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태도소작쟁의는 우리 근현대사에서 가장 모범적이고 성공적인 항일농민운동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 원동력은 생사를 함께한 소작 농민들의 굳건한 단결에 있었다. 물론 그 단결력은 그냥 만들어진 것은 아니었다. 거기에는 구심점이 필요했다. 암태도 소작 농민들에게는 서태석이라는 구심이 있었다.
우리가 역사적 인물을 통해 얻고자 하는 것은 ‘위대한 업적’만이 아니다. 한 시대를 살아가던 평범한 인물이 역사의 주체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겪었을 인간적 고뇌와 결단의 서사를 보여주는 것이 평전 서술의 진짜 목적이다. 그 점에서 서태석의 한평생은 남다른 서사를 보여준다. 가령 젊어서 사회운동에 헌신하다가도 나이가 들면서 현실과 타협하고 변절하는 건 예나 지금이나 흔한 일이다. 하지만 서태석은 그 반대의 길을 걸었다.
조선 말기에 태어나 한학을 공부하고 청년기에 일제 면장을 지내던 서태석은 중년의 나이로 항일 독립운동에 투신한 뒤, 이른바 ‘신사상’을 신념으로 받아들이고 자신보다 한참 젊은 사회주의자들과 동지적 관계를 맺으며 늦깎이 사회주의자로 거듭났다. 더욱이 그는 나이가 들수록 더 치열한 운동적 삶을 살았다. 한국 근현대사를 통틀어 그리 흔치 않은 일이다. 그 정점에서 서태석은 암태소작인회를 조직하고 소작쟁의를 성공적으로 이끌었으며, 조선노농총동맹, 조선농민총동맹 등 사회단체 간부로 활동했다. 이어 1927년에는 서울-상해파 제3차 공산당대회에 참여하는 등 사회주의자로서 궁극적 해방을 향한 길을 걸었다.
이처럼 서태석은 사회주의 민족해방운동가로서, 농민운동가로서 불꽃같은 삶을 살았다. 따라서 서태석은 ‘암태도 소작쟁의 지도자’를 넘어, 1920년대 서남해 지역을 대표하는 사회운동가, 민족해방운동가로 재조명되어야 한다. (머리말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