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 속으로
좋아하는 것과 별개로 소녀는 부모님의 이야깃거리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대부분 어른들의 이야기라 소녀가 흥미를 둘 만한 주제가 없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그랬다. 그런데 오늘 대화에는 소녀가 관심을 가질 만한 주제가 끼어 있었다.
“참, 앞집 돌아왔더라.”
엄마가 잊고 있던 것이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말하자 아빠가 밥그릇을 긁다 말고 엄마를 쳐다보았다. 소녀는 이미 뜬 밥을 반으로 나눠 입에 넣었다. _13쪽
정운은 서랍 속을 뒤지며 말했다.
“전학생 안 도망가니까 눈에 힘 좀 풀라고.”
“내가 막 전학생 째려봤어?”
그때였다. 소년이 의자를 밀며 일어섰다. 책 한 권을 들고 사뿐사뿐 걷는 것을 소녀의 눈동자가 쫓았다. 그런 짝꿍을 보며 정운이 픽 웃었다. _30~31쪽
소년이 인사했다.
“안녕?”
소녀가 얼른 대답했다.
“어, 안녕.”
서로 놀란 채 나누는 인사는 떨떠름하기 짝이 없었다. 소년의 안경 낀 시선이 아래로 떨어졌다. 소녀의 뽀얀 손이 보였다. 손끝이 빨갰다. _55쪽
“너 괜찮아?”
얼음 조각상처럼 굳은 인간 소년을 소녀가 살짝 건드렸다. 한 곳에 멈춰 있던 인간 소년의 검은 눈동자가 소녀의 눈동자와 마주쳤다. 인간 소년의 마른 입술이 꾸물거렸다. 소녀가 인간 소년을 한 번 더 건드리려 할 때, 인간 소년이 입을 열었다.
“꺼져.” _70쪽
소년의 대답에 조한이 오, 하며 맞장구를 쳐 주었다. 소년은 곧바로 태도를 바꾸어 심각하고 조심스러운 질문을 던졌다.
“너는 누가 널 당황스럽게 한 적 있어? 막 갈피를 못 잡게 한다거나. 그러니까 나는 잘못한 게 없는데 잘못한 것 같고, 얘는 화낼 일이 아닌 것 같은데 화를 내고, 근데 난 또 미안하고.”
조한이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싸운 거야? 그 맛있는 냄새랑?”
“그럴 리가.” _101쪽
“설마 그동안…… 너였어?”
소녀의 말에 딱딱하게 굳었던 소년의 몸이 마법처럼 부드러워졌다. 소년이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응.”
“일단 앉아.”
소녀의 말에 소년이 제자리에 주저앉았다.
“왜 거기 앉아? 침대에 앉아.” _127쪽
“숙모는 뱀파이어가 되고 싶으셨어요?”
“뭐, 죽고 싶진 않았으니까. 실은 죽은 것과 다름없긴 하지만 더는 아프지 않으니 결과적으론 만족한단다.”
숙모는 은빛 시선을 치마폭으로 떨어뜨렸다. 숙모의 표정을 본 소년이 나지막이 말했다.
“어떤 아이가 제게 자기를 뱀파이어로 만들어 달라고 했는데 거절했어요. 그래야 할 것 같아서요. 왜 뱀파이어가 되고 싶은지 알 것 같다가도 그게 그 애에게 좋을지는 확신이 안 섰거든요. 물론 그 애는 모든 걸 기억할 수 있겠지만요.” _144쪽
한참 소녀의 손목을 주무르던 소년이 순수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소녀가 그의 눈을 물끄러미 보다 입을 열었다.
“이제 여기 그만 와.”
“뭐?”
소녀의 나지막한 말에 소년이 모든 동작을 멈추었다.
“이렇게 갑자기 말해서 미안해.”
“갑자기 왜?”
“그 애가 많이 아파.”
소녀는 금방이라도 울 것 같았다. 소녀의 팔을 붙잡은 소년의 팔도 덜덜 떨렸다. _16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