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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책과 혁명에 관한 다섯 밤의 기록


  • ISBN-13
    978-89-544-5034-8 (03300)
  • 출판사 / 임프린트
    (주)자음과모음 / (주)자음과모음
  • 정가
    18,000 원 확정정가
  • 발행일
    2024-04-23
  • 출간상태
    출간
  • 저자
    사사키 아타루
  • 번역
    송태욱
  • 메인주제어
    사회, 문화: 일반
  • 추가주제어
    -
  • 키워드
    #사회, 문화: 일반
  • 도서유형
    종이책, 무선제본
  • 대상연령
    모든 연령, 성인 일반 단행본
  • 도서상세정보
    140 * 200 mm, 288 Page

책소개

★『중앙일보』 『동아일보』 『한겨레신문』 등 국내 다수 일간지 강력 추천★

★서평가, 평론가 ‘로쟈’ 이현우 추천★ 

★일본 최고의 서점 키노쿠니야 인문 대상 수상작★

 

일본 사상계에서 가장 주목받는 비평가이자 젊은 지식인 사사키 아타루. 그는 일본에서 대표적인 비평가로 자리 잡은 아사다 아키라, 아즈마 히로키의 뒤를 잇는 최고의 사상가로 인정받고 있다. 국내에 처음 소개된 사사키 아타루의 저서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은 출간되자마자 수많은 독자를 사로잡으며 단숨에 베스트셀러로 등극하였으며, 2012년 알라딘 ‘올해의 책’ 선정, 『중앙일보』 『동아일보』 『한겨레신문』 등 국내 다수 일간지 단독 추천 등 많은 주목을 받았다. 지금까지도 깊이 있는 인문서로 평가받고 있는 이 에세이가 혁명의 시작으로 들어가는 입구를 표현한 새로운 옷을 입고 재출간되었다. 첫 출간으로부터 10년이 지났지만, 사사키 아타루의 목소리는 여전히 이 사회에 유효한 파문을 일으킨다.

 

 

출판사 리뷰

 

★『중앙일보』『동아일보』 『한겨레신문』 등 국내 다수 일간지 강력 추천★

★서평가, 평론가 ‘로쟈’ 이현우 추천★ 

 

일본 최고의 지성이라 불리는 스타 철학자, 

사사키 아타루의 여전히 유효한 목소리

“읽고 쓰는 것, 그것이 곧 혁명이다!”

 

조용하지만 강렬한 한 문장, 파울 첼란의 시 ‘빛의 강박’에서 따온 이 책의 제목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은 니체의 유명한 선언 “신은 죽었다”를 떠오르게 한다. 저자는 책에서 루터의 종교개혁을 ‘대혁명’이라 부른다. 루터는 성서를 반복해 읽고 성서에 기록된 메시지와 현실 종교 사이에 큰 차이가 있음을 깨달았다. 물론 루터에게 책을 읽는 것은 기도와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기도하는 것에서 나아가 책을 읽고 깨달은 바를 실행해 세상을 바꿔야 한다는 마음이 강했다. 루터가 살았던 그때 “세계의 질서에는 아무런 근거가 없었”고, “그 질서는 완전히 썩어빠졌”기 때문이다.

부제 ‘책과 혁명에 관한 다섯 밤의 기록’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책은 저자가 자신의 책과 혁명에 관한 생각을 자유롭게 쓴 인문 에세이다. 읽기 쉬운 서간 형식으로, 동서양의 문화부터 역사, 철학 분석과 그만의 새로운 해석까지 상당히 깊고 다양한 내용과 분야를 다룬다.

저자에 따르면, 혁명이란 폭력이 아니다. 읽고 쓰는 것, 그 자체가 혁명이다. 문학의 종말과 책의 종말을 이야기하는 시대이지만, 이러한 논란은 수백 년 전에도 있었다. 인류가 멸망하지 않는 한 책은 사라지지 않는다. 과거에는 목숨을 걸고 책을 읽기도 했다. 그 시대, 종교개혁을 비롯해 시대를 바꾼 혁명은 앞서 이야기했듯 책에서 시작되었다. 그러므로 미래의 희망 역시 ‘책을 읽고 쓰는 데’ 있다. 지식과 깨달음이야말로 인간을 변화시키는 가장 큰 원동력이기 때문이다.

 

 

치열한 무력의 시대, 

압도적인 현실에 짓눌린 억압의 시대 

우리는 왜 책을 읽어야 하는가?

 

‘혁명으로서의 책 읽기’를 이야기하는 이 책은 이 시대에 왜 책을 읽어야 하는지를 역설하고 있다. 저자는 불합리하고 부당한 세상을 변화시켜달라고 두 손을 모아 신에게 기도하는 것보다, 그 손으로 책을 들어 읽고 또 읽고, 고쳐 읽고 다시 고쳐 쓰는 행위 자체가 더 가치 있고 아름다운 일이라고 주장한다.

저자에 따르면, 책을 읽는 행위가 위대한 이유는 그 자체가 혁명이고 또한 혁명을 가져왔기 때문이다.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저자는 마르틴 루터, 무함마드, 니체, 도스토옙스키, 프로이트, 라캉, 버지니아 울프 등의 소설가, 철학자 들의 독서 방식과 그에 따른 결과들을 예시로 들며 ‘책이 곧 혁명’임을 단호하게 주장한다.

그 주장을 잇기 위해 저자는 첫째 밤에서 문학의 범주를 글을 읽고 쓰는 일반적인 행동으로 넓힌다. 둘째, 셋째, 넷째 밤은 독서가 혁명이 되었던 사례를 위에서 나열한 철학자나 소설가 들의 이야기를 통해 깊이 있게 설명하고, 다섯째 밤에는 다시 문학이 죽었다느니, 문학의 종말이니 하는 엄살떨지 말고, 혁명의 근원으로서의 독서와 문학의 분발을 촉구하며 글을 마무리한다. 

매일이 불안한 경제 상황과 이리저리 흔들리는 정치권. 이러한 현실 속에서 우리는 그저 조용히 입을 다문 채 하루하루 정신없이 살아가고‘만’ 있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 정의란 무엇이고 어떻게 실현해야 하는지 고민할 여력이 없다. 그러나 정말 할 말이 없는가? 깊은 생각에 빠질 짧은 시간조차 없는가? 우리가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사사키 아타루의 말처럼 책을, 텍스트를 멀리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책을 읽는 사람이 많아질수록 우리 사회는 건강해진다. 이 책,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은 그 법리를 증명해주는 책이다.

 

 

지은이의 말

 

정말 사람들이 놀랄 정도로 저는 무지합니다. 당연히 알고 있어야 하는 것, 당연히 읽었어야 하는 것을 아무것도 모릅니다. 멋대로 프랑스어로 책을 읽고, 멋대로 쓰고, 멋대로 여기저기로 가져가고, 멋대로 여기저기에서 거절당하고, 어딘가에서 멋대로 받아주어 책을 냈을 뿐입니다. 완전한 무지, 완전한 어리석음 안에 있는 것이지요. 지금도.

우습다고 생각합니다. 저 역시도. 조금은. 너 바보야? 하고 술자리에서 친구가 대놓고 놀린 적도 있습니다. 그러나 텍스트라는 건 그렇게 마주 보는 것입니다. 그렇게 마주 볼 수밖에 없습니다. 읽는다는 것은 그런 일입니다.

목차

첫째 밤 문학의 승리

둘째 밤 루터, 문학자이기에 혁명가

셋째 밤 읽어라, 어머니인 문맹의 고아여 — 무함마드와 하디자의 혁명

넷째 밤 우리에게는 보인다 — 중세 해석자 혁명을 넘어

다섯째 밤 그리고 380만 년의 영원

 

발(跋)

옮긴이의 말

본문인용

사고하고 쓰는 행위에 도전하려고 할 때 저에게는 니체의 말이 잊히지 않았습니다. 그의 책을 읽었다기보다 읽고 말았습니다. 읽고 만 이상, 거기에 그렇게 쓰여 있는 이상, 그 한 행이 아무래도 옳다고밖에 생각되지 않은 이상, 그 문구가 하얀 표면에 반짝반짝 검게 빛나 보이고 만 이상, 그 말에 이끌려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 한 행의 검은 글자, 그 빛에.

_33~34쪽 

 

루터는 이상할 정도로 ― ‘이상해질 정도’로 ― 철저하게 성서를 읽고 또 읽었습니다. (……) 이 세계의 질서에는 아무런 근거도 없습니다. 게다가 그 질서는 완전히 썩어빠졌습니다. 다른 사람은 모두 이 질서를 따르고 있습니다. 이 세계는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에 따른 것이고, 따라서 이 세계의 질서는 옳고 거기에는 근거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루터를 제외하고. 교황이 있고 추기경이 있고 대주교가 있고 주교가 있고 수도원이 있고, 모두 따르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지만 아무리 읽어도 성서에는 그런 것이 쓰여 있지 않습니다.

_78~79쪽

 

우리가 이 대혁명에서 집중해야 하는 것은 혁명의 과정에서 폭력에 의해 권력을 탈취하는 것이 선행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텍스트를 읽고, 다시 읽고, 쓰고, 다시 쓰고, 번역하고, 천명하는 것. 그 과정에서 폭력적인 것이 나타나는 일은 있습니다. 저는 그것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혁명에서는 텍스트가 선행합니다. 혁명의 본질은 폭력이 아닙니다. 경제적 이익도 아니고 권력의 탈취도 아닙니다. 텍스트의 변혁이야말로 혁명의 본질입니다.

_104쪽

 

혁명은 문학으로부터만 일어나고, 문학을 잃어버린 순간 혁명은 죽습니다. 왜 우리는 이렇게 문학을 폄하하고 문학부를 대학에서 추방하려고 할까요? 왜 문학자 스스로가 문학을 이렇게까지 업신여길까요? 그것은 바로 문학이 혁명의 잠재력을 아직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_114쪽 

 

어떻게 된 일인지 우리는 책을 읽거나 써도 죽임을 당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죽임을 당하면 곤란하고 죽임을 당하지 않는 사회가 더 좋다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자명한 전제가 아닙니다. 읽고 쓰는 것 때문에 목숨을 걸지 않을 수 있었던 날들-그것은 역사상 실로 짧은 시간이었습니다. 우리의 나날, 우리의 장소가 다소라도 그런 자유를 주고 있다는 것은 실로 기적이라 부를 만합니다.

_128쪽 

 

문학이 끝났다, 순문학은 끝났다, 근대문학이 끝났다, 하는 이야기는 수백 년, 수십 년이나 반복해서 말해오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만은 새롭다고 생각하겠지요. 자기도 새로운 것을 말하고 있다고 생각하겠지요. 유감입니다. 그런 것은 이제 지긋지긋합니다. 괴테나 실러의 시대는 우리의 입장에서 보면 문학의 황금시대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조차 “문학은 끝났다”고 비관적인 말을 했습니다. 저는 좀 뭐랄까요― 짜증이 납니다.

_235쪽

 

읽는다는 것은 고쳐 읽는 것입니다. 즉 고쳐 쓰는 것, 쓰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기묘한 사태가 떠오릅니다. 읽는다는 것에서 '믿는다는 것'이 어디까지고, 읽는다는 것은 용해되어 간다는 것임을 몇 번이나 묘사했습니다. 책을 제대로 읽는다는 것은 읽고 있는 자신과 세계가 동시에 믿을 수 없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쓴다는 것에 대해서도 '신앙'은 사라집니다. 그 한 행을 믿지 않는다면 쓸 수 없습니다. 그러나 '쓰는 것'은 지우고 고쳐 쓴다는 것을 전제로 합니다. 그것을 지우고 고쳐 쓸 수 있다는 것은 믿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한 행을 쓸 때 자신은 그것을 정말 믿는 것일까요? 한 행을 지울 때 자신은 그것이 정말로 믿을 수 없는 것일까요? 믿지 않는다면 고쳐 쓸 수 없지만, 고쳐 쓸 수 있다는 것은 믿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신信과 불신의 이분법은 다 같이 완전히 사라집니다.

_236쪽

 

통계는 통계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380만 년을 산다는 건 보장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백 보 양보하여, 그렇네요. 379만 년 양보한다고 해도 앞으로 1만 년은 남은 셈이네요. (……)

그렇다면 그 1만 년간 우리의 루터, 무함마드, 하디자, 아우구스티누스, 테레지아, 도스토옙스키, 조이스, 베케트, 버지니아 울프, 그(녀)들 같은 사람들이 두 번 다시 나타나지 않는다고 생각할 이유가 있을까요? 어차피 1만 년이나 있으니까 예수도 부처도 다시 올지도 모릅니다. 아니, 부처는 두 번 다시 환생하지 않는다고 말했고, 진짜 예수가 온다면 세상은 끝나버리니까 좀 곤란하지만, 그들 정도의 사람이 나타날지도 모르는 일이겠지요. 그러므로 이렇게 됩니다―변혁은 이루어질 것입니다. 언젠가. 반드시.

_266쪽 

서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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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소개

저자 : 사사키 아타루
작가이자 철학자로 1973년 일본 아오모리에서 태어났다. 도쿄대학 문학부 사상문화학과를 졸업했고, 도쿄대학 대학원 인문사회 연구계 기초문화연구과 종교학一종교사학 전문 분야 박사학위를 받았다(문학박사).
호세이대학 비상근 강사를 거쳐 현재는 교토세이카대학 인문학부 준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주요 비평서로는 『야전과 영원一푸코, 라캉, 르장드르』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제자리걸음을 멈추고』『바스러진 대지에 하나의 장소를』 『이 치열한 무력을』 『춤춰라 우리의 밤을 그리고 이 세계에 오는 아침을 맞이하라』 『같음: 강의 모음집 2009~2014同: selected lectures 2009~2014』 『전쟁과 한 명의 작가一사카구치 안고론戰爭と一人の作家―坂口安吾論』 등이 있고, 소설로는 『여름 석 달 전야九夏前夜』 『행복했을 적에 그랬던 것처럼しあわせだったころしたように』 『아키코 너의 문제들』 『밤을 빨아들여서 밤보다 어두운夜を吸って夜より昏い』 『남루를 끌다らんる曳く』 『짧은 밤샘短夜明かし』 『신성한 곳神柰備』 등이 있다.
번역 : 송태욱
연세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했고 동 대학원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도쿄외국어대학 연구원을 지냈고, 현재 연세대학교에서 강의하며 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 마쓰이에 마사시의 『우리는 모두 집으로 돌아간다』 미야모토 데루의 『환상의 빛』 『금수』 시오노 나나미의 『십자군 이야기』를 비롯해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도련님』 『마음』 등 나쓰메 소세키 전집을 우리말로 옮겼으며, 지은 책으로 『르네상스인 김승옥』(공저)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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