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만난 사람들은 중도 탈락자가 아니다. 그러나 개척자라고 하기도 아직은 어렵다. 단순 이분법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 그저 자신의 욕구에 비교적 더 집중한, 조금은 용기 있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자신의 내부 세계와 외부 세계를 세밀하게 관찰한 명민한 사람들이었다. 홧김에 때려치운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모두가 진지했고, 자신만의 이야기가 있었다.
― 008쪽
2023년 7월 18일, 서울 서초구의 서이초등학교에서 20대 여성 교사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교사들의 극단 선택 소식이 연이어 나오고, 교사들이 거리로 나와 ‘교권 침해’ 문제를 거듭 수면 위로 떠올렸다. 우리가 취재하던 간호사와 유치원·어린이집 교사들 사이에서는 간호법 제정안 폐기 사태, 유보통합(영유아 교육·보육 통합) 국면에서 정작 당사자들의 목소리가 소외된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었다. ‘직때녀’뿐 아니라, 현장에 남아 있는 여자들의 목소리도 함께 들어야겠다는 판단이 섰다. 여전히 그 자리에 버티고 선 여자들의 노동을 바꾸려는 노력을, 이들 여초 직업군에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문제점과 해법을 구조적으로 짚어야 했다.
본문 중에서

― 012~013쪽
교대생이라는 동은의 신분은 시간 대비 고소득의 수입을 올릴 수 있는 과외 알바의 배경이 되는 장치이며 안정적인 직업의 대명사다. 동은의 양육을 포기한 친모가 동은이 교사가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놀라는 반응은, ‘선생’이 보통 노력이 아니면 얻기 힘든 직업으로 여겨지기 때문일 거다.
― 031쪽
부모님은 무조건 빨리 졸업할 수 있는 2년제 대학에 가라고 ‘푸시’했다. 집에서 벗어나고 싶어서 부산에 있는 대학에 1년 장학금을 받는 조건으로 합격했지만, 생활비가 많이 들 것을 염려한 부모님은 가지 못하게 했다. “너무 스트레스를 받아서 합격 통지서를 내 손으로 막 찢으면서 울었던 기억이 나.” 결국 수능 가나다군 지원이 다 끝나고 2차 지원을 통해 집에서 버스로 20분 거리의 전문대 아동청소년복지과에 진학했다. “거기를 졸업하면 보육교사 2급 자격증이 나온다 하더라고.” 고등학교 야간자율학습 시간 내내 라디오를 들으며 라디오 작가의 꿈을 키우던 수정이었지만, 그런 건 고려 대상이 되지 않았다.
- 57~58쪽
사직 서류가 처리되고 ‘저 이제 다음 달부터 출근 안 해요’라고 전하고 동료 선생님들이 ‘그래, 자기라도 빨리 떠나’라고 뒷말을 씁쓸하게 흐릴 때 나는 들었다. ‘여긴 희망이 없어’ 콕 찝어 말할 수는 없지만, 분명한 것은 직업을 선택할 때의 기대와 현재의 나의 상황이 많이 뒤틀려 있었다는 것이다.
- 96쪽
방송작가는 여성 비율만 94.6%18에 달하는 ‘여초의 세계’다. 방송 현장에서 작가는 가족 구성원처럼 젠더화된 역할을 수행해야 했다. 한별의 분석에 전직 방송작가인 승희, 현제도 일정 부
분 공감했다. 시사·교양 프로그램 작가로 9년을 일했던 승희는 “PD랑 작가 관계는 약간 가부장적인 수직적 요소가 있는 거 같긴 해. 일단 대부분 PD는 정규직이기도 하고 작가는 비정규직이니까 그런 데서 오는 위계도 다르고, 일 생기면 일단 작가가 먼저 나서서 마사지 같은 걸 좀 해야 해. 집에서 엄마가 자질구레한 일 도맡듯이. 하다못해 출연자가 ‘펜 없어요?’ 하면 제일 먼저 찾아다 줘야 하고.” 승희는 연예인 패널의 입맛에 맞는 도시락을 찾느라 동분서주했던 막내 작가 시절을 떠올리며 “심부름하는 막내딸 맞네”라고 말했다.
- 099~100쪽
‘엄마 역할’의 다른 말은 ‘감정 쓰레기통’이라고, 우리가 만난 여러 여초 직업 종사자들은 증언했다. 집에서 엄마가 이유 없이 짜증을 부려도 되는, 감정적 샌드백 역할을 하는 것처럼. 반대로 아빠에게는 그러지 않는 것처럼. 남자 고등학교의 수학교사였던 도도는 학생들이 자신에게 거는 그런 기대가 고통이었다. “많은 여성 교사들이 느끼는 것 중에 하나가 선생님을 ‘엄마’처럼 대하는 거 있잖아요. 그러니까 학생들 입장에서 ‘교사에게 좀 짜증은 내도 되지만 대화는 하고 싶지 않다…
- 101쪽
간호사와 유치원·어린이집 교사들의 공통점 하나. 사람의 생명을 다루고 성장을 돌보는, 공공성이 높은 직업들이다. 그러나 최소 인원을 투입해 최대 효율을 내는 자본주의적 생산 양식에 입각해 쉽게 ‘착즙되는’ 직업들이기도 하다. 이들 직군이 말하는 처우 개선 해법이 똑같은 까닭이 여기에 있다. 간호사는 1인당 환자 수를 줄이고, 교사는 1인당 학생 수를 줄여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 159~160쪽
학교나 병원 같은 ‘여초’ 직장들, 여성들이 많이 속한 요양이나 돌봄 쪽 비정규직 직장 구성원들의 노조 편입이 늘며 생겨난 추세다. 기존에 노조가 없던 이들 작업장들을 대상으로 양대 노총이 조직력을 발휘한 결과이기도 하다.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 ‘일하는 여성’으로서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차별받고 있다는 자각이 직종을 넘어선 연대를 강화하기도 했다. 2022년, 양대 노총을 포함한 6개 단체는 ‘여성노동연대회의’를 출범시켰다.
- 167쪽
서이초 사건이 ‘학부모 혐의 없음으로 종결’되는 것을 바라봤다. 이제는 언론에서 다루어지기 어려울 영원히 퇴근하지 못한 서이초 선생님의 그 이야기가, 우리가 만난 인터뷰이들의 목소리와 함께 다시 재생되고 상기되었으면 좋겠다.
- 26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