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트랜지션이라는 결정은 삶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바로 잡는 것이었다. 우리는 우리가 트랜스라는 사실을 알아차리자마자 별안간 딴사람으로 변해버리는 게 아니다. 내면의 나와 일치하는 방식으로 자신을 드러내기 시작하자마자 딴사람이 되는 것도 아니다. 그저 남들이 처음 우리를 인식하던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우리를 바라보게 된다는 것만으로 변하는 것도 아니다. 그리고 나의 트랜지션을 둘러싼 생각들을 숙고하다 보니, 트랜지션은 인간의 경험에 깊이 각인된 것임을 알게 됐다. 트랜지션, 곧 전환은 오로지 트랜스젠더만 겪는 것이 아니다. 트랜지션은 보편적이다. 우리 모두가 하는 일이다. (12~13쪽)
자신을 어떻게 정체화하더라도,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변하는 사람도, 영영 똑같은 모습으로 머무르는 사람도 없다. 우리 모두 트랜지션한다. 트랜지션은 우리를 분리하는 대신 하나로 묶는다. 여기서 말하는 트랜지션이 어린이가 청소년이 되는 변화건, 우리의 섹슈얼리티, 젠더, 우리가 사랑과 맺는 관계, 인종 정체성, 개인적 목적에서 일어나는 변화건, 우리 삶의 모든 측면은 전환을 겪는다. 만약 우리가 이 전환적 사고를 삶에 적용할 수 있다면 자기 안에 있는 내적 장벽은 물론 서로를 가르는 외적 장벽 역시도 무너뜨리기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개인 차원에서도, 세계적 의식을 구축하기 위해서도 이는 모두에게 도움이 되는 일이다. (13~14쪽)
비자발적 정체성이란 우리의 삶이 어떻게 펼쳐질 것인가에 대한 타인의 추측, 즉 부모, 가족, 공동체의 기대로 이루어지는 정체성이다. 가장 흥미로운 지점은 아이가 어떤 방식으로건 소수자가 되리라고 추측하는 경우는 절대 없다는 것이리라. 곧 아이를 낳을 부모가 각양각색의 손님을 초대해놓고 아이가 태어날 때 지정받을 성별을 밝히는 성별 공개 파티를 열기도 한다. 성별 공개 파티는 결국 아기의 생식기에 바탕을 두고 한 사람의 비자발적 정체성, 추측된 젠더, 그리고 그것이 지닌 의미와 이에 수반될 일들에 관한 사람들의 인식을 축하하는 자리 아닐까? 이런 부모들이 아이가 시스젠더 이성애자가 아닐 수도 있다고 추측하는 경우는 한 번도 보지 못했다. 내 비자발적 정체성에는 자신의 아이가 이성애자 아들이라 믿고 품었던 아버지의 기대가 포함된다. 그 아들과 자신의 열정, 그리고 삶에 대한 전반적인 전망을 공유할 수 있을 거라는 기대 말이다. (25~26쪽)
이성애 규범적 서사를 우선하는 세계에서 기쁨, 로맨스, 그리고 행복은 오로지 이성애자들에게만 허락되곤 한다. 이성애자가 아닌 사람들이 하는 것은 성행위에 불과하다. 이성애 사회는 전반적으로 사물의 물성 너머를 생각지 않는 경우가 많다. 성적인 파트너를 찾기 시작하기 전 성장기에 나는 단 한 명의 동성애자도 알지 못했는데, 이보다 더 최악이었던 건 퀴어도 기쁨을 누릴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 없었다는 점이다. (61쪽)
트랜지션 하기 전 나는 나를 게이로 정체화했는데, 그 시절에는 이 몸, 이 사회 속에 이성애자나 동성애자가 아닌 다른 무엇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몰랐기 때문이다. 나는 속수무책으로 남성에게 끌렸으며 사회는 이런 감정이 잘못된 것이라 했다. 나는 내가 남성일 것이라 추측했고, 태어날 때의 지정 성별이 남성이었으니 내가 게이일 것이라 추측했다. 모두들 남성이라 지칭하는 몸 속에 살면서, 남성의 몸에 성적으로 끌리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젠더 트랜지션 과정에서 내 몸이 점차 제자리를 찾으면서 섹스와 섹슈얼리티를 바라보는 관점 역시 자리를 찾아갔다. (65쪽)
커밍아웃이라는 행위, 또는 LGBTQIA+의 커밍아웃을 기대하는 행위가 실제로 어떤 의미인지 비판적으로 생각해보자. 궁극적으로 커밍아웃은 자신이 이성애자/시스젠더가 아니라는 사실을 밝히는 행위다. 즉 자신이 같은 성별의 사람이나 다양한 성별의 사람들에게 성적으로 끌린다는 사실, 트랜스젠더인 경우 태어날 때 지정된 성별로 자신을 정체화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밝히는 행위다. 그러나 커밍아웃을 둘러싼 대화가 여기서 끝나는 일은 드물다. 이 대화는 커밍아웃을 하는 사람이 성생활, 성적 욕망, 연애 상태에 관해 이야기해야 한다는, 이성애자에게는 하지 않는 기대로 이어진다. 섹스와 연애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 자체는 문제없지만, LGBTQIA+가 이성애자의 경우 요구받지 않는 성적 정체성의 세부 사항을 밝히라는 기대를 받게 되는 것은 문제다. LGBTQIA+의 커밍아웃을 기대하는 사회는 퀴어의 감정을 ‘타자화할’ 뿐 아니라, 이들이 준비되고 안전해지고 지지받기 전에, 때로는 자신조차 확신하기 전에 감정을 밝히라고 압박을 가한다. Z세대 중 자신을 오로지 이성애자로만 정체화하는 사람들의 비율이 66퍼센트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퀴어는 점점 사회의 변칙적 존재라는 이전 세대들의 관념으로부터 벗어나고 있다. (79~80쪽)
종종 “그러면 트랜스젠더라는 사실을 처음 깨달은 건 언제예요?”라는 질문을 받곤 한다. 하지만 유레카의 순간, 즉각 알아차릴 수 있는 자각의 순간은 존재하지 않았다. 사춘기가 되자 내 몸이 내게 맞지 않는다고 느꼈고, 내가 살면서 행한 모든 변화가 맹목적으로, 또 유기적으로 일어났다. 자신이 트랜스젠더라 사실을 깨닫는 결정적 순간을 겪은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보통은 아주 오랫동안 하나씩 떠오른 단서들이 전부 합쳐져서 같은 방향을 가리키는 식이다. 나는 그저 내게 가깝고 내가 자유로울 수 있는 방향을 향해 중력처럼 이끌렸을 뿐이다. (95쪽)
길거리 성희롱을 당할 때면 나는 이 사람들이 내가 트랜스젠더라는 사실을 알까 궁금하다. 만약 그 사실을 모른다면 밝혀졌을 때 굉장히 화를 내게 될 테니까. 그리고 트랜스 여성, 특히 많은 흑인 트랜스 여성들이 이런 식으로 살해당하는 결말을 맞는다. 외모가 점점 더 ‘여성적’이 되어가자 나조차도 성적 대상화와 인정을 혼동하기 시작했다. 성적 대상화는 내가 욕망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내가 마음에 든다는 의미였다. 그것은 내가 받고자 하는 인정의 부스러기에 불과했지만 그럼에도 여태까지 내게 주어진 것보다는 많았다. 페티시로 대상화되는 것이 마치 순수한 애정인 양 느껴졌다. 심지어 예전만큼 고통받지 않고도 세상을 헤쳐나갈 수 있게 된 지금까지도, 길거리에서 성희롱을 당할 때마다 나는 얼어붙어 버린다. 그리고 생각한다. 이 남자는 내가 트랜스라는 사실을 알면 태도가 달라질까? 자신이 트랜스 여성에게 매력을 느꼈다는 사실을 알고 어떤 반응을 보일까? 아니면 내가 트랜스라는 사실을 알고, 그 사실 때문에 나를 대상화하는 걸까? (139~140쪽)
아무도 여러분의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면, 여러분 스스로 그 이야기들을 찾아나서야 한다고 강조하고 싶다. 어딘가 존재하는 그 이야기를 찾는다면 여러분의 고립감이 훨씬 줄어들 거라 약속할 수 있다. 여러분이 처음부터 쭉 어딘가에 소속되어 있었음을, 애초부터 외부인이 아니었음을 깨달으면 더는 도망치지 않아도 된다. 우리의 인종주의 경험은 보편적인 것이기에, 때로 좀 더 부지런해지고 집중하는 것만으로도 드러낼 수 있다. 지식은 우리가 고립에서 빠져나와 공동체로 전환할 수 있게 해준다. 지식은 왜 어떤 일이 이런 식으로 일어나는지에 대한 맥락을 파악하고 진정한 변화를 불러오게 해준다. (218쪽)
내 삶의 운전석에 앉은 사람이 바로 나라는 걸, 운전대는 내 눈앞에 있으며, 양손으로 운전대를 움켜쥐고 무언가에 대한 반응이 아닌 나만의 의도를 품은 채로 원하는 곳으로 가는 데는 어느 누구의 허락도 필요없다는 걸 깨닫기까지 긴 시간이 걸렸다. (246쪽)
나는 나 자신과 더욱더 깊이 연결되어 지금의 나 자신이 누구인지, 내가 우리의 담론을 어떻게 앞으로 나아가게 할 수 있는지 알고 싶다. 내게는 충만하게 살고 싶은 의지가, 나 같은 여성이 무슨 일을 할 수 있는지 온 세상에 보여주고 싶은 의욕이 넘친다. 내가 가진 행동주의란 결국 내가 누구인지 깨닫고 내가 이루고 싶은 것들의 경계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분명한 게 있다면, 그건 모든 건 변한다는 것이다. 영영 변치 않는 사람은 없다. 어떤 방식으로건, 우리는 모두 트랜지션한다. (24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