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리학과 문화. 나는 두 낱말의 뜻을 들여다보기만 해도 둘 사이의 연결고리 찾는 것은 필연적인 일이라고 여겨왔다. 문화란 인류의 삶의 방식과 이를 통해 만들어 낸 것들의 총체이므로 물리학도 응당 문화에 포함되고, 물리학이란 모든 물物체들의 이理치를 알아내는 학문이므로 문화도 당연히 그것의 탐구 대상일 것이기 때문이다.
〈프롤로그: 우리는 어디에서 왔으며, 누구이고, 어디로 가는가?〉 중에서
자연은 누군가를 쫓아내거나 목숨을 빼앗으면서까지 무리수의 존재를 숨기려고 했던 피타고라스의 추종자들처럼 어느 순간 자아도취에 빠져 도그마에 집착하는 사람들을 철저히 응징하고야 마는 무시무시한 힘을 갖고 있다. 그리고 인류는 그럴 때마다 무너져 버린 과학을 다시 세우는 일을 반복하며 지금의 현대과학을 탄생시켰다.
〈우주가 음악이라면 과학은 영원한 미완성 악보〉 중에서
현대과학의 아버지 가운데 하나인 사람에게서 순차보다는 즉흥, 의식보다는 무의식, 이성보다는 꿈, 현실보다는 상상을 보았다는 것. 그리고 모터사이클 정비를 위해서는 반드시 낭만적 사고가 필요하다는 것. 문제를 해결하는 데 논리만을 이용하려다가 세계의 복잡성으로부터 못 빠져나오고 허우적거리는 우리 생활인들 모두가 한번 생각해 볼 만하다.
〈모터사이클을 고치는 가장 빠른 방법〉 중에서
1만 7000년 전 라스코 벽화에서 시작하여 다빈치의 〈수태고지〉를 거쳐 〈트랜스포머〉 속 범블비의 액션신까지 끊임없이 발전해 온 그림과 기술의 역사. 그림의 본질이 아름다움을 욕망하는 인간의 감성과 지성의 결합이라는 점은 구석기의 인간에서 시작해, 현재의 우리를 거쳐, 미래의 후손들에게까지 변함없이 이어질 것이다.
〈컴퓨터가 다빈치보다 잘 그리는 그림〉 중에서
영화 시나리오 수만 편의 흥행 성적을 분석함으로써 새 시나리오의 영화화 가능성을 따지고, 제작 예정 영화의 평점과 관객수를 예측하는 알고리즘이 여럿 나와 있다. 하지만 인간이 창작하고, 인간이 즐기는 영화의 제작 과정에서 ‘주관성이 개입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 과연 올바른 방향인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어 보인다. 주관성이라는 변수를 제거하고 과거의 데이터를 분석한 결과에만 의존한다면, 어떻게 전례 없이 새로운 작품이 나타나 영화 산업의 혁신을 일으킬 수 있을까?
〈사람들을 지배하는 AI를 지배하는 인간〉 중에서
경계를 흐리고 부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은 모네와 케이지가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 냈듯이 미래는 지금의 우리가 질서와 무질서 사이의 경계에서 발견해야 할 새로운 길 위에 존재한다. (…) 혼돈의 모서리에 기꺼이 올라타 스스로 미래를 개척해 나가는 능동적인 운전자가 될 것인가, 아니면 지속될 수 없는 정상상태의 허상을 부여잡고 마지못해 끌려가는 수동적인 승객이 될 것인가?
〈혼돈의 모서리라는 가능성〉 중에서
현생인류인 호모사피엔스가 탄생한 이후 30만 년 동안 이루어 온 발전의 흔적이 사라져서 모든 것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는 상황을 상상해 보자. 파스칼처럼 절망하거나 ‘세상에 그만큼 번거로운 일이 또 있을까?’라고 생각할 사람들도 있겠지만, 파인먼은 인간의 상상력과 사고력만 남아 있다면 무엇이든 다시 시작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이야기했다. 당신이 그 질문을 받는다면 어떤 대답을 들려주겠는가?
〈종말에 대처하는 예술적이고 과학적인 방법〉 중에서
구글에 “neural style transfer”라고 검색하면 나오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를 빈센트 반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 같은 붓놀림으로 표현했다는 그림도 있다(호기심에서라도 한번 찾아보시기를 권한다. 내게 그 그림은 전혀 아름답지 않아서 책에 싣고 싶지 않다). 이제 생성 AI가 반 고흐처럼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된 것일까? 글도 잘 쓰고 그림도 잘 그리는 한 친구는 이 질문을 듣고 나서 내게 이렇게 말했다. “반 고흐는 잘 차려입은 귀부인을 그리지 않아.”
〈어느 날 AI가 내게 슬프다고 말했다〉 중에서
과학의 역사에는 아직 우리가 모르는 불확실한 개념들에 이름을 지어주면서 인류 지식의 지평선을 넓힌 창의적인 과학자들의 이야기가 가득하고, 개중에는 시인에 비견될 만큼 비상한 언어적 감수성을 발휘한 이들도 있다. 푸른 하늘을 수놓은 구름을 올려다보면서 그 너머에 있는 우주의 비밀이 눈에 맺혀 있는 과학자들의 시심詩心을 한번 상상해 보면 어떨까?
〈내가 구름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중에서
지금 우리라는 존재를 이루고 있는 별가루들도 언젠가 시공간을 타고 어딘가로 날아가 다른 생명체로 태어나고, 더 먼 곳에서는 새로운 별이 되기도 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두 다시 만난다. 우리는 미래를 함께 만들어 가는 존재들이니까.
〈에필로그: 우리는 별을 바라본다〉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