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집의 표제작 「유대인 극장」은 작가 레지던스 프로그램으로 폴란드 바르샤바에 머물고 있는 화자 ‘나’가 그곳에서 관람하는 연극의 제목이기도 하다. 유대인의 골렘 신화에 기반한 홀로코스트 실험극이라는 최소한의 사전 정보만 가지고 보게 된 연극은 ‘나’를 충격과 혼란에 빠트리고 망각 속에 묻어둔 어두운 개인적 기억의 뿌리를 건드린다. 딱히 이 연극이 아니더라도 나치의 유대인 학살이 대규모로 자행된 폴란드 땅은 ‘나’에게 고통스러운 역사의 화석층을 곳곳에서 드러내고 있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추모의 분위기만 있는 게 아니라, 극우단체의 유대인 혐오 시위나 혐오 발언 또한 끊이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심지어 ‘나’는 동양인으로서 ‘인종 혐오’를 직접 겪기도 한다. 길에서 우연히 마주친 한 폴란드 할머니가 ‘나’를 향해 급습하듯 내보인 ‘혐오’란 도대체 어디에서 연원한 것일까. 아마도 여기에는 하나의 가지런한 설명으로 환원되지 않는 복합적이고 중층적인 역사와 정치의 질곡, 타자에 대한 억압과 배제, 원한에 갇힌 폭력의 시간 등등 숱한 이유가 얽히고설킨 채 자리 잡고 있을 것이다. 어쨌든 그것은 낯선 도시에 잠깐 머무는 방문객으로서는 도저히 그 뿌리를 헤아릴 수 없는 압도적인 무정형의 공포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소설 「유대인 극장」은 갑자기 바르샤바를 찾아온 언니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와중에 ‘나’가 그날 이후 계속 이 공포와 무력감을 곱씹어왔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무대와 객석의 구분 없이 실험극 형태로 진행되는 연극 ‘유대인 극장’의 난해하고 종잡을 수 없는 전개 한편에서 유독 ‘나’의 눈길을 사로잡은 존재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하얀 방제복을 입고 사람들의 귀에 뭔가를 속삭이며 돌아다닌다.
속삭임을 들은 이들이 마치 감염이라도 된 듯 방제복을 입은 이들과 똑같은 짓을 하는 모습은 내게 혐오 발언을 했던 폴란드 할머니를 떠올리게 했다. 뱀의 혀처럼 날름거리는 그들의 혀에서 독기가 뿜어져 나오는 것 같았다.(38쪽)
‘하얀 방제복’을 입은 존재들은 혐오를 조장하고 퍼뜨리는 데서 이익을 구하는 세력이 있다는 점을 분명히 드러낸다. 혐오의 뿌리가 복합적이고 중층적인 역사적 맥락을 갖고 있다는 사실과 혐오를 불가지의 어둠 속에 놓아두는 것은 구분되어야 한다. 후자는 자칫 혐오를 자연화하면서 혐오와의 싸움을 마치 절대악과의 투쟁처럼 추상화하고 관념화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점은 『가마우지는 왜 바다로 갔을까』(2015), 『밤이여 오라』(2021)의 두 근작 장편에서 작가 이성아가 힘주어 밝히고 있는 폭넓고 강렬한 문학적 진실이기도 하다. 대한민국 정부의 무관심 속에 일본과 북한 모두에서 버림받고 배제된 북송 재일교포의 이야기를 풀어낸 『가마우지는 왜 바다로 갔을까』는 단단하고 밀도 높은 리얼리즘으로 경계인들이 겪은 처절하고 고통스러운 수난을 정밀하게 복원하는 가운데 읽는 이로 하여금 끊임없이 국가권력의 존재 이유를 되묻게 한다. 인종청소의 참혹한 내전이 벌어졌던 발칸반도의 이야기를 배경 서사로 하면서 조작된 유학생 간첩단 사건에 연루된 인물의 화해를 향한 힘든 여정을 제주 4·3의 아픈 가족사에까지 연결시킨 역작 『밤이여 오라』 역시 문제를 역사의 폭력이나 횡포와 같은 추상적 차원에 놓으려 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 이야기에서 제주와 마르부르크, 자그레브와 서울을 넘나들며 이름 없는 개인들의 삶을 짓밟고 파괴하는 독단적인 국가권력의 폭력들을 계속해서 의식하게 된다. 말하자면 혐오의 피해든, 개인적 삶의 파괴든 이성아 소설은 그 배제와 억압, 죽임의 역사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하얀 방제복’으로 표상되는 폭력의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좌표를 망각해서는 안 된다고 말해왔다. 물론 이 좌표의 선명함은 피해/가해 구도의 도식적 이분법과는 거리가 멀다. ‘하얀 방제복’의 속삭임에 감염될 가능성은 누구에게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얀 방제복’의 자리 역시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움직이는 역사 현실 속에서나 우리 각자의 일상에서 끊임없이 재발견되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번 소설집에는 ‘탈북자’를 다룬 소설이 여러 편 수록되어 있다. 「천국의 난민」, 「그림자 그리기」, 「리영광 씨가 오늘도 걷는 까닭은」, 「삼합닭곰집에서」가 그러한데, 근작 장편인 『가마우지는 왜 바다로 갔을까』와 『밤이여 오라』에서도 집중적으로 그려진 것처럼 한국 현대사 속 경계인들의 삶은 이즈음 작가의 주된 문학적 관심사인 듯하다. 편편의 면모는 다양한데, 사회로부터 이중 삼중으로 배제된 채 폭력적 현실에 거의 무방비로 노출된 경계인들의 아픔을 작가는 여러 각도에서 촘촘하게 조망하고 있다. 그중 「리영광 씨가 오늘도 걷는 까닭은」은 대학 시절 조작된 재일교포 유학생 간첩 사건에 연루된 소설 화자의 어두운 기억을 주조음으로 하면서도, 1967년 군인 신분으로 ‘기적적’으로 군사분계선을 넘어온 리영광이라는 인물의 독특한 경계 넘기와 이후의 개성적 삶을 ‘탈북자’라는 고착된 얼굴 너머에서 이해하게 만든다. 그런가 하면 「그림자 그리기」는 탈북자와 관련된 현재의 이야기에서 가장 어둡고 참혹한 현실에 소설의 시선을 드리운다. 중국과 한국에서 탈북자 모자가 겪어야 했던 참상은 아들인 소년의 ‘미술 치료’ 과정을 배경으로 하나하나 모습을 드러내는데, 소년의 생부인 중국인 아버지와 그 가족, 계부 격인 한국인 아버지가 저지르는 전방위의 폭력은 경제적 착취를 이유로 어머니의 처참한 죽음 이후에도 잔혹하게 이어질 태세다. 「삼합닭곰집에서」는 탈북자 문제가 분단체제의 모순과 얽혀 있는 지점을 복합적으로 탐사하는 가운데 여성 혐오와 손을 맞잡은 남성 가부장제의 위선과 폭력이 철 지난 수구 보수 이데올로기의 또 다른 얼굴이기도 하다는 것을 날카롭게 해부한다. 한편 「천국의 난민」은 1960년대 재일교포 북송사업까지 거슬러 올라 한반도를 둘러싼 경계인들이 겪고 있는 수난을 그려낸 작품으로, 역사적 시간의 정밀한 복원을 넘어 이성아 소설이 도달한 인간 이해의 깊이와 폭을 음미하게 한다. 서사의 한복판에 놓여 있는 오인(誤認)의 모티브는 인물이 겪어온 원한과 상처의 세월을 아이러니하게 가리키면서 소설의 세련된 기품을 지지하게 해준다.
굴곡진 현대사를 배경으로 한 난민, 경계인의 이야기이든 혐오의 뿌리를 자신의 안팎에서 함께 질문하려는 인물의 이야기이든 이성아 소설은 그 인물들과 우리가 연결되어 있으며, 그들의 문제가 우리 삶의 역사와 현재를 이룬다는 사실을 차분하게 설득한다. 마음과 마음의 파편적 단절과 고립에 훨씬 더 많이 익숙한 세상에서 이 같은 진득하고 끈질긴 연결의 시야는 한층 귀하게 다가온다. 그런데 코로나 팬데믹의 재난을 배경으로 한 「스와니강」을 읽으면, 인간과 인간을 잇고, 마음과 마음의 접점을 모색하는 연결의 상상력이 이성아 소설의 근원에 있다는 사실을 새삼 감동적으로 확인하게 된다.
작가가 이번 소설집에서 1960년대 북송 재일교포, 어제와 오늘의 탈북자들을 비롯 코로나와 현실의 어두운 그늘에서 찾아낸 이야기들은 바로 이 연결의 상상력, 그들이 곧 ‘나’이고 ‘우리’라는 간절한 마음의 지평에서 가능했을 것이다. 이성아 소설은 역사와 시간의 망각 속에 내던져지고, 세상의 어둠 속에 묻혀 있는 존재들을 불러내어 그들과 우리를 잇고, 그들과 우리가 함께 있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환기한다. 동시에 이성아 소설은 그 연결을 좌절시키는 현실의 폭력적 힘과 고립된 개인의 무력함을 잊지 않는다. 「유대인 극장」의 자매가 서로에게 준 상처는 쉽게 봉합되지 않을 것이고, 「베이비시터」에서 비열한 가부장 남편의 폭력에 시달려온 오십대 여성 우희와 그녀가 돌보는 자폐아 기우 사이에는 세상의 잔인한 ‘먹이사슬’이 놓여 있을 가능성이 높다. 우희의 두 눈이 멀어버리는 이 작품의 결말에는 손쉬운 연민과 감상을 끊는 차가운 단호함이 있다. 세상의 비참과 잔혹에도 불구하고 연결을 상상하는 이성아의 견고한 리얼리즘이 깊고 실다운 온기를 품고 있다면 그래서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