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대혁명은 그 자체로 위대한 혁명은 아니었다. (12쪽)
중국이 향후 수십 년간 눈부신 경제성장을 이룰 수 있는 발판이 되었다. (16쪽)
많은 사람들이 청 왕조의 몰락은 1905년 과거시험의 폐지로 예고되었다고 입을 모은다. (17쪽)
중국의 혁명정치는 근대화를 추구했을 뿐만 아니라 민족주의적이었다. (18쪽)
예술은 정치에 이바지하기 위한 것이었다. (20쪽)
질병과 영양실조로 인해 1960년에서 1961년에는 약 2,000만 명에서 3,000만 명이 사망했다. 이는 20세기 최대 기근이었다. (22쪽)
펑더화이 원수의 숙청은 마오쩌둥에 대한 당의 개인숭배가 얼마나 견고하게 구축되었는지, 마오쩌둥을 통제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다시 한번 상기시켜주었다. (23쪽)
마오쩌둥이 1966년 문화대혁명을 점화하기 위해 새롭게 추가한 것은 종전까지는 중국 정치에서 적극적인 역할을 하지 못했던 집단들의 대중 동원이었다. (30쪽)
문화대혁명의 마지막 몇 년은 병든 마오쩌둥의 궁정에서 자리다툼을 벌이는 중앙의 파벌투쟁으로 얼룩졌다. (38쪽)
문화대혁명의 정치는 의식적인 연극성이 강했다. (53쪽)
한때 문화대혁명의 열광적이었던 지지자들은 훗날 자신들이 정신을 차리게 된 시점을 린뱌오 사건 때로 꼽는다. (58쪽)
홍위병의 대표적인 도구 중 하나는 공공장소 벽에 붙이는 포스터 크기의 정치적 문장인 ‘대자보’였다. (68쪽)
국가경제위원회 주임이자 부총리였던 보이보(薄一波)는 100번이나 투쟁 회의에 끌려다녀야 했다. 그의 아내는 그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70쪽)
문화대혁명의 가장 큰 폭력은 홍위병의 만행이 아니라 자발적인 대중조직에 대한 마오쩌둥주의자들의 탄압에서 나타났다. (75쪽)
“내가 한 모든 일은 마오쩌둥 주석이 시킨 것이다. 나는 그의 개였다. 그가 물라고 하면 물었다.”(80쪽)
젊은 반군들이 파괴한 국보급 문화재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지만 족보, 그림, 서적, 녹음 기록, 종교적 성상(聖像) 등 많은 개인적인 물품들도 영원히 사라졌다. (86쪽)
문화대혁명의 예술은 지나치게 금욕적이어서 유희적인 감각을 전달하기 어려웠다. (100쪽)
문화대혁명은 문맹률을 낮추기 위해 한자를 표준화하고 간소화하는 언어 개혁을 계속 추진했다. (103쪽)
문화대혁명은 “여성이 하늘의 절반을 떠받친다〔婦女能頂半邊天〕”고 주장하며, 전통적인 성차별적 고용 장벽에 맞서 싸웠다. (143쪽)
마오쩌둥주의의 발전이 없었다면 덩샤오핑의 ‘기적’은 없었을 것이다. (149쪽)
마오쩌둥 열풍은 1960년대 서구의 대중문화가 품은 향수, 즉 야생적인 색채, 풍성한 머리, 정신적 탐구, 엉뚱한 신념 등은 유사하지만 인종주의, 빈곤 혹은 제국주의 전쟁에 맞섰던 (오늘날 보면 어색한) 투쟁들은 빠져 있다. (197쪽)
지난 30년간 중국은 번영했지만 사회분열, 환경 재앙, 빈부격차 심화, 불균등한 경제발전, 종족 갈등, 그리고 중국의 사회구조가 큰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는 만연한 믿음 등 각종 문제들을 초래했다. (207쪽)
문화대혁명 세대는 오늘날 정치뿐 아니라 비즈니스, 문화, 군대 등 다양한 분야에서 중국을 이끌고 있다. (208쪽)
저자는 권력을 추구하는 인간 군상들, 속물적 상승 욕구, 우스꽝스러운 혁명 의례와 교조를 신랄하게 묘사하면서도 문화대혁명을 긴 호흡의 중국 혁명 속에 위치 시킨다. 개혁개방과는 단절이 아닌 계승의 관계를 강조한다. 또한 저자의 연구 분야를 살려 문화대혁명 시기의 예술과 표기(標記), 미학에 관한 서술이 정교하고 상세하다. (247-2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