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임 공백 담론에서 출발한 논의들이 보이는 모습이 그때나 지금이나 별반 다를 바 없다는 점은, 그 담론이 사실은 AI 기술에 대한 정책 수립에 집중하는 현실적 고찰이 아니라 자율성, 불투명성 등의 이런저런 추상화한 개념항들을 AI라는 상상 속의 관념에서 추출해 낸 다음, 이를 자유의지나 책임성에 관한 오래된 수수께끼들에 빠뜨려 사상시키는 고식적 사고 실험의 한 갈래에 지나지 않음을 간접적으로 드러낸다.
-01_“1980년대의 AI와 책임” 중에서
애니메이션에 필요한 원화를 그리는 애니메이터들이 근무하는 사무실을 예시로 들어 보자. 원래 원화가 10명이 근무하며 주당 3만 장의 프레임을 직접 그려 내던 상황에서, 적절한 키워드를 입력하면 그에 맞는 그림을 생성하는 생성형 AI 기술을 도입해 똑같이 주당 3만 장을 생산해 내면서도 7명의 원화가만 근무하게 되는 상황으로 바뀌었다면, 새로 도입된 생성형 AI는 원화가 3명을 ‘대체’한 것일까?
-03_“자동화의 노동경제학과 책임” 중에서
예를 들어 형식적으로 가해자와 피해자를 구분해 피해자의 과실이 큰 경우에도 언제나 가해자에게 일차로 책임을 묻던 옛 책임법상의 원칙은, 법경제학이 등장하기 이전에도 피해자의 과실이 크다면 쌍방 과실이 상계된다고 보아 형식적 가해자라도 과실이 적은 자에게는 책임을 덜 묻거나 묻지 않는 방향으로 점차 변해 왔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가 어떻게 정당화될 수 있는지를 명쾌하게 설명하는 법원리가 등장하지는 못했는데, 이를 해결한 것이 법경제학의 최소비용 회피자 원리다.
-06_“AI의 이용자, 소비자와 책임” 중에서
그럼에도 책임 공백 담론으로 대표되는 AI와 책임에 관한 종래의 논의들은 마치 AI를 자율적 로봇이라고 보아 인간이 하던 업무를 그대로 대체하는 것처럼 전제하고 논의를 전개해 왔는데, 이는 본래 인간이 하던 업무 상당수의 내용이 명확히 정의되어 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새로운 AI 기술에 통용되는 사용 방법이 무엇인지조차 정의되어 있지 않다는 중대한 논리적 허점을 조용히 건너뛰게끔 했다.
-09_“상용화, 안전기준, 그리고 사용 방법”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