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당궐사(題唐闕史)
지부족재(知不足齋)가 어찌 부족하겠는가? 서적에 목말라하는 것은 어진 일이로다! 장편 대작은 모두 서각에 꽂혀 있고, 자질구레한 이야기와 하찮은 말도 책 상자에 들어 있다. 《궐사》 두 권은 주워 모은 이야기를 전해, 만당(晩唐)의 남겨진 자취에서 그 모습을 볼 수 있다. 고언휴(高彦休)는 자호가 참료자(參寥子)인데, 고요한 하늘과 함께 하나 됨이 없다.
[청 고종] 건륭(乾隆) 갑오년(甲午年 : 1774) 청화(淸和 : 4월) 상한(上澣 : 상순)에 황제가 친히 쓰다.
3. 치 상서 집의 쥐 요괴
허하[許下 : 허창(許昌)] 사람인 상서(尙書) 치사미(郗士美)는 [헌종] 원화(元和) 연간(806∼820) 말에 악주관찰사(鄂州觀察使)를 지냈는데, 인애로 아랫사람을 어루만지고 충심으로 윗사람을 모셨으며 정치 교화의 훌륭함이 전적에 실렸다. 하루는 새벽에 일어나 장차 일을 보러 나가려고 의대를 다 매고 나서 왼손으로 가죽신을 들고 아직 발을 넣지 않았을 때, 갑자기 커다란 쥐가 정원을 가로질러 가더니 북쪽을 향해 손을 모으고 춤을 췄다. 팔좌(八座 : 치사미)가 크게 화내며 겁주어 쫓아내려고 했지만, 쥐는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이에 치사미가 가죽신을 던져 맞히자 쥐가 즉시 도망쳤다. 가죽신 속에 독사가 떨어져 있었는데, 독사는 구슬 같은 눈에 비단 같은 몸을 하고 긴 대쪽 같은 가는 독을 혀끝에서 마구 쏘았다. 아까 쥐 요괴가 없었다면 치사미는 필시 발가락이 붓고 발이 썩는 해를 입었을 것이다.
참료자가 말하길, “올빼미가 울고 쥐가 춤추는 것이 항상 재앙이 되지는 않는다. 대인군자는 이런 일을 만나더라도 길하다”라고 했다.
20. 제 장군의 의로운 개
금군대교(禁軍大校) 중에 이름이 영(瑛)이고 성이 제씨(齊氏)인 자가 있었는데, 처음에 뛰어난 말타기로 황제의 은총을 크게 받아 임시 어사(御史) 직함으로 극헌(劇憲 : 어사대부)에 이르렀다. 그는 집에서 명견 네 마리를 길렀는데, 늘 황제를 수행해 드넓은 원유(苑囿)에서 사냥하고 돌아오면 개들에게 쌀밥과 고기를 먹였다. 그중에서 한 마리만은 목구멍과 이빨 사이에 먹이를 담아서 나갔는데, 마치 덤불 속에 감춰 놓았다가 나중에 먹으려는 것 같았으며 다 먹으면 다시 왔다. 제영은 속으로 이상해하다가 하루는 노복에게 그 개가 가는 곳을 살펴보게 했더니, 북쪽 담의 오래된 구멍 속에 그 개의 어미가 있었는데, 늙고 앙상한 데다 더럽기 짝이 없었다. 그 개는 입에 넣어 온 먹이를 뱉어 내서 어미에게 먹였다. 제영도 의로운 사람인지라 한참 동안 그 기이함에 감탄했다. 그래서 광주리에 어미 개를 담아 오게 해 망가진 자리를 깔아 따뜻하게 해 주고 남은 음식을 배불리 먹였다. 그 개는 꼬리를 흔들고 머리를 숙여 마치 감격한 마음을 표시하는 것 같았다. 그 후로 제영이 간사한 짐승을 사로잡거나 교활한 짐승을 뒤쫓을 때 손짓이나 눈짓만 해도 그 개는 나는 듯이 내달렸다. 제영이 그 개를 데리고 황제를 수행해 어가(御駕) 앞에서 사냥하면, 반드시 많은 짐승을 잡아 상을 받았다. 1년이 지나 어미 개가 죽자, 그 개는 더욱 열심히 힘을 바쳤다. 또 계절이 바뀌어 제영도 죽자, 그 개는 저녁 내내 우! 우! 하고 울부짖으면서 멈추지 않았다. 한 달이 지나 장지에서 매장할 때 네 마리의 명견을 남겨 두어 도적을 막게 했는데, 하관한 날 저녁에 그 개 혼자만 발로 흙을 긁어내 구덩이를 만들더니 제영의 관에 머리를 찧어 피가 났으며, 무덤의 흙을 다 덮기 전에 그 개도 죽었다.
참료자가 말하길, “아, 네 발로 달리고 털 달린 짐승이지만 능히 충과 효 둘을 지녔으니 감탄스럽도다!”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