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호를 외치지 않아도, 험하고 강한 말을 하지 않아도, 특정 세력을 지지하지 않아도, 또 설령 특정 세력을 질타한다고 해도 이것이 나의 정의이고 나의 선(善)이다. 어떤 이는 나와 같은 곳을 바라볼 것이고, 또 다른 이는 나를 두고 길을 잃었다 할 것이다. 사람은 혼자 살 수 없고 세상은 어울려 살아가는 곳이다. 나 역시 이 진리에 충실하고자 한다. 무소의 뿔처럼 혼자 가겠노라며 만용을 부릴 생각은 추호도 없다. 솔직하게 말하고, 거짓 없이 행동하는 것이 나의 평생 철학인 만큼 그것을 실행으로 옮기고자 한다. - 〈프롤로그〉 중에서
2022년 7월 23일. 아침 6시에 눈을 떴다. 충남 아산 경찰인재개발원에서 전국경찰서장회의가 개최되는 날이다. 회의 개최를 주도할 때는 이미 비장한 각오로 무장했던 터였지만, 막상 눈앞의 현실이 되고 보니 가슴 한편 불안함을 감출 수가 없었다. 불법행위나 죄를 짓는 일도 아니건만 ‘경찰’이라는 공직자 신분으로 벌인 전례 없는 일이었다. 회의 후 어떤 풍파가 나와 우리 동료들을 덮칠지 추측조차 할 수 없었다. 어쩌겠는가, 이미 주사위는 던져졌는데. - 〈7월 23일 오후 2시〉 중에서
윤석열 정부의 방침은 권위주의 정부로의 급격한 회귀이자 법치주의・민주주의 역행이 아닐 수 없는 일이었다. 경찰의 정치적 중립성을 약화하는 것이다. 1991년 경찰법 제정에 따라 내무부 산하 치안본부는 경찰청이라는 외청으로 독립되었다. 독재 정권의 수족 노릇을 한 경찰의 정치적 중립성을 보장하기 위한 것이었다. 만약 경찰국이 신설된다면 대통령에서 행안부 장관, 경찰청장으로 이어지는 수사 지휘 라인이 형성될 것이라는 우려와 지적이 나올 수밖에 없는 이유다. - 〈경찰국 신설, 정권의 경찰 장악〉 중에서
나의 사표 제출은 윤석열 정권의 불법・부당함에 대한 경찰 전체를 비롯한 국민적 저항이었으며, 경찰 조직의 자존감을 살리려는 노력이었으니까. 비록 경제적인 손실이 조금 있다고 하더라도 내 삶에서 그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을 터이다. 나는 공무원의 신분에서 급여를 받는 대가로 하고 싶은 말, 해야 할 말을 못 하는 구속에서 벗어나 자유인으로서 언제 어디서든 누구에게나 무슨 말이든 할 수 있는 ‘자유’가 더 소중하다고 느꼈다. - 〈미련 없이 경찰을 떠나다〉 중에서
윤석열 정부가 들어선 이후 나타난 이 같은 일들은 경찰 인사권에 이어 수사권까지 장악하려는 그들의 야심과 욕망을 가히 짐작하게 한다. 경찰국 신설로 경찰 인사권을 장악한 데 이어 국가수사본부의 수장을 검찰 출신으로 앉혀 옛 영화를 되찾겠다는 강렬한 의지가 한눈에 읽히는 일이었다. 전부 검수원복을 위한 밑그림이었던 것이다. - 〈‘검수원복’을 향한 밑그림〉 중에서
내가 다시 찾은 깡깡이 마을은 그때의 활황은 찾아볼 수 없었다. 세월을 따라잡지 못한 한가함과 느릿함이 다닥다닥 붙은 작은 건물들 위로 켜켜이 쌓이고, 좁은 골목들 사이로 구불구불 지나간다. 이런 한가함과 느릿함은 경찰의 시각으로는 당연히 우범 지역이다. 끊임없이 안전을 노크해야 하는 곳이다. 이곳의 치안 책임자로 선 나는 그 옛날 어머니가 망치로 삶의 희망을 두드렸듯이 이 마을의 안전과 행복을 두드렸다. 나의 두드림으로 이 마을이 조금 더 안전하기를, 내가 걷는 걸음, 땅을 울리는 구둣발 소리가 여전히 남은 이들의 가슴에 안심 신호로 전해지기를, 그리하여 주민들이 평안 속에 잠들 수 있기를 바라며. - 〈경찰서장으로 돌아온 ‘깡깡이 마을’〉 중에서
심리 생리 검사를 위해 김길태에게 질문을 시작했다. 사전 질문에는 거짓말탐지기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무당 방에 관한 질문에는 즉각적인 반응이 나타났다. 그래프가 요동치며 파형이 급격하게 오르내렸다. 범행 장소가 밝혀지는 순간이었고 김길태가 진범임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다. 거짓말탐지기 검사가 끝나자 김길태는 흔들리기 시작했다. 전문가의 조언대로 그와 라포르가 형성된 형사를 신문에 투입해 설득하기 시작했고 결국엔 범행 일체를 자백받았다. 피해자 집 다락으로 침입해 납치한 뒤, 무당 집에서 여러 차례 성폭행하고 시신을 찾지 못하도록 이웃집 대문 위 물탱크 속에 숨긴 후 그 위에다 백색시멘트를 덮었다는 것이었다. - 〈거짓말탐지기에 흔들린 범인〉 중에서
범인은 나름 주도면밀한 면을 보였다. 편지에 지문을 남기지 않기 위해 장갑을 끼고 글을 썼다. 또 자신의 신분에 혼란을 주기 위해 대학원까지 나왔으면서도 ‘총기 탈치범’이라고 의도적으로 틀린 단어를 썼다. 오른손잡이이면서도 왼손으로 비뚤비뚤하게 글씨를 썼고, 맞춤법도 일부러 틀리게 적어놓았다. 편지도 자신과 전혀 연고가 없는 부산에서 그것도 비교적 인적이 드문 물만골 쪽을 선택해 우체통에 넣었고 곧바로 서울로 올라갔다. 나름 경찰의 수사망에서 벗어나 수사에 혼란을 주고자 한 것이다. - 〈편지 한 통과 지문 그리고 과학수사〉 중에서
민주화된 대한민국에서 경찰의 과거 잘못을 연상시키는 경찰국을 되살리려는 이유는 도대체 뭘까? 법을 바꾸어 내무부 치안본부를 경찰청으로 독립시킨 유일한 이유는 경찰을 정권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게 하여 국민의 인권을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법에서 금지한 일을 특별한 이유도 없이 대통령령을 개정하여 경찰국을 신설해 경찰을 장악하려는 이유를 묻고 싶다. 과거의 역사를 보면 안다. 법을 위반해서라도 경찰을 장악하려는 그들이 지향하는 바가 ‘민주 정권’인지 아니면 ‘독재 권력의 강화’인지는. - 〈에필로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