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 29
그렇다면 인류 문명의 파국을 초래한 그 잘못된 길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모든 학문이 수학에 기초하여 자연과학의 방법을 따라야만 한다고 강제하는 자연주의(naturalism)다. 학문
에 다양한 종류가 있는 것은, 각각의 학문이 탐구하는 사태가 다양하기 때문이다.
p. 63
그저 자연물에 불과한 꽃에서 돌연 아름다움의 가치와 사랑의 의미가 출현하는 것처럼, 인간은 지극히 세속적인 삶에서 문득 성스러움을 체험할 때가 있다.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우리가 명료한 의식을 통해서든 암묵적인 무의식을 통해서든 ‘비종교적 태도’에서 ‘종교적 태도’로의 전환, 다시 말해 일상적인 ‘속의 관점’에서 종교적 가치를 추구하는 ‘성의 관점’으로 관점을 선회하는 현상학적 태도변경을 수행했기 때문이다.
p. 80-81
이처럼 역사적·문화적·개인적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모든 종교적 체험에는 일정한 형태를 띠고 반복적으로 드러나는 본질로서의 보편적 구조가 존재하는데, 그것은 바로 성과 속의 존재론적 구분이다. 성과 속의 대립은 인간의 삶에서 하나로 통일되어 있다.
p. 86
그런데 흰 종이에서 갑자기 질적 특이점 하나가 출현하는 상황을 생각해 보자. 흰 바탕 위에서 갑자기 특이점 하나가 돌출하면, 그것이 출현한 위치가 하얀 평면상에서 일종의 기준이 되고 중심이 된다. 그리고 기준이 되는 중심점이 출현하는 순간 방금 전까지 그저 점들이 흩어져 있던 흰 종이의 평면은 ‘중심’과 ‘주변’이라는 차별적 의미를 지닌 ‘구조’로 재편된다. 중심점을 기준으로 한 동심원의 구조는 이를 잘 보여 준다.
p. 118
아무리 탈신성화되어 가는 현대 문명이라 하더라도 문자 그대로의 의미에서 완전히 탈신성화된 공간은 결코 존재할 수 없다. 비록 사원과 같이 전적으로 종교적 의미로 충만한 건축물에서 이루어지는 성스러운 체험이 아니라 하더라도, 인간은 세속의 일상적 공간에서조차 여전히 그 나름의 성과 속의 구조를 전제하면서 살아간다. 이것은 신에 의한 우주 창조를 모방하고 재현하려는 인간의 본성에 기인한다.
p. 150
그러나 엘리아데의 관점을 적용해 본다면, 이 공동체가 축제 기간에 행하는 괴기스러운 전통 풍습은 현실과 일상을 초월하여 성스러움을 회복하려는, 그렇게 함으로써 우주의 운행 주기에 따라 묵은 세계에 종말을 고하고 새로운 세계의 시작을 알리려는 종교 상징으로 이해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호르가 공동체에게 하지는, 그저 달력에서 매년 돌아오는 1년 365일 중의 하루가 아니라, 신을 경배하며 우주와 하나가 되는 성스러운 시간인 것이다.
p. 196
일상 세계를 살아가는 인간의 삶은 두 개의 차원에 걸쳐 있다. 하나는 생존으로서의 자연적 인간의 삶이며, 또 하나는 성스러운 의미로 신성화된 인간의 삶이다. 앞에서 공간·시간·자연을 고찰하면서 살펴보았지만, 종교적 인간이 일상에서 행하는 성행위·식사·노동·놀이 등의 삶의 경험은 본성상 전자를 넘어서는 후자의 측면을 가지고 있다. 반면 비종교적 인간은 종교적 본성을 지닌 인간 본연의 행위에서 성스러운 의미를 박탈한 채, 오직 전자의 관점에서만 인간을 이해한다.
p. 223
이렇게 뻔한 이야기를 하는 것은, 결국 부모로서 아이를 낳아 기른다는 행위가 단순히 생물학적 개체로서의 인간을 생산하는 것과 완전히 차원이 다르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아이를 낳아 기르는 것은 또 하나의 의미 세계를 창조하는 일이고, 아이의 삶을 매개 또는 연결고리로 하여 인류의 공동체적 삶의 세계를 재생산하는 데에 참여하는 일이다. 엘리아데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것은 신에 의한 우주 창조에 비견되는 것으로, 아이를 낳아 부모가 되고 아이를 기르며 부모 노릇을 하는 것은 성스러움으로 가득한 신성한 일인 것이다.
p. 250
엘리아데의 『성과 속』은 인간이란 존재가 무엇이며 또 어떠한 삶의 태도를 가지고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해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세속에서 일상적 삶을 살아가는 지극히 범속한 인간이라 할지라도, 그가 인간 존재의 내적 본성인 종교성을 상실하지 않았다면, 그는 일상에서 체험하는 모든 사물에서 성스러운 의미를 발견할 것이며, 그가 일상적으로 행하는 모든 행위에 성스러운 가치를 부여할 것이다. 세계에서 이러한 의미를 발견하지 못하고 자신의 행위에 아무런 가치도 부여하지 못하는 사람은 그저 감각적으로 경험하는 눈앞의 현실에만 모든 관심이 매몰된 채, 자신이 초월적인 차원을 동경하며 거기에서 진정한 의미를 발견하기를 추구하는 성스러운 존재임을 망각하는 무지를 드러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