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과의 영적교감, 그 시적 형상화
- 시목 김성구의 시세계
유 승 우(시인, 인천대학교 명예교수) 유승우(본명-유윤식 호-한숲)‘현대문학’지로 등단(1966년, 박목월 추천). 1939년 강원도 춘성산. 가평 초, 중, 고 졸업. 경희대학교국문과 졸. 한양대학교 대학원 졸-문학박사. 인천대학교 교수 역임. 인천시민대학 학장 역임. 인천대학교 명예교수(현). 소사제일교회 명예장로(현) 사)한국현대시인협회 이사장 역임. 사)한국기독교문인협회 이사장 역임. 사)한국문인협회 자문위원(현). 사)국제펜한국본부 고문(현). 수상-경희문학상(1988). 후광문학상(1994). 한국기독교문화예술대상(2003). 창조문예문학상(2011). 심연수문학상(2011). 상록수문예대상(2019). 시집-바람변주곡(1975). 나비야 나비야(1979). 그리움 반짝이는 등불 하나 켜 들고(1983). 달빛연구(1993). 물에는 뼈가 없습니다(2010). 숲의나라, 노래와 춤(2019) 등 11권. 저서-한글시론(1983). 몸의 시학(2005) 등 5권. 자서전 『시인 유승우』 출간(2014).
1. 들어가는 말
문학에서 서정시를 ‘신과의 대화’ 곧 신통(神通)이라고 정의한다. ‘신과의 대화’를 하려면 먼저 마음의 문이 열려야 한다. 그래야 남은 못 보는 것을 보고, 남은 못 듣는 것을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남은 못 보는 것을 나만이 보고 형상화한 것이 시각적 이미지이며, 남은 못 듣는 것을 나만이 듣고 형상화한 것이 청각적 이미지이다. 후각적 이미지, 미각적 이미지, 촉각적 이미지도 마찬가지다. 마음의 문이 열려야 가능한 영적 교감(交感)의 형상화가 시적이미지이다. 서정시를 ‘신과의 대화’라고 정의하는 것은 바로 이 영적 교감을 말하는 것이며, 이를 가리켜 서정시는 영감(靈感)으로 쓰는 것이라고 한다. 시인으로서 갖추어야 할 첫째 조건이 바로 이 마음의 문 열기이다.
요한복음 1장 1절에는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라고 했다. 그리고 창세기 2장 7절에는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라고 했다. 이것은 흙으로 빚은 육신에 하나님이 생기를 불어넣으시어 생령이 되는 과정이다. 생령(生靈)이란 살아있는 영혼이란 뜻이다. 육신만 살아 있으면 동물이고, 이 동물이 사람이 되려면 하나님이 생기를 불어넣으시어 생령이 되어야 한다. 이 생령이 곧 인간의 원형(原型-Archetype)이다. 그런데 사람은 이 원형을 상실했다. 그래서 실존철학에서는 인간존재를 없음 곧 무(無)라고 정의한다. 이 없음에서 있음이 되고자 하는 그리움이 존재에 대한 향수이며, 시를 향한 원동력이다.
시는 언어예술이다. 예술(藝術)의 예(藝) 자는 “사람이 나무를 심는 모습을 상형한 글자”라고 한다. 사람은 왜 나무를 심는가. 열매를 거두기 위해서다. 여기서 “열매는 나무에 맺힌 결실이고, 시는 사람이 지은 열매이다”라는 은유가 성립된다. 그렇다면 예술(藝術)은 나무에 맺힌 열매처럼 자연스러운 예술작품을 짓는 기술이란 의미가 된다. 나무에 열매가 열리는 것은 자연이며, 사람이 시를 짓는 것은 인위(人爲)이다. 예술은 비록 인위(人爲)이지만 나무에 열매가 열리듯이 자연스럽게 작품을 창작하는 기술이란 뜻이다. 왜냐하면 인위(人爲)의 인(人)자와 위(爲)자를 합하면 거짓 위(僞)자가 되기 때문이다. 자연의 열매가 거짓 없는 ‘생명의 창조’이듯 예술작품도 거짓 없는 존재의 구현이 되어야하기 때문이다. 인위적 예술의 3대분야가 시와 노래와 춤 곧 시가무(詩歌舞)이다. 이 중에 시가 기본이다. 노래도 시에서 나오고, 춤도 시에서 연출되기 때문이다. 시는 곧 신의 마음이다. 김성구 시인은 그의 시집 『꽃잎편지』에서, “시인은 하나님의 마음을 복사하는 것이다.”라고 했다.
김성구 시인이 『저 큰 산이 숨는 날에도』라는 새로운 시집을 출간한다고 한다. 그런데 김성구 시인의 아호가 시목(詩牧)이란 것이 특이하다. 김성구는 시인이며 목사라는 것을 강조한 것이다. 그는 이 시집의 머리말을 “시를 지었다고 한다.”로 시작한다. 우리말 ‘짓다’의 한자어로는 눈에 보이는 물(物)을 짓는 창조(創造)와 영감을 형상화하는 창작(創作)이 있다. 창조는 하나님만의 특권이고, 창작은 시인의 특권이다. 창작예술은 시가무(詩歌舞)인데, 시를 음성으로 연주하면 노래가 되고, 육신으로 연출하면 춤이 된다. 어쨌든 창작예술의 근본은 시라는 것이다. 그래서 시를 영혼의 꽃이라고 한다. 이제부터 김성구의 영혼의 꽃밭을 거닐며 그 향기를 만나보기로 한다.
2. 자연과의 교감, 그 시적 형상화
‘시는 신화(神話)이다’라는 말은 시의 내용적 정의이다. 시의 내용, 즉 시는 무엇을 표현한 것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답이다. 그러니까 시의 내용은 ‘신화(神話)’라는 것이다. 신화는 무엇인가. 신화는 글자 그대로 ‘신들의 이야기’ 혹은 ‘신과의 대화’이다. 여기서 ‘신들의 이야기’란 서사시의 내용이며, ‘신과의 대화’는 서정시의 내용이다. 오늘날 서사시는 소설이 되었고, 시라면 서정시를 가리키는 말이다. 서정시는 영혼의 꽃이며 열매이다. 인간의 영혼은 식물성이라 생명의 꽃을 피우고, 그 결실인 예술작품이란 열매를 맺는다. 식물성인 영혼은 동물성인 육신처럼 죽어 없어지지 않는다. 육신은 죽으면 움직이지 않고, 영혼은 잠들면 활동하지 않는다. 이 잠든 영혼을 깨워 일으켜 활동하게 하는 것을 흥(興)이라 하고, 흥의 반대말은 망(亡)이다. 공자는 이 진리를 알고, “시에서 영혼이 깨어 일어나고, 그 영혼을 예(禮)라는 형식으로 세우며, 영적 교감이라는 즐거움(樂)에서 생명이 완성된다.(興於詩 立於禮 成於樂)”고 했다. 그렇다. 우리의 영혼은 시에서만 깨어나게 되어 있다. 이 영혼이 언어(言語) 속에 말씀(言)으로 잠들어 있다. 이 말씀 곧 시의 씨앗을 싹틔우면 신이 깨어나 신화의 세계가 열린다. 시라면 서정시를 말하므로 김성구의 시편들의 내용도 ‘신과의 대화’인 것이다.
창밖에는 아직 어두움이 내리지 않았다.
그가 내려오려면 반나절도 더 지나야한다.
그런데도 저 큰 산들이 숨기 시작한다.
세상이 혼란하게 돌아가는 꼴을 보기 싫어서 숨는다고 조상님들 중 누군가가 말했다.
요즘 들어 산들이 더 깊숙이 숨어드니 나그네는 길조차 물을 수가 없다.
산들은 검은 망토 벗어던지니 아침부터 온종일 회색망토를 걸치고 숨는다.
덩달아서 해도 숨고 도랑 건너 철이네 집도 회색망토를 두른다.
산들이 사라지고 들도 사라지고 땅도 사라진 여기에 나만 홀로 남겨져 있다.
내 앞에 떠억 버티고 서있던 저 산이 숨는 날에도
나 노래하며 가리라
저 큰 산 너머 뜸북새 노래하는 마을로.
- 「저 큰 산이 숨는 날에도」 전문.
위의 시는 시집 제1부의 표제가 된 작품이다. 김성구 시인은 “시인은 하나님의 마음을 복사하는 자이다.”라고 했다. 그러면 하나님은 누구신가. 출애굽기 3장 14절에서,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 - I AM THAT I AM”라고 하셨다. 여기서 스스로(自) 있는(然)이란 말씀은 자연(自然)이란 뜻이다. 하나님은 눈에 보이는 형상이 없으므로 시인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천지자연에서 하나님의 마음을 복사할 수밖에 없다. 하나님의 마음을 보여주시는 자연현상이, “창밖에는 아직 어두움이 내리지 않았다./ 그가 내려오려면 반나절도 더 지나야한다./ 그런데도 저 큰 산들이 숨기 시작했다.”라는 시간의 흐름이다. 그러니까 위의 시 첫 연은 하나님의 마음을 복사한 시간흐름의 이미지이다.
그러면 왜 지상의 대표적인 피조물인 큰 산들이 숨기 시작했을까. 그것은 “세상이 혼란하게 돌아가는 꼴을 보기 싫어서 숨는다고 조상님들 중 누군가가 말했다.”고 한다. 마침내 “산들은 검은 망토 벗어던지니 아침부터 온종일 회색 망토를 걸치고 숨는다./ 덩달아서 해도 숨고 도랑 건너 철이네 집도 회색 망토를 두른다./ 산들이 사라지고 들도 사라지고 땅도 사라진 여기에 나만 홀로 남겨져 있다.”고 한다. 이 둘째 연은 인위문화가 무위자연을 다 망가트렸다는 이미지이다. 왜 그랬을까. 현대에는 인위문화가 무위자연을 다 망가트렸기 때문이다. 모든 자연과 ‘철이네 집’까지 회색망토를 둘렀다고 했다. 회색망토는 오염된 공기를 상징한다. 공기는 생명을 위해 하나님이 주신 하늘(空)의 기운(氣)이다. 무위(無爲)를 신학에서는 신위(神爲)라고 한다. 결국 하나님이 창조하신 무위자연을 인위가 다 망가트렸다는 이미지이다. 오직 시인 혼자만이 남아서 “내 앞에 떠억 버티고 서 있던 저 산이 숨는 날에도/ 나 노래하며 가리라/ 저 큰 산 너머 뜸북새 노래하는 마을로.”라고 외칠 수밖에 없다. 시인의 예술적 사명은 예언자의 직분이다. 이것을 상징하는 것이 김성구 시인의 아호인 시목(詩牧)이다. 그러니까 김성구의 시 창작은, 하나님과의 대화를 내용으로 한 영혼의 꽃이며 열매이다.
마음이 꼭 그런 날에는
동해바다 작은 섬이 내게로 온다.
난 설악해변의 작은 섬이 된다.
연초록 향기 나는
이끼로 뒤덮인 바위덩어리
초록빛으로 위장하는 동해의 바위섬
그런 날이면
나, 섬이 되어
거칠 것 하나 없이 펼쳐진
수평선으로 달려간다.
-「작은 섬」 전문.
T. S 엘리엇은 현대, 곧 20세기를 황무지에 비유했다. 황무지란 초목이 없는 땅 곧 사막이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비유이다. 그러면 도대체 무엇이 풀 한 포기 없는 사막이 되었는가. 문학의 영원한 주제는 인간이다. 인간은 동물성인 육신과 식물성인 영혼을 모은 몸이다. 문법적으로 <모으다⤍모음⤍몸>의 과정을 거쳐 몸이 된 것이다. 그래서 ‘몸’이란 말은 인간에게만 쓰인다. 동물은 ‘살이 졌다’고 하지 ‘몸이 좋아졌다’고 하지 않는다. 동물은 육신과 영혼을 모은 몸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면 인간의 육신과 영혼 중에 어느 것을 사막에 비유했나. 당연히 식물성인 영혼을 황무지에 비유한 것이다.
영혼의 황무함을 느낄 때에 김성구 시인은 “마음이 꼭 그런 날에는/ 동해바다 작은 섬이 내게로 온다./ 난 설악해변의 작은 섬이 된다.”고 한다. 시 창작의 첫째 요소가 상상력(想像力)이며, 상상력의 우리말은 ‘그리는 힘’이다. 이 힘은 없음을 느낄 때 더욱 강력해지며, 마음속으로만 그리면 그리움이 되고, 언어로 그리면 시적 이미지가 된다. 영혼의 목마름을 느낄 때 시인은 바다를 그리게 되고, “난 설악해변의 작은 섬이 된다.”는 시적 이미지를 형상화한 것이다. 하나님의 마음인 이 바닷가에서 “연록빛 향기 나는/ 이끼로 뒤덮인 바위덩어리/ 초록빛으로 위장하는 동해의 바위섬”이 되어, “거칠 것 하나 없이 펼쳐진/ 수평선으로 달려간다.”는 이미지로 시는 마무리된다. 하나님의 마음을 복사하는 시인의 그리움을 형상화한 이미지이다.
백두산보다 높게 출렁이는
파도에 몸을 싣고 더 큰 바다로 떠나자
아웅다웅 살아가는 세상을 떠나
더 넓은 바다로 가자
고래와 상어가 친구하는
큰 바다로 가자.
칠천만 동포가 함께 타고 갈 큰 배를 만들고
너와 내가 노를 저어 대양으로 가자.
우리들이 꿈꾸는 동산
평화가 꽃피고 행복이 열리는 세상으로
힘차게 노 저어 가자.
- 「바다로 가자」 전문.
물이야말로 하나님의 마음을 인간에게 보여주신다. 하나님이 땅의 생명들에게 주신 빛도 안 보이고, 공기도 안 보이지만 물은 보인다. 인간에게 “물을 보고 물에서 배워라”라고 하신 것이다. 물의 흐름에 숨겨 놓은 하나님의 뜻을 제일 먼저 깨우친 사람이 노자(老子)이다. 그래서 노자는 “가장 좋은 삶은 물처럼 사는 것이다.(上善若水)”라고 했다. 물은 한사코 낮은 자리로 가서 바다에 이르러 수평을 이루고, 가슴으로 하늘과 하나가 된다.
위의 시는 시집 제2부의 표제가 된 작품이다. 하나님의 마음을 그리고자 한 시목 김성구는 “아웅다웅 살아가는 세상을 떠나/ 더 넓은 바다로 가자/ 고래와상어가 친구하는 / 큰 바다로 가자.”라고 한다. 그리고 “칠천만 동포가 함께 타고 갈 큰 배를 만들고/ 너와 내가 노를 저어 대양으로 가자.”라고 한다. 물의 흐름은 사람이 본받아야 할 하나님의 마음이다. 물(氵)의 흐름(去)이 사람이 지켜야할 법(法)이란 말이다. ‘너와 내가 노를 저어’는 우리가 서로 사랑하여 헌신하자는 이미지이다. 그래서 “우리들이 꿈꾸는 동산/ 평화가 꽃피고 행복이 열리는 세상으로/ 힘차게 노 저어 가자.”로 시는 마무리된다. 평화와 행복은 사랑하는 영혼의 꽃이요 성령의 열매이다.
바다는 구별하거나 차별하지 않는다. 바닷물이 “너 어디서 흘러왔니?”라고 물었을 때, “나는 낙동강에서 흘러왔다. 혹은 나는 섬진강에서 흘러왔다.”라고 하면, “넌 경상도 새끼, 넌 전라도 새끼구나” 라고 하지 않는다. 황하에서 흘러왔다고, 중국 놈, 나일에서 흘러왔다고 애급 놈 하지도 않는다. 인구가 바다처럼 흘러넘쳐도, 인종차별, 남녀차별, 종교차별, 빈부차별이 없어야 인간의 바다를 이룰 수 있다. 하나님이 지어주신 사람이란 이름을 서로 존중해야 한다.
3. 꽃으로 피어나는 영혼의 꿈
물의 흐름은 육체에 묻은 때를 씻어주고, 시간의 흐름은 마음에 묻은 때를 씻어 주어야 한다. 육체에 때가 묻는 것은 자연이지만, 마음에 때가 묻는 것은 인위(人爲)이다. 자연을 거부하고,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것이 인위(人爲)의 허물이다. 인위(人爲)는 “사람이 하다”라는 뜻의 거짓 위(僞)자에서 보듯 거짓이기 때문이다. 밤의 어둠 속에서, “아침이 되니”를 거부하고, 어둠의 성을 고집하는 것이다. 빛 속에서는 거짓을 꾸밀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도 새벽은 오고, 아침도 빛과 함께 반드시 오고야 만다. 자연의 밤은 낮의 짝이고, 어둠은 밝음의 배필이다. 그러나 인위(人爲)의 밤과 어둠은 마음에 덮여 있는 허물이다. 종교적으로는 죄(罪)라고 한다. 시간의 흐름과 함께 마음의 허물을 벗어야 하는데 벗지 못한다. 그래서 지날 과(過)자는 허물 과(過)자도 된다. 지난날의 허물은 벗어버리고 새사람으로 거듭나야 한다. 조선시대 양반들의 사대의식과 일본시대 친일파들의 주구(走狗)의식은 민족에 대한 죄과(罪過)이며 허물이기 때문이다. 이런 허물을 벗어야 사람의 영혼은 부활할 수 있다.
세모 네모 동그라미가
올망졸망 사랑방에 앉아
도란도란 희망을 꿈꾼다.
재잘재잘 행복타령
조잘조잘 사랑타령
방울방울 이슬방울
모여 모여서 냇물되고
흘러 흘러서 강물 되어
바다로 간다.
- 「올망졸망 사랑방」 전문.
위의 시는 시집 제3부의 표제가 된 작품이다. 위의 시 첫 연의 “세모 네모 동그라미가/ 올망졸망 사랑방에 앉아/ 도란도란 희망을 꿈꾼다.”라는 것은 어린아이들이 모여 지껄이는 이미지이다. ‘세모 네모 동그라미’는 어린이들 각자의 외모를 비유한 이미지이고, ‘올망졸망 사라방에 앉아’는 서로 다른 어린이들이 한자리에 모였다는 비유적 이미지이다. 서로 다른 어린이들이지만 ‘도란도란 희망을 꿈꾼다.’는 것은 다툼이 없이 희망을 그린다는 이미지이다. 이 첫 연의 이미지에서는 동심(童心)이 곧 천심(天心)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시심(詩心)이 천심인 시인만이 이런 동시와 같은 이미지를 그릴 수 있다. 시목이라는 그의 아호에서도 그의 시심이 곧 천심임을 보여준다. 그래서 그는 “시인은 하나님의 마음을 복사하는 자이다.”라고 말했던 것이다.
이러한 동심의 흐름이 “재잘재잘 행복타령/ 조잘조잘 사랑타령/ 방울방울 이슬방울/ 모여 모여서 냇물 되고/ 흘러 흘러서 강물 되어/ 바다로 간다.”라는 인생의 이미지로 형상화했다. 물의 흐름은 인생의 원형상징이다. 물의 흐름은 반드시 ‘냇물이 되고 강물이 되어’ 바다에 이르고, 인생의 흐름은 ‘방울방울 이슬방울’ 같은 어린아이도 반드시 바다와 같은 어른의 세계에 이르게 된다. 어른이 된 다음에도 ‘동심은 곧 천심’이라는 시심을 가진 시인이 되는 것이 시목 김성구의 꿈이라는 걸 위의 시에서 읽을 수 있다. 아름다운 시세계이다.
진흙으로 뒤덮힌 세상
빛을 볼 수 없는 침묵의 늪
꿈틀거리며 솟아오르는 동안
큰 양산을 들고
분홍 잎술을 살며시 연다
초록빛 희망으로 산다
꽃 중에 여왕이라 커다란 꽃이
- 「연꽃으로 피는 노래」 전문.
태초에 하나님이 창조하신 천지는 자연이다. 이 자연 속에 온갖 만물을 창조 하시고, 여섯째 날에, “하나님이 자기의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에서 보듯,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 하셨다. 하나님이 흙으로 지으신 육신은 눈에 보이는 자연이지만 영혼은 곧 ‘하나님의 형상’이라 눈에 보이지 않는다. 동물성인 육신은 움직임이 사는 것이고, 식물성인 영혼은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것이 사는 것이다. 이처럼 영혼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것을 예술이라고 한다. 시는 시인이 피운 영혼의 꽃이며, 그 꽃이 빚은 열매이고, 그 열매가 리듬을 타면 노래가 된다.
위의 시의 시제는 「연꽃으로 피는 노래」이다. 노래의 옛말은 ‘놀+애’였으며, ‘놀’의 뜻은 신(神)이고 ‘애’는 접미사이다. 그래서 일상어에 신이 들어가 가락이 살아나면 노래가 된다고 했다. 일상어는 사람사이에서 쓰는 의사전달의 도구이다, 도구에는 물성(物性)만 있고, 신성(神性)이 들어갈 수 없다. 하나님의 마음이 숨어 있는 말씀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러니까 위의 시 「연꽃으로 피는 노래」라는 시제만으로도 이미 시어의 경지에 이른 것이다. 그러므로 “진흙으로 뒤덮인 세상/ 빛을 볼 수 없는 침묵의 늪/ 꿈틀거리며 솟아오르는 동안/ 큰 양산을 들고/ 분홍입술을 살며시 연다”는 진흙탕에서 연꽃이 피어오르는 비유적 이미지만으로도 시어의 경지에 올랐다고 할 수 있다. 특히 “큰 양산을 들고/ 분홍입술을 살며시 연다”라는 두 행에서는, 이런 것이 바로 시적이미지라는 감탄이 나온다. 그러므로 “초록빛 희망으로 산다/ 꽃 중의 여왕이라 커다란 연꽃이”라는 마무리가 고개를 끄덕이게 한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다.
보고 싶은 사람에게 달려가고 싶다.
꿈꾸는 대로 이루고 싶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에게
사랑한다고 말하기 싫다.
하고 싶지 않은 일에 인생을 허비하기 싫다.
바람 부는 대로 뒹구는 나뭇잎이 되기 싫다.
날마다 도전하고
행복을 꿈꾸며
빨간 장미 한 송이를 식탁에 꽂아두고 싶다.
- 「장미 한 송이의 꿈」 전문.
위의 시는 시집 제4부의 표제가 된 작품이다. 시론에서 역사적으로 공인된 시의 3요소는 <1.정서(情緖), 2.상상력(想像力), 3.형식(型式)>이다. 정서는 마음(忄)이 푸르게(靑) 살아있는 실마리(緖)이고, 상상력은 ‘그리는 힘’이며, 형식은 눈에 보이는 형상 곧 이미지이다. 동물성인 육신의 봄인 청춘은 한번 가면 다시 오지 않지만, 식물성인 영혼 곧 마음은 겨울잠에서 깨어나기만 하면 그리는 힘인 상상력이 꽃도 피우고 열매도 맺는다. 이를 가리켜 “시에서 마음이 잠을 깨어 일어난다(興於詩).”고 공자는 말했다. 꽃과 열매는 상상력 곧 ‘그리는 힘’이 그려낸 형식인 시적이미지이다. 상상력(Imagination)이란 말과 시적 형식인 이미지(Image)라는 말은 그 어원이 같다. 마음속으로만 그리면 ‘그리움’ 곧 사랑이다. 시는 곧 사랑의 꽃이며 열매인 것이다. 시에서 마음이 살아나야 그 반대인 망(亡)으로 가지 않는다. 그것이 시인의 꿈이다.
위의 시 첫 연에서 “사랑하는 사람에게/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다./ 보고 싶은 사람에게 달려가고 싶다./ 꿈꾸는 대로 이루고 싶다.”는 것은 시인의 마음의 이미지이다. 이런 마음을 가진 사람이 시인이다. 그 다음 둘째 연에서 “사랑하지 않는 사람에게/ 사랑한다고 말하기 싫다./ 하고 싶지 않은 일에 인생을 허비하기 싫다./ 바람 부는 대로 뒹구는 나뭇잎이 되기 싫다.”에서는 인위(人爲)의 거짓을 저지르지 않겠다는 시인의 마음을 형상화한 이미지이다. 여기서 ‘바람 부는 대로’는 세상의 풍조를 비유한 것이고, ‘뒹구는 나뭇잎’은 세상의 풍조에 휩쓸리는 인심을 상징한 이미지이다. 그래서 위의 시는 “날마다 도전하고/ 행복을 꿈꾸며/ 빨간 장미 한 송이를 식탁에 꽂아두고 싶다.”로 마무리된다. 시집 제4부의 표제가 된 이 작품은 시목 김성구의 자화상을 형상화한 작품이라고 하겠다. 그의 문학관과 인생관이 한 편의 시로 형상화 된 작품이기 때문이다.
4. 나가는 말
이제까지 시목 김성구의 시세계를 둘러보며, 그만의 시적 발상과 이미지 형상화의 실상을 살펴봤다. 그 결과 다음과 같은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 그의 아호가 시인목사의 준 말인 시목이지만, 그의 작품은 기독교시인이 빠지기 쉬운 종교적 관념의 교훈적 설교에 치우치지 않고, 순수한 예술적 창작의 경지를 개척했다는 것이다.
인간 곧 ‘사람사이’라는 사회적 존재가 되는 첫째 조건이 ‘말을 쓰다’이며, 이 ‘말을 쓰다’의 명사형이 말씀이다. 이 말씀을 기독교에서는 성경의 말씀으로만 해석함으로써 성경의 말씀을 풀이하는 것이 시라는 오류에 빠지기 쉽다. 그런데 시목 김성구는 이 함정에 빠지지 않고, 시는 언어예술이라는 창작의 길을 걸었다. 그의 시를 읽으면서 성경적 관념이나 선교적 진술을 전연 찾을 수 없었다. 이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여기서 김성구의 아호가 목사시인의 준말인 ‘목시(牧詩)’가 아니라 시인목사의 준말인 시목(詩牧)이라는 것을 수긍하게 되었다.
사실 목사님이란 직분은 임기가 있다. 그러나 시인은 구약의 선지자나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진리의 종들이며, 인위적 임기가 없다. 그래서 시목 김성구 시인이야말로 새로운 시인목사임을 기쁘게 생각하며, 이 자리에서 ‘나가는 말’에 대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