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사의 두건이라고도 불리는 투구꽃의 덩이뿌리를 겨자기름과 아마기름에 섞은 겁니다. 독성이 강해 조금만 삼켜도 목숨이 위태롭습니다. 조심해서 다루고 반드시 손을 씻으십시오. 하지만 관절염에는 아주 그만이지요. 바르면 처음에는 욱신거리다가 이내 고통이 잦아들고 한결 좋아질 겁니다. 자, 이제 더 필요하신 건 없으십니까? 괜찮으시다면 조만간 제가 직접 가서 약 바르는 일을 도와드리겠습니다. 저는 아픈 부위도 금방 찾을 수 있고, 게다가 이건 힘껏 잘 발라줘야 하는 약이니까요.”
_36쪽
캐드펠은 한눈에 그녀를 알아보았다. 열일곱 살 이후 처음이었다. 그때 두 사람은 남들 모르게 장래를 약속한 사이였다. 가족이 알았다면 둘의 만남을 인정했으리라. 그러나 그는 십자군에 참가하기 위해 성지로 떠나야 했다. 많은 무공을 세우고 돌아와 그녀와 결혼하겠다는 굳은 약속을 하고 떠났으나, 병사로서 또 선원으로서 겪어야 했던 숱한 열광과 흥분과 위험 속에서 모든 것을 잊고 말았다. 그는 귀국을 차일피일 미루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 역시 캐드펠을 기다리겠다고 철석같이 약속했지만, 마침내 기다림에 지치고 부모의 권유에 못 이겨 보다 안정적인 남자와 결합하고 말았다. 그는 그녀의 행복을 진심으로 빌었다. 그러나 이곳에서 재회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_60~61쪽
“내가 알고 있는 바를 알려드리는 거요. 행정관께 도움이 될지 모르고, 만에 하나 생길지 모를 실수를 방지하도록 말이오.” 캐드펠은 차분하게 대답했다.
“저는 범인 검거가 급선무라고 봅니다.” 행정관은 문간에 서서 어깨너머로 그를 돌아보며 대꾸했다. “일단 그자만 잡으면 수사님의 박식한 조언은 그다지 필요 없으리라 여겨지는데요.”
_88쪽
바람 한 점 없는 고요한 것이, 새벽녘에는 서리가 매섭게 내릴 성싶었다. 약이 보글보글 끓는 소리, 그리고 이따금 약을 저을 때 캐드펠의 소맷자락이 스치는 소리만이 간간이 밤의 정적을 끼뜨리고 있었다. 밤 10시가 지난 시각, 캐드펠이 자신이 던진 미끼가 허사로 돌아갔구나 생각할 즈음이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조심스럽게 빗장을 푸는 소리가 들렸다. 문이 살그머니 열리더니 한줄기 서늘한 바람이 실내로 들이닥쳤다. 캐드펠은 상대가 행여 겁을 먹고 경계하지나 않을까 싶어 미동도 없이 가만히 앉아 있었다. 잠시 후 숨죽인 목소리가 가느다랗게 들려왔다.
_116쪽
페트러스 수사가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종교나 소명에 관한 광적인 믿음 때문은 아니었다. 그런 것들은 그에게 오히려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것이었으니까. 페트러스 수사가 광기를 보이는 대상은 다름 아닌 자신의 요리였다. 신성한 화덕불이 그의 검은 머리와 검은 눈을 시뻘겋게 물들였고, 그의 몸속을 흐르는 북부 지역의 피는 가마솥의 물처럼 펄펄 끓었으며, 변경 지방 출신의 거친 기질은 찜통처럼 타올랐다. 그 뜨거운 열정으로 그는 헤리버트 수도원장을 사랑했고, 로버트 부수도원장을 증오했다.
_138쪽
저수지 너머에 자리한 집 부엌에서 불빛이 반짝였다. 가까이 다가가니 덧창 틈새로 새어 나오는 불빛이 보였다. 그랬다! 캐드펠이 잊고 있던 또 한 가지 사실이 있었다. 부엌 창문은 저수지 쪽으로 나 있고, 거리로 보아도 도로보다는 저수지에 훨씬 가까웠다. 창 바로 아래 화로가 있어서 연기를 내보내느라 어제는 창문을 활짝 열어놓고 있었다. 작은 병을 던져버리기에 그보다 더 좋은 장소가 있을까? 거기서 힘껏 던지면 병은 저수지 바닥으로 가라앉을 것이다. 옷에 냄새도 배이지 않게 하고 자국도 묻히지 않으면서 증거를 인멸하기로는 더없이 좋은 방법이리라.
_162~163쪽
로버트 부수도원장은 심각한 표정으로 캐드펠을 내려다보았다. 자기 휘하의 수사들 사이에서 불륜의 소문이 돌 경우 부수도원장은 그 자신을 위해서라도 끝까지 이를 덮고 당사자를 옹호하려 들 사람이었다. 하지만 한편 이 일은 늘 거북스러운 존재였던 저 자유분방한 인물에게 재갈을 물릴 절호의 기회이기도 했다. 캐드펠의 착실하고 관대한 모습 뒤편에 숨겨진 은밀한 구석을 본 듯해 부수도원장은 내심 쾌재를 불렀다. 그는 아둔한 사람이 아니었으니, 제롬 수사의 이야기에 숨겨진 속뜻을 모를 리 없었다.
_177쪽
사이먼 수사는 캐드펠의 말대로 했다. 자신이 모르는 전문 지식을 가진 이를 보면 아이처럼 무조건 믿고 따를 사람이었다. 캐드펠은 사이먼 수사가 켜놓은 촛불 아래서 밤새도록 바르나바스 수사를 정성껏 간호했다. 먼저 뜨겁게 달군 돌을 웨일스산産 플란넬에 둘둘 싸서 환자의 발에 대고, 가슴과 목과 갈비뼈에서 허리까지 겨자와 열을 내는 허브 몇 종을 섞은 거위 기름 연고를 바르고, 다시 가슴과 목에 플란넬 붕대를 친친 감고 이마에는 찬 수건을 올려놓은 다음, 향신료와 꿀과 해열용 허브를 탄 뜨거운 포도주 한 잔을 마시게 했다. 환자는 자면서도 괴로운 듯 이따금 경련을 일으켰고, 한밤중에는 땀을 비 오듯 흘려 침대를 온통 적셨다. 정성스러운 두 간병인은 힘을 합해 환자를 안아 올리고 깨끗한 새 시트로 갈아준 다음, 다시 따뜻하게 환자의 몸을 감싸 침대에 뉘었다.
_241~242쪽
“수사님이 여기 이틀쯤 더 계시면 모레 란실린에서 만나실 수 있을 거예요. 그날 그분 토지에 관한 재판이 열리거든요. 저번에 오아인 씨가 소송을 낸 건이 아직 처리되지 않았는데, 재판관들이 먼저 그 땅을 둘러본 다음 판결을 내리기로 한 게 바로 모레예요. 크리스마스 전까지는 어떻게든 처리할 건가 봐요. 오아인 씨 땅은 마을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만 그날 란실린 교회에 가면 틀림없이 그분을 만나실 수 있을 거예요. 이웃이 토지 경계석을 옮겼다고 해서 소송을 걸었댔어요.”
저도 모르게 많은 이야기를 털어놓는 사이, 소년은 자신이 캐드펠에게 하나의 질문, 어쩌면 가장 중요한 질문에 대한 답을 내놓았다는 사실을 짐작조차 못 하고 있었다.
_255쪽
뜰은 잠시 깊은 정적에 휩싸였고, 잠시 뒤 안도의 한숨과 함께 웅성거리는 소리가 수사들 사이에서 파문처럼 번지기 시작했다. 마크 수사는 캐드펠의 팔에 얼굴을 묻은 채 터져 나오는 웃음을 막으려 무진 애를 쓰고 있었다. 얼굴이 흙빛으로 변한 제롬 수사는 바람 빠진 풍선처럼 당장에라도 자리에 주저앉을 것만 같았다. 뒤에서 누군가가 싸움에 이긴 닭처럼 고성을 질렀지만 그 소리는 금세 멈추었고 사람들도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는 않았다. 아마도 페트러스 수사가 아닌가 싶었다. 일이 절정에 이른 순간 로버트 부수도원장의 코를 납작하게 만든 저 신임 수도원장을 위해 그는 벌써 부엌으로 달려가 요리 준비를 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_319~32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