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속으로〉
당신이 오기 전엔 몰랐죠
얼마나 아찔한가요 이 세상
벽장 속 피카츄가 내내 콧구멍을 벌름거리고
방 앞을 지키고 선 악어는 호시탐탐 눈을 부라려요
서랍숲에는 줄지어 선 펠리칸들이 부리를 벌리고
모서리 괴물은 도처에 지뢰처럼 깔려있죠
그뿐인가요, 소파 옆 헬리콥터, 부엌엔 증기기관차
어 그건 코끼리코가 아니에요 잡아당기지 말아요
당신의 능력을 믿어요
두 손을 얼굴에 대는 순간 투명인간으로 변신
돌처럼 굳어있던 것들도 한 글자면 같이 뛰어놀지요
손 닿는 곳 어디든 꽃밭으로 만들 수 있고
발가락 끝은 낭떠러지, 이마가 부딪히면 암벽이 솟아올라요
당신의 미소는 세상 강력한 무장해제 주문
그 주문에 걸리고부터
눈앞엔 완전히 다른 풍경이 펼쳐졌어요
난 당신의 사이드킥
우글거리는 악의 무리에 맞서
당신의 손을 잡고
달려나갈 준비가 되어있어요
그러니까
이제 그만 우리
힘을 합쳐
고약한 세균맨을 무찌르러
함께
출동해볼까요?
- 「출동 다이뻐맨」 전문
어린 날 누나의 서랍 속 돋보기는 둘도 없는 내 친구였다
뭐니뭐니 해도 재미로는 불장난만한 것이 없다
갖은 벌레들을 잡아다가 들여다보다가
끝내는 제물로 삼곤 했던 것인데
어른이 되었다. 이제는 많은 것들을 숨겨야 하는 나이
앞날에 별 도움 되지 않는 사소한 것들과 함께
내 소중한 친구도 바지춤 깊숙이 찔러 넣어졌고
혼자 앉은 밤이면 아무도 모르게
다시 그 옛날의 친구를 꺼내어 반가운 인사를 하곤 했던 것이다
손에 잡히는 벌레 따위 없다, 이제 중요한 건
자꾸만 어른거리는 그대를 들여다보는 일
태워서 조그만 구멍을 내는 일
거기에다 나의 구멍을 맞대어 보는 일
하얀 종이 위로 그대가 누워 있다
불안한 시선으로 나를 바라본다, 바들
바들, 입맛을 다신다, 순간
뒤통수를 덮치는 따가운 느낌
나를 겨눈 손가락들이
마침내 벌려지고 있었다
- 「터치」 전문
기막힌 일이지
당연한 듯이 다들 벽에 들러붙어
엄연한 한 장의 창문으로
스쳐가는 풍경의 한 조각을 낚아 채
제각기 네모난 틀 속에 들이붓고 있다는 게
어느 밤 사이에 망치와 드릴을 휘둘러
태초의 정물인 듯 뽐내고 서 있게 된 건지
그동안 어째서 나는 자고 있었으며
(엄마 왜 안깨웠냐고)
눈 뜨자 낯설어진 이 회랑에
비집고 들어갈 틈이 아직 남아있긴 한 건지
나의 안녕은
누군가의 땀 위에 세워진 비석이라고
땀 흘리지 않는 내 곁에서
어떻게들, 안녕하십니까
안녕하지 못한 저는
안경하렵니다
- 「내 마음에 렌즈를 깔고」 부분
네가 모자랐나보다
솔직히 말해서, 아무렇지도 않다
이거 봐, 이렇게
입 쩍 벌리고, 네 이름 부르려던 거 아니고
손까지 가리고 두드리면서, 튀어나온 소리 막은 거 아니고
남은 팔 뻗어 만세 부르며, 목멘 거 아니고 맬 것도 아니고
눈도 흠씬 비비고 있잖아, 거 아니라니까 참
내가 모자랐나보다, 어쩜
아직도 난, 이렇게
하픔,
- 「하품」 전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