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속에서
한국 근대사는 지금도 우리네 삶에 많은 영향을 끼치고 있어. 현재진행형인 것들이 많아. 일제에 강제로 끌려간 일본군 ‘위안부’나 ‘노동자’ 문제가 대표적이지. 이런 문제는 근대에서 비롯됐잖아. 많은 역사가 미완의 상태로 오늘을 관통하고 내일로 향하고 있어. 우리가 근대사를 알아야 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지. -8쪽
‘입승入承’이란 말의 뜻도 알아보자. 입승의 한자인 이을 승承 자는 대를 잇는다는 의미야. 그런데 왜 굳이 입승이라고 했을까? 입승은 왕에게 아들이 없을 때 왕족 중의 한 사람이 왕의 대를 잇는다는 뜻이래. 철종이 대통을 이을 후사 없이 죽자, 먼 왕족인 흥선군의 둘째 아들 이명복으로 대를 이었으니, 입승이라고 한 거야. -19쪽
고종에 대한 수렴청정은 당연히 조대비의 몫이었어. 그런데 조대비는 형식적인 수렴청정을 할 뿐 실질적인 정치는 왕의 아버지 흥선군이 맡았어. 흥선군과 조대비 사이의 약속에 따라 대궐의 내치는 조대비, 외치는 흥선군이 맡기로 했거든. 흥선군의 정치는 수렴청정이 아니라 대신 정치하는 ‘섭정’이었어. -20쪽
중전 민씨가 남편인 고종을 끌어들이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어. 명분은 충분했고 고종은 민씨의 총명함을 익히 알고 있었던 터라 마음이 움직였지. 이런 와중에 앞에서 언급한 최익현의 계유상소가 올라온 거야. 대원군의 세상인데 대원군을 규탄하는 상소가 올라와서 조정이 벌집 쑤신 듯 난리가 나. 앞다투어 대역죄로 다스리라고 난리였지만 고종은 최익현을 되레 호조참판으로 승진시켰잖아. 이건 대원군보다 중전 민씨 편을 든 것이지. 이렇게 해서 중전 민씨가 정치 전면에 나서게 돼. - 48~49쪽
아무튼 이 무렵 개화파들은 무조건 외세에 우리 문호를 개방하자는 것보다는 ‘동도서기론東道西器論’이라는 사상을 기반으로 개화를 주장했어. ‘동도’는 ‘동양의 도’라는 뜻인데, 조선의 전통적인 도라고 볼 수 있지. 반면 ‘서기’는 ‘서양의 도구’, 즉 서양의 기술을 의미해. 이 두 개념을 합쳐서 의미를 파악해 보면, 동양의 전통적인 도를 지키면서 서양의 근대적인 기술을 받아들이자는 뜻이야. -63쪽
인간의 평등, 능력에 따른 인재 등용 그리고 약자와 서민을 위한 정책을 펴겠다는 의지가 확실했어. 완전 혁신이었지. 그런데 거사가 일어나자 지방에 머무르고 있던 청군이 서울로 올라왔어. 중전 민씨 세력들이 몰래 청군에 도움을 요청했던 거야. 12월 5일 오후가 되자 청군 1500명이 창덕궁을 포위하고 일본군과 총격전을 벌였어. 일본군은 고작 약 300명밖에 없었기 때문에 일본 다케조에 공사는 걱정하지 말라던 호언장담이 무색하게 철수를 명령해. 이렇게 갑신정변은 ‘삼일천하’라는 치욕적인 상징어를 남기고 막을 내렸어. -73쪽
한국 근대사는 ‘대일 항쟁의 역사’, 즉 ‘일제의 조선 강제 점령의 역사’라는 한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어. 이 문제의식은 고종 즉위부터 일제에게서 해방될 때까지의 한국 근대사를 관통하는 날줄이지. 씨줄은 당연히 우리 선조들의 삶일 테고 말이야. 조선이 공식적으로 일제의 식민지가 된 날은 ‘경술국치일庚戌國恥日’인 1910년 8월 29일이야. 하지만 이 날은 일제의 야욕이 완성된 날일 뿐, 일제는 그보다 훨씬 전부터 호시탐탐 조선을 노리고 있었어. -79쪽
청일전쟁의 속내를 조금 더 깊게 들여다보면 청나라와 일제의 전쟁이라는 겉모습 속에 조선의 동학 농민군과 일본군 간의 전쟁이 숨어 있어. 동학 농민군은 청나라와 일제의 군사를 조선에 주둔하지 못하게 하려고 정부군과 전주 화약을 맺었잖아. 폐정 개혁안을 실천하는 한편 질 나쁜 관리와 양반, 지주 등 기득권 세력 타파를 위한 것도 있었지만 말이야. 그런데 외세들이 조선 땅에서 전쟁을 벌이자, 동학 농민군은 이에 맞서 싸우기로 한 거야. -101쪽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에서 1년 남짓 있다가 1897년 2월 20일 지금의 덕수궁인 경운궁慶運宮으로 돌아왔어. 1896년 개화파들을 중심으로 설립된 독립협회 등의 단체와 전국 유생들의 강력한 환궁 상소 운동이 있었거든. 결국 고종은 이들의 건의를 받아들여 환궁을 결심해. 경복궁 대신 경운궁을 택한 것은 미국과 러시아 공사관이 가까이 있어서 일제의 감시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야. -115~116쪽
이 사설에서 보듯 《독립신문》은 정부의 일을 백성들에게 알리고, 백성의 여론을 정부에 전달하는 정부와 백성 간의 다리 역할을 했어. 그래서 《독립신문》 창간은 한국 근대사에 큰 의미가 있어. 신문 가격을 낮춰 더 많은 사람이 읽을 수 있도록 함으로써 민중 계몽의 효과를 높였고 누구나 읽을 수 있게끔 ‘언문’으로 썼기 때문이야. 언문은 한글을 낮춰 부르는 말인데, 당시만 해도 여전히 한자가 우위에 있어서 한글을 언문이라고 불렀대. 한글로 신문을 만드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는데, 한글 표준어와 방언, 발음에 정통한 국문학자 주시경의 역할이 컸어. 그가 한글판 편집을 맡았거든. -123쪽
여기서 국호 ‘대한’에 대해 간단하게 알아볼게. 대한은 지금 대한민국도 사용하는 대한’이야. 고종은 조선 왕조의 영토를 ‘고려가 마한馬韓·진한辰韓·변한弁韓의 땅을 통합한 것’을 바탕으로했고, 고구려·백제·신라를 통틀어서 ‘삼한’이라 불렀던 데서 삼한을 모두 아우르는 ‘큰 한韓’이란 의미인 ‘대한’으로 정했다고 했어. 당시 주변국들은 조선이 아닌 ‘한韓’으로 부르기도 해서 친숙한 이름을 쓰는 것이 좋기도 했지. -129쪽
러시아가 대한제국의 권리를 일제에 주다니 어이가 없지. 러일전쟁 이야기를 끝내기 전에 이와 같은 문제가 또 있어서 짚고 넘어가야 할 것 같아. 바로 독도 문제야. 1904년 8월, 러일전쟁의 마지막 전투라고 할 수 있는 동해해전을 위해 일제가 울릉도와 독도에 망루를 설치하려고 했어. 러시아 군함을 감시하려는 용도였지. 일제 내각은 1905년 2월 22일 독도에 ‘다케시마竹島’라는 이름을 붙이고는 시네마 현 소속으로 편입시켜. 망루는 그해 8월에 독도, 9월엔 울릉도에 세워. 이건 독도가 일제의 땅이 아니라는 중요한 단서야. 일제의 땅이라면 바로 설치하면 되는데 굳이 시네마 현을 담당으로 정하고 고시를 발표했다는 건 독도가 대한제국의 땅, 한국의 땅이라는 것을 뜻해.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알아야 독도가 우리 땅이라는 것을 명확하게 주장할 수 있어. -162쪽
이토는 군인들로 궁궐을 에워싸도록 하고는 헌병 호위 속에 하세가와長谷川 주한 일본군 사령관을 대동하고 어전회의장까지 들어왔어. 그러고는 직접 메모지를 들고 대신들에게 각각 의견을 묻기 시작하니 참정대신 한규설이 대성통곡했어. 그러자 그를 별실로 데려갔는데, 이토가 “너무 떼를 쓰거든 죽여 버려라”라고 고함쳤다고 해. 탁지부대신 민영기와 법부대신 이하영은 반대했어. 반면 학부대신 이완용, 군부대신 이근택, 내부대신 이지용, 외부대신 박제순, 농상공부대신 권중현 등 다섯 명은 찬성했어. 이토가 처음에 다수결 원칙으로 결정한다고 했기에 이 협약안은 국 승인이 돼. 역사는 이 협약안에 찬성한 이들을 ‘을사오적乙巳五賊’이라고 불러. -169~170쪽
이렇게 여러 개의 임시정부가 만들어질 수밖에 없었던 것은 노선 차이도 있었을 테고, 교통과 통신이 열악해 소통하지 못한 탓도 있을 거야. 그러함에도 한 가지 분명한 건 당시 독립운동에 힘쓰던 사람들은 우리의 정부를 반드시 우리 손으로 세워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는 거지. -202쪽
그리고 오늘날 헌법에 해당하는 ‘임시헌장’도 제정했어. 국무총리 비서장이자 대한 독립 선언서를 썼던 조소앙이 임시헌장 초안을 썼어. 임시헌장은 전문과 10개 조로 구성돼 있는데, 제1조가 지금 우리 헌법 제1조와 똑같아. 임시헌장 제1조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함”, 현행 헌법 제1조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고 표기되어 있어. 100여 년 전에 만든 임시헌장의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라는 천명은 지금도, 앞으로도 계속 우리의 정체성을 상징해. -205쪽
임시정부는 여러 도시에 머물며 고난의 길을 걸었어. 나라 잃은 임시정부의 설움을 온몸으로 느끼며 독립운동가들은 한시도 독립이라는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끝까지 지켜낸 거야. -226쪽
일제의 식민 지배 시기를 우리는 그동안 주로 ‘일제 강점기日帝强占期’라는 명칭을 사용했어. 일제가 강제로 대한제국을 점령당했다는 의미야. 그런데 2007년 국회에서 이 시기에 대한 공식 용어를 ‘대일항쟁기對日抗爭期’로 정했어. 우리 독립운동가들이 일제에 맞서 주체적으로 항쟁했다는 뜻이 담겨 있지. 하지만 교과서에도 아직까지 일제
강점기라는 용어를 쓰고 있는 것처럼 이 용어를 주변에서 찾기가 어려워. 아쉬움이 크지. 그래서 나는 독립운동가의 주체적인 항쟁을 널리 알리는 의미에서, 이 책에서 대일항쟁기라는 용어를 일제 강점기대신 사용하려고 해. 교과서에 나오지 않는 용어라서 낯설 수도 있지만, 알아 두면 좋겠어. -229쪽
일제의 항복은 곧 우리에게 ‘해방’이라는 민족적 선물이 되었어. 그런데 이 해방이 우리의 역할보다 일제의 패망이라는 외부적 조건에 의해서 주어졌다는 점에서 아쉬움이 크지. 물론 대일항쟁기 동안 우리 민족은 국내외에서 독립운동을 치열하게 했어. 연합국의 공식 소속이 아니었어도 그 역할을 폄훼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 -25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