 대중에게는 이름이 잘 알려지지 않은 신용욱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왜 이토록 많은 사람이 그를 찾는 걸까?
제자인 홍경 배우가 백상예술대상 신인 연기상 수상 소감에서 말했듯이 “배우가 거울 속 자기 자신을 마주 보고 알아갈 수 있게 앞에서 거울을 들어주기 때문”일 것이다. 거울을 들어 준다고 해서 모두가 거울 속 자기 자신을 순조롭게 마주하는 것은 아니다. 어떤 이는 도망가거나 화를 내기도 하고, 또 어떤 이는 울기도 한다. 매 순간 내가 누구인지 깨닫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 자기 자신을 알고 싶어 하는 이들만이 거울 속을 들여다보려고 무진장 애를 쓴다.
대본에서 나를, 가족을, 주변인을 만나고 그들의 삶을 살아내야 하는 배우는 자기 자신을 안 다음에야 점차 다른 삶의 얼굴이 될 수 있다. 신용욱은 배우들이 이 지난한 과정을 ‘인내’하며 내가 누구인지 깨닫고, 어떤 연기를 해야 하고 또 할 수 있는지를 ‘발견’하며, 감정을 느끼고 기술을 익히는 법을 온몸으로 ‘배우고’, 더 나은 배우가 되는 데 필요한 것들을 하나씩 ‘채워’ 나갈 수 있게 돕는다.
배우가 배역에 달라붙어 그 인물이 되어 호흡할 때 사람들은 어느새 작품에 빠지게 된다. 다른 삶을 사는 건 배우뿐만이 아니다. 사람은 한 번 태어나 하나의 삶밖에 경험하지 못한다지만, 배우를 통해 관객들 역시 다른 삶을 살아볼 수 있게 된다. 그러니 연기 수업 자체가 삶을 읽고, 감각하고, 호흡하는 연습인 것이다.
가르치는 제자가 모두 알 만한 유명 배우가 되었어도, 연기를 가르치는 그의 삶은 예나 지금이나 별반 달라진 것이 없다. 여느 직장처럼 진급이나 직급의 개념이 없는 이 일은 스스로 그만두지 않는 한, 연기의 초석을 잡아 주는 비슷한 과정을 매번 반복해야 한다.
이 책은 그렇게 지난 30년 동안 연기를 가르치며 생각한 것들을 솔직하고도 담담하게, 정제된 언어로 써 내려간 기록이다. 빛나는 무대 위가 아닌 무대 뒤에서, 길고 고된 시간을 배우들과 함께 걸어 온 그가 건네는 말은 꼭 배우가 아니더라도 각자의 자리에서 더 나은 내가 되고자 애쓰는 이들에게 조용히 힘을 건넨다.
“아마도 이 책은 잘 정리된 연기 교재가 아니라 연기를 하고 또 가르치며 겪은 시행착오들을 토대로 써 내려간 연기를 대하는 태도, 결국 삶의 태도에 관한 이야기일지도 모르겠다. 정답이 없는 연기의 세계처럼, 이 글도 어떤 정답을 향해 가는 것이 아니다. 그저 지난한 이 과정을 함께, 즐겁게 걸어갔으면 좋겠다.” _본문 18쪽
“어떻게 기다릴 것인가?”
기다림은 정지된 시간이 아니다
배우만큼 자기 차례가 올 때까지 기다리는 직업이 또 있을까? 기다림의 끝이 언제일지 짐작하기 어려울뿐더러, 무수히 많은 오디션을 거쳐 작품에 캐스팅된다 해도, 다음 작품이 계속 있으리란 보장이 없다. 원치 않는 공백기를 가지게 되는 경우도 허다하다. 누군가가 찾아 주어야만 지속 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전문 시험이나 가산점을 받을 수 있는 자격증이 없는 배우 일에서의 성공은 기다림의 시간을 어떻게 보내는지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저자는 연기를 가르치면서 같은 수업을 들어도 기다림을 대하는 자세에 따라 결과가 달라진다는 것을 자주 목격했다. 처음엔 모두 의욕적이지만, 시간이 지나면 점차 마음이 조급해지면서 아무런 결과가 없는 하루하루가 불안하게 느껴진다. 의욕적이던 이들도 금세 나가떨어져 버리곤 한다.
하지만 황인엽은 달랐다. 이미 3년이라는 시간 동안 모델로서 빛을 보지 못했던 그는 또다시 얼마나 기다리게 될지 예상조차 불가능한 배우 일을 선택하고, 그 누구보다 열심히 준비했다. 기다리는 시간 동안 자기가 어떤 것을 잘하고 또 못하는지, 어떤 연기를 할 수 있고 해야 하는지, 계속 질문을 던지며 답을 찾으려 애썼다. 결국 배우로서 이름을 알리는 제자들은 거듭된 실패에 좌절하면서 마냥 기다리고만 있던 이들이 아니었다. 기다리는 시간을 자신에게 주어진 기회로 사용하는 이들이었다.
물론 짧게 기다리고 빨리 성공하는 게 가장 좋겠지만, 그런 일은 잘 일어나지 않는다. 일어난다고 하더라도, 배우로서 생명력이 얼마나 길지는 알 수 없다. 기다림의 시간은 사람마다 그 길이도, 형태도 다 다르다. 하지만, 정지된 시간을 뜻하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같다. 다양한 장르의 작품을 섭렵하거나, 하고자 하는 연기에 필요한 대사를 모아 나만의 연기 노트를 만드는 등 각자의 방식으로 그 시간을 보낼 수 있다. 한순간도 정체되어 있지 않으려고 시도한 다양한 노력이 기다림을 두려워하지 않는, 단단한 배우로 성장할 수 있는 토대가 되어 줄 것이다.
누구나 배우가 될 수 있지만
아무나 배우가 될 순 없다
연기를 잘하고 싶다는 진심 어린 마음만 있다면 배우가 될 수 있을까? 배우려는 자세가 빠져 있다면, 마음은 욕심일 뿐이다.
대학 시절, 주목받는 배역은 늘 자신의 몫이 아니었음에도 어떤 상황에 어떤 역할을 맡든 최선을 다하던 후배가 있었다. 특유의 성실함은 감탄을 자아낼 정도였다. 글을 쓸 때와 달리 말할 땐 문장 부호를 생각하지 않는다는 교수님의 가르침을 듣고는, 곧바로 띄어쓰기를 없애고 문장 부호를 넣지 않은 자기만의 대본을 만들어 연습할 정도로 배움에 대한 의지가 가득했다. 남들은 연기를 잘하고 싶다는 욕심만 넘칠 때, 그 친구는 연기가 무엇이고 연기와 친해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늘 고민하고 공부했다. ‘신스틸러’ ‘주연보다 기억에 남는 조연’이라는 수식어가 붙는 배우로 거듭난 이정은 이야기다.
저자는 습득하는 감각이 다를 뿐, 연기도 일종의 공부라는 것을 늘 강조한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감각을 새롭게 시간을 들여 ‘배워야’ 한다고 말이다. 연기는 머리가 아니라 몸으로 배운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몸에 익을 때까지 배움을 게을리하지 않아야 한다.
연기할 때 유독 대사에 쫓기는 이들은 아직 대사가 몸에 체화되지 않아서 그렇다. 배역의 언어가 내 몸에 체화되어 결국 내 호흡으로 말할 수 있어야 언제든 자연스럽게 흘러나올 수 있다. 대본 자체도 작가의 말법으로 쓰였기 때문에 우선 배역의 언어로 만들고 난 다음, 그 배역을 연기하는 나의 언어로 만들어야 한다. 암기과목 보듯 글자만 달달 외워서는 표현이 빈약할 수밖에 없다.
흔히 많은 배우가 모방을 부정적으로 생각하지만, 저자는 연기를 공부하는 여러 가지 방법 중 모방도 하나의 선택지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다른 배우의 연기를 관찰하고 카피하는 과정에서 연기의 속성을 파악하기도 하고 새로운 기술들을 알아차리게 되는 장점이 있다. 문제는 ‘어느 한 배우만’을 모방해서 성대모사 수준에 그칠 때 발생한다. 여러 배우를 대상으로, 원본 배우가 독특하게 해석한 부분을 발견하고, 특정 구간은 자기만의 색다른 연기를 넣어 보기도 하는 등 이 과정이 모두 연기 공부가 된다. 모방하면서도 자기 색을 잃지 않는 게 중요하다.
홀로 빛나는 일이 아닌
소통투성이 일
Actor’s nightmare라는 용어가 있다. 배우들이 흔히 꾸는 꿈으로, 무대 위에 올랐지만 준비된 대사를 내뱉지 못한 채 당황하여 눈앞이 깜깜해지는 상황이 꿈의 주 내용이다. 수많은 사람 앞에 서는 배우 내면의 두려움과 압박감이 만들어 낸 악몽이 아닐까. 스타(STAR)라는 의미도 어두운 밤하늘에 홀로 반짝이며 떠 있는 별 아니던가. 그래서인지, 배우를 떠올리면 홀로 빛나는 일이라고 느끼는 사람이 많다.
연기를 하는 그 순간만큼은 무대 앞의 혹은 스크린 너머의 수많은 눈을 홀로 마주해야 하는 지독히 외로운 일이지만, 그보다 훨씬 더 많은 부분, 아니 일의 대부분에 ‘소통’이 필요하다. 배우는 대본과 배역은 물론, 대본을 통해 작가와도 소통한다. 그뿐인가. 상대 배우, 촬영 감독, 스태프, 관객과도 소통할 수 있어야 양질의 연기를 만들어 낼 수 있다. 그야말로 ‘소통투성이 일’인 것이다.
특히 소통 능력이 연기에 강점으로 작용한 배우로는 강동원이 있다. 누군가의 의견이 자기 생각과 다르더라도 납득이 가면 명쾌하게 수용하고, 대본과의 소통 능력도 뛰어난 편이라는 강동원은 영화 〈전우치〉 대본 수업 때도 그 소통 능력을 여과 없이 발휘했다. 대본에는 “분신술을 쓰는 전우치”라고만 되어 있던 짤막한 문장을 일본 만화 영화 〈나루토〉에서 영감을 얻어 전우치에게 수많은 캐릭터를 부여한 것이다.
대본에 적힌 글자를 창조적인 아이디어로 이미지화하고 그걸 연기로 표현해 낼 줄 아는 것도, 연기를 즐기는 것을 넘어 여유로울 수 있는 것도, 모두 소통에서 시작한다. 생각해 보면, 이 세상에 완전히 혼자 하는 일이라는 것은 없지 않은가. 어떠한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연기할 수 있는 자기만의 단단한 연기 공간을 만들되, 늘 소통의 문을 열어 두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삶과 예술이라는 중간 지대에서”
단단하지만 유연한 생활 예술인으로 살아가는 법
예술과 돈은 대척점에 있는 것 같지만, 예술을 업으로 삼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윤여정 배우도 과거 한 인터뷰에서 말하지 않았던가. “배우가 연기를 제일 잘할 때는 돈이 급할 때”라고.
저자는 수업 시간에 자기 혼자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로 대사를 중얼거리는 제자에게 묻곤 한다. 지금 그 연기를 돈으로 환산했을 때 어느 정도의 가치가 있을 것 같냐고. 배우는 그저 낭만적인 예술가가 아니다. 연기를 하고 그에 따른 대가를 받는 ‘생활 예술인’이다. TV 앞으로, 스크린 앞으로, 무대 앞으로, 사람들을 끌어모아야 하는 막중한 임무와 책임이 있고, 다른 직업과 마찬가지로 당연히 업무 스트레스도 크다. 생활인과 예술인의 중간 지점을 잘 영위하지 않으면, 둘 중 하나에 너무 치우쳐 버려 인지 부조화가 생기기 쉽다.
배우라는 직업을 택할 때도, 연기를 배우며 나아가는 과정에서도, 늘 이 ‘중간 지대’를 잘 기억해야 한다. 세계적인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도 출퇴근이 있는 직장인처럼 정해진 시간에 글을 썼듯이 말이다. 저자 역시 오랜 시간 정답이 없는 이 일을 가르치며 한 가지는 확실히 알게 됐다. 모든 것이 복잡하고 모호할 땐 오히려 단순하게 생각해야 한다는 것. 배우도 직업이라면, 직업인으로서 배우에게 필요한 좋은 ‘습관’을 찾아 나가는 과정이 곧 더 나은 배우가 되는 과정이라고 이야기한다.
좋은 습관의 힘은 의심할 필요 없이 강력하다는 것을 저자는 누구보다 잘 안다. 어렸을 때부터 연극이나 영화를 많이 접하고 연극 동아리 활동 등을 해 온 대학 친구들의 남다른 영화 지식은 늘 자신을 주눅 들게 했다. 스스로 그 문제를 극복하고 싶어서 그때부터 매일 한 편씩 영화 보는 습관을 들였고, 그 습관은 30년이 지난 지금도 유효하다. 배우가 어떤 장르의, 어떤 캐릭터를 맡았든 모든 대본을 수업할 수 있다는 자신감의 원천이 되었다. 약점을 이겨내려고 들인 습관이 연기를 가르치는 일을 하는 데 엄청난 무기를 선물해 준 것이다.
연기에는 정답이 없고, 연기를 하려는 이들의 방향성에도 정답은 없다. 그저 배우들 스스로가 삶과 예술이라는 중간 지대에서 좋은 습관을 들일 수 있도록 여러 방법이 담긴 메뉴판을 펼쳐 주는 것이 자신의 역할이라고 저자는 믿는다. 어떤 메뉴를 시도해 볼지, 그 선택이 성공할지 실패할지는 누구도 알 수 없지만, 그저 연기가 흥미로운 작업임을 매 순간 일깨워 주려고 노력한다.
배우 각자에게 맞는 습관을 들이는 일은 그들의 몫이다. 그 과정이 미숙하고 서툴지라도 믿고 기다려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저자는 말한다. “기다린다는 것은 배우에게도, 배우를 가르치는 나에게도 숙명”이라고.
“배우로서의 앞날이 끝이 보이지 않는 기다림 같겠지만, 좋은 연기 습관을 찾아 나가며 그 시간을 잘 견뎌 내 보자. 그렇게 쌓아 온 시간이 있는 한, 정답이 없는 이 길 위를 헤매더라도 결코, 길을 잃진 않을 것이다.” _본문 18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