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주의가 시작해
불평등한 무역 구조가 완성시킨
슬픈 열대
신토불이(身土不二)라는 말이 있다. 몸과 땅은 둘이 아니고 하나라는 이 말은, 인간은 자신이 사는 곳의 자연이 키운 산물을 먹으며 살 수밖에 없음을 표현한 것이다. 실제로 유럽인은 밀을 주곡으로 삼고, 아시아인은 쌀을 주곡으로 삼아 생존해왔다. 물론 인간은 식물이 원래 자신의 땅이 아닌 곳에서도 적응해 자랄 수 있도록 농업 기술을 발전시킴으로써 기근을 면하기도 하고, 식탁을 풍성하게 만들기도 했다.
그런데 이런 적응이 어려운 식물이라면 어떨까? 게다가 그 식물로 만든 음식을 도저히 끊지 못할 만큼 탐닉하게 되었다면 어떨까? 도서출판 따비의 신간 《기호와 탐닉의 음식으로 본 지리―축복받은 자연은 어떻게 저주의 역사가 되었는가》는 전 세계 소비자가 탐닉하게 된 열대 및 아열대 작물들의 지리와 역사를 기호식품, 상품작물, 제국주의, 플랜테이션, 자유무역, 상품사슬 같은 키워드를 통해 살펴보고, 소비자와 생산자의 관계,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이해하고자 한다.
유럽인이 반한 맛, 지도를 바꾸다
이 책에서는 차나무와 홍차, 사탕수수와 설탕, 카카오와 초콜릿, 기름야자와 팜유, 바나나, 새우, 포도와 와인을 다룬다. 이 중 지중해성 기후에서 자라는 포도와 그 포도로 만든 와인을 제외하면, 모두 열대 및 아열대 기후 지역에서 플랜테이션 농업으로 키워져 다국적 기업이 가공, 전 세계로 유통하는 식품들이다(새우 또한 열대 및 아열대 국가에서 플랜테이션과 다를 바 없는 양식장에서 키워진다는 데서 성격이 비슷하다).
애초에 차와 설탕, 초콜릿, 팜유, 바나나도 제 고향에서 그 지역 주민들의 신토불이를 이루는 음식이었다. 그러나 유럽인이 이 음식들에 맛을 들이면서 이 음식과 사람들의 운명이 바뀌었다. 중국에서 차를 들여오면서 누적된 적자를 메우기 위해 영국은 아편전쟁을 일으켰고, 영국이 홍차에 매긴 과도한 관세 때문에 미국은 보스턴 차 사건을 일으켜 독립을 향해 나아갔다. 유럽에서의 설탕 수요가 점점 커지자 짧은 시간 동안 사탕수수 수확과 설탕 가공에 집중적으로 투입되어야 하는 노동력을 확보하기 위해 아프리카에서 강제로 노예를 끌고 오는 삼각무역이 형성되었다.
유럽의 제국주의는 피식민지 수탈이 한계를 맞자 아예 식물을 이주시키기도 했다. 대표적인 것이 차와 카카오다. 영국은 중국에서 차를 수입하는 것으로 자국의 수요를 감당하지 못하자, 아예 차나무를 중국에서 빼돌려 자신들의 식민지 인도와 스리랑카, 그리고 아프리카에 이식했다. 온대 및 아열대의 작물이었던 차는 열대 지역의 고지대로 옮겨져 플랜테이션 작물이 되었다. 18세기 후반 아메리카의 카카오 농장에서의 끔찍한 노예노동이 지탄의 대상이 되자, 초콜릿 기업들은 아예 카카오나무를 서아프리카와 동남아시아로 이식했다. 더 이상 라틴아메리카로 노예들을 불러들일 수 없게 되자 카카오를 노예들의 고향인 아프리카로 가져간 셈이다.
코트디부아르와 네덜란드, 누가 상품사슬을 지배하는가
카카오를 세계에서 가장 많이 생산하는 국가는 서아프리카의 코트디부아르다. 2018년 기준 전 세계 카카오 생산량의 38퍼센트를 코트디부아르가 생산한다. 그런데 카카오 무역량이 가장 많은 국가는 네덜란드다. 카카오는 어떤 나라에 더 큰 부를 가져다줄까? 소비자가 구입한 초콜릿 가격 중에서 카카오 생산자는 6.6퍼센트를, 가공 및 분쇄업자는 7.6퍼센트를, 무역·중개업자는 2.1퍼센트를 가져가게 되는 초콜릿 상품사슬은, 자국에서는 카카오나무 한 그루 재배하지 않는 네덜란드에 코트디부아르보다 더 큰 부를 안겨준다.
유럽인들이 기호식품들에 탐닉하게 된 것은 원래 그 작물을 오랫동안 키우고 먹어온 열대 및 아열대 주민들에게 비극의 씨앗이었다. 그 비극은 식민 통치가 종식을 고하고 노예 제도가 사라진 지 오래인 오늘날에도 끝나지 않았다. 제국주의 시대의 설탕이 노예노동에 의해 생산된 것이라면, 현대의 자유무역 시스템에서 초콜릿은 아동노동에 의해 생산되고 있다.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전 세계 유통을 장악한 다국적 기업들이 ‘후려치는’ 가격에 카카오를 넘길 수밖에 없는 코트디부아르의 농민들은 인근 부르키나파소, 말리, 베냉, 토고 등에서 팔려 온 아이들을 가둬두고 일을 시키며 근근이 버틸 뿐이다.
이런 상황에 놓인 작물은 카카오뿐만 아니다. 1999년에 바나나 가격이 하락하자 델몬트는 자신이 경영하는 코스타리카의 대규모 플랜테이션에서 일하는 노동자 4,300명 모두를 해고한 후 30~50퍼센트 감소한 임금으로 그들을 재고용했다. 델몬트가 글로벌 소매업체인 월마트에 낮은 가격으로 대량의 바나나를 제공하는 글로벌 거래를 했기 때문이었다.
플랜테이션에서 이루어지는 단일 작물 재배는 생산자가 시장가격 변동에 민감하게 대응하지 못하게 할 뿐 아니라 자연을 파괴한다. 중앙아메리카에서는 바나나 플랜테이션으로 열대림이 파괴되고, 동남아시아에서는 새우 양식 때문에 맹그로브 숲이 벌채된다. 아마존 유역에서는 사탕수수 재배 때문에 숲이 파괴되며, 인도네시아와 말레이시아에서는 팜유 때문에 열대림이 대규모로 불태워지며 수많은 생물이 멸종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생산자와 소비자, 인간과 자연은 ‘연결되어 있다’
대학에서 예비 지리교사들을 가르치는 저자는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연결되어 있음’을 인식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특정 지역에서 생산되고 전 세계에서 소비되는 이 일곱 가지 음식을 통해 우리는 한 지역의 생산자들과 전 세계의 소비자들이 연결되어 있을 뿐 아니라, 인문의 세계와 자연의 세계가 연결되어 있음을 이해하게 된다.
저자는 열대 및 아열대 기후라는 지리적 특성이 역사에 끼친 영향과, 역사가 이 기후 지역에 드리운 그림자를 때로는 이야기로, 때로는 통계로 설득력 있게 펼쳐낸다. 또한, 다양한 지도와 표, 그래프, 도판은 제국주의의 과거, 현대의 상품사슬, 생산 및 교역의 흐름을 입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이를 통해 ‘연결되어 있음’을 이해한다면, 소비자로서 우리가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에 대한 혜안도 생길 것이다.
“내가 아이들을 사랑하는 것만큼 코트디부아르의 카카오 재배 농민도 자식들을 사랑합니다. 우리 아이들에게 초콜릿을 사주지 않을 수는 없을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현명한 구매를 통해 카카오 농부들을 지원할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 바나나 한 개, 차 한 잔, 초콜릿 한 조각처럼 아주 사소한 것들이 우리의 삶과 그들의 삶을 바꿀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