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속 문장 발췌〉
수필은 파편화된 기억을 이리 깁고 저리 기워 하나의 이야기로 재탄생시키는 작업이다. 오래된 기억 혹은 파편화된 기억이 수필가의 손에 들어가면 갈변한 꽃잎도 생명을 얻고, 울음이 섞인 생(生)도 느린 가락을 입에 물게 된다. 산들문학회 회원들의 글솜씨가 이러하다는 것을 에둘러 말하고 있다.(p.4)
지도교수 문윤정 〈축하의 말〉 중에서
운동경기 관람 자체를 즐겨하지 않는, 사지가 멀쩡한 내가 휠체어를 타는 사람들의 농구경기를 보며 많은 생각이 떠올랐다. 하체를 제대로 쓰지 못하는 사람들의 의지와 투지에 찬사를 보낸다. 듣고 보고 이동하는 데 장애가 있는 사람들도 의지만 있다면, 투지를 발휘한다면 보람 있는 삶을 꾸려갈 수 있는 사회·나라가 되었으면 얼마나 좋을까.(p.16)
-본문 중에서
흑백의 오묘한 조화들은 과거로의 여행처럼 익숙하다. 흑백사진이나 흑백영화처럼 추억을 불러온다. 지난날의 사진은 흑백사진이 많다. 컬러사진이 발달한 지금도 흑백사진을 찍기도 한다. 컬러사진에서 볼 수 없는 깊이감이 있다. 예전 흑백사진을 보고 있노라면 등이 굽은 친정엄마의 허리도 펴지고 갑작스럽게 떠나온 친구와 재회하는 마법 같은 시간낚시를 할 수 있다. (p.40)
-본문 중에서
그레고리처럼 평생 가족을 위해 살아오신 부모님을 돌보지 않는 것은 자식의 도리가 아니다. 그러나 그것이 단기간의 일로 끝나지 않는다면 문제가 달라진다. 부모를 모시지 않는 자식을 무조건 비난할 수는 없다. 부모가 짐이 되는 순간 삶은 피폐해진다. 불행한 개인은 불행한 사회를 만든다. 이 문제를 개인의 일로 치부하고 간과해서는 안 되는 이유다.(p.71)
-본문 중에서
나는 아버지 이름의 전화번호를 지울 수 없었다. 이 번호는 언젠가 아버지에게로 갈 수 있는 기억의 문을 여는 비밀번호다. 하나밖에 없는 사위 소식도 전하고, 작은애 결혼도 시켰노라 말씀드려야겠다. 그동안 못한 얘기가 너무 많아 한참을 쫑알거리는 딸의 이야기를 아버지는 말없이 웃으며 들어주시겠지.(p.90)
-본문 중에서
“사람이 백 년도 채워 살지 못하면서 천 년어치의 근심을 품고 사네.”
한나라 서문행의 글귀가 떠오른다.
그저 묵묵히 걸으며 자연을 보았을 뿐인데 우리 사이에 이미 있었던 듯 평화가 다시 왔다. 뭘 보태고 덧댈 필요 없이 욕심에서 오는 근심을 내려놓고 지금의 마음처럼 살아가리라.
(p.112)
-본문 중에서
쪼그려 앉는 게 편한 사람이 나만이 아니라는데 안도하며 반갑고 고마웠다. 무릎도 툴툴거리지 않으니 다행이다. 의사들은 쪼그려 앉으면 무릎에 무리가 간다고 의자에 올바른 자세로 반듯하게 앉길 권한다. 맞는 말일 것이다. 하지만 오래 익은 습관은 뼈와 근육에 각인되어 쉽사리 고쳐지질 않는다. 심지어 소파나 의자에 앉아서도 두 발을 끌어오려 포개고 앉는 것이 편하니 말이다.(p.144)
-본문 중에서
좁은 항아리에 담겨 돌아앉을 틈도 없는 유리 상자 속에서 열쇠 잠그는 딸깍 소리로 지난했던 삶을 끝낸다는 것이 허망하다. 이승의 삶은 넓은 공간이 허락되지 않은 삶이었지만 이제는 우주공간을 마음껏 유영하는 자유로운 영혼이 되기를 빌어본다.(p.154)
-본문 중에서
나는 원초적 고독에서 벗어나고픈 마음은 있었지만, 때론 간직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그 속에서 불편함은 컸어도 그리 오래가진 않았다. 고독을 통해서 나 자신을 새롭게 알게 된다면 나는 또 다른 삶을 찾아가게 될 것이다. 자기의 생각과 감정이 다르듯 고독은 각자의 몫이고 스스로가 만들어가는 것이다.(p.176)
-본문 중에서
올가을도 성균관에 들어섰다. 은행나무는 사각형 철제와 수많은 인파 속에 갇혀있었다. 나무에 안겨 듬직한 허리를 만져보던 기억이 났다. 한 번 보듬어 안아보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다. 나무도 아쉬운 듯 노란 잎을 날리며 나를 어루만진다.(p.215)
-본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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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노톤으로 그리는 풍경
황량한 벌판에 나무를 심는다. 나무도 사람처럼 간격이 필요하다. 몇 걸음이면 닿을 공간에 심기도 하고 조금 떨어진 곳에 나란히 세우기도 한다. 나무들은 정해진 자리에서 침묵한다.
펜촉이 가볍게 미끄러지며 선의 연결로 나뭇가지의 짙고 흐린 음영을 드리운다. 조붓한 길이 이어지고 그 길이 끝나는 곳에 뚝딱뚝딱 요란한 망치소리도 없이 아담한 집이 한 채 생겨난다. 흑백 음영의 조화가 아름답다. 펜화의 매력이다.
나는 화려한 원색으로 도드라지는 것보다 모노톤이 좋다. 옷들은 검정이나 회색의 무채색 계열이 대부분이다. 패셔니스타들은 립스틱으로 포인트를 준다는데 그마저도 어렵다. 고심하다 내가 좋아하는 파스텔톤으로 마무리한다.
집이 완성되었다. 검정 선으로 그린 나무들은 보는 사람의 느낌에 맡긴다. 이른 봄에 돋아난 연둣빛 잎으로 볼 수도 있고, 한여름의 진녹색이나 가을에 곱게 물든 잎을 느낄 수 있으니 이 또한 모노톤의 매력이다. 화려한 색감을 자랑하는 장미도 이 정원에서는 정숙하다.
엄청난 숫자의 화소로 선명함을 자랑하는 휴대폰 사진은 세월의 흔적을 여과도 없이 보여준다. 배우들의 커버력 강한 화장으로도 텔레비전의 화질을 따라잡기 힘든 시대이다. 더 다양해진 컬러의 조합들로 멀미가 날 지경이다. 나름 돌파구를 찾았다.
흑백의 오묘한 조화들은 과거로의 여행처럼 익숙하다. 흑백사진이나 흑백영화처럼 추억을 불러온다. 지난날의 사진은 흑백사진이 많다. 컬러사진이 발달한 지금도 흑백사진을 찍기도 한다. 컬러사진에서 볼 수 없는 깊이감이 있다. 예전 흑백사진을 보고 있노라면 등이 굽은 친정엄마의 허리도 펴지고 갑작스럽게 떠나온 친구와 재회하는 마법 같은 시간낚시를 할 수 있다.
이거다 싶게 내세울 게 없어서 그런지 그냥 묻어가는 정도의 위치가 좋다. 단색의 그림처럼 생각하기 나름으로 사는 내 삶의 방식이다. 때에 따라 흑백 톤의 차이처럼 굴곡이 있지만 안정된 느낌이다.
학창 시절에 미술부를 잠깐 한 것 빼고는 유명 화가의 전시회 몇 번 가 본 것이 그림의 이력이다. 누구나 알고 있는 화가의 그림이나 몇 점 식별하는 것이 전부인 좁은 나의 예술식견이고 보니 멋진 그림을 거침없이 완성하는 사람을 선망한다.
무언가를 배우면 준비 과정에 지친다. 소품이나 재료들을 놓고 시간이 지나면 이런저런 이유로 흥미를 잃고 시간 내기도 어려워 새로운 시작이 조심스러워진다. 그런 내게 펜화는 안성맞춤이다. 화선지와 펜만으로 작업 시작이다.
문제는 시간이 지날수록 그림이 생각만큼 나아지지 않는다. 더 정밀하고 섬세하게 표현하는 것에 대해서다. 선을 과감하게 이어야 하는데 멈칫거리면 완성도가 떨어지고 소심함이 보인다. 뭔가 더하고 빼는 일도 시간이 지나야 알게 된다. 그림도 인생처럼 전진과 후진, 그리고 멈춤이 필요하다.
여행을 하다 멋진 풍경을 보면 카메라에 담는다. 인물을 넣거나 풍광 그대로를 다양한 각도로 담고도 부족할까 봐 셔터를 누르고 또 누른다. 사진을 보다가 그림 소재를 찾는다. 풍경에서 빼고 싶은 부분을 빼고 나만의 풍경을 그리면 더없이 좋은 마무리다. 결국 사진은 그림으로 완성미를 더한다.
거리에서 무채색 속에 원색의 화려한 옷을 걸치고 지나는 사람에 시선이 머문다. 백발의 노인이 노랑과 파랑 체크모자에 체크바지, 빨간색 상의를 입고 있다. 젊은 날부터 고수한 스타일인지 모르지만 더 늦기 전에 한 번쯤은 시도하고 싶은 일을 지금 해보는 것은 아닐까.
버킷리스트의 하나로 나도 튀는 색에 걸맞은 디자인의 옷을 입고 거리를 활보하는 날이 있을지는 알 수 없다. 저 나이쯤에 그런 용기가 생길지 모르지만 생각만으로도 아찔하다.
어느 작가는 안개꽃을 기쁠 땐 기쁘고 슬플 땐 슬퍼 보이는 꽃이라 했다. 여러 가지 색의 안개꽃이 있지만 하얀 안개꽃이 좋다. 안개꽃의 색은 원색의 주인공 꽃들을 빛나게 하고 색들을 중화시키는 역할을 한다. 안개꽃 이름만으로도 촉촉한 생기를 불러온다.
누군가의 웃음 같고 눈물 같은 하얀 안개꽃 한 다발을 들고 회색도시를 걷는 상상을 한다. 아스라한 그리움 같은 모노톤이다. 그것은 화려한 외모만큼 강렬하기도 하다.
하루가 다르게 바뀌는 시대에 날이 갈수록 적응이 느려지고 귀찮아진다. 회색의 길 위를 달린다. 노랑 신호등이 켜지고 멈출 준비를 한다. 빨강 신호등이 켜진다. 멈춘다. 모든 색을 회색의 모노톤으로 바꾼다. 모노톤은 고요한 강물의 흐름처럼 편하다. 펜을 놓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