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이란 무엇인가? 대학이란 어떤 일을 하는 곳인가? 오늘날 위기에 처한 대학은 이런 근본적인 질문을 되뇔 수밖에 없다. 특히 우리나라 대학처럼 다중의 위기에 직면한 상황에서는 더욱 그렇다. 대학은 학자들을 위한 상아탑인가, 아니면 대중을 위한 ‘서비스 공간’인가? 대학의 이념은 시대의 변화에도 바뀌지 않아야 하는가, 아니면 시대가 변함에 따라 바뀌어야 하는가?
- v~vi쪽
대학의 이념은 무엇인가? 대학이 위기에 처할 때마다 대학의 이념에 관한 질문이 반복된다. 대학의 이념에 관한 질문은 대학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설정하고 이를 실현하기 위한 노력을 경주하려는 의도에서 제기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대학의 이념을 묻는 것과는 별도로 대학을 실제로 움직이는 힘은 무엇이며, 지난 900년 동안 대학이 실제로 어떻게 움직였는지를 파악할 필요가 있다. (중략) 하나의 대학 이념이 존재할 수 있다는 생각, 즉 시대, 지역, 집단 등을 초월해서 변하지 않는 대학의 이념이 존재한다는 생각은 결코 사실적이지도 않으며 바람직하지도 않다고 본다. 이 책에서는 대학의 보편적·초월적 이념을 밝히려고 노력하기보다는 시대마다 또는 지역마다 대학에 대한 다양한 이념이 존재했음을 드러내고자 한다.
- 12~13쪽
고인 물은 썩는다고 했던가? 13세기 들어 대학이 체계를 갖추고 안정화되자 대학의 여러 부작용이 서서히 나타나기 시작했다. 요한 하위징아가 ‘중세의 가을’로 묘사한 14세기에 들어서면서 대학은 여러 특권을 지닌 기관으로 자리를 굳혀 갔고, 교수들은 경제적 부와 사회적 지위를 갖춘 지배 계층으로 변모했으며, 학생들의 상당수는 학문·교육에 관심을 가진 ‘유랑하는 지식인’이라기보다는 관료, 법률가, 귀족 등 신·구 사회 엘리트 계층의 자녀들이었다. 유랑하는 지식인들의 학문·교육 공동체로 출발했던 대학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제도화되면서 사교와 신분 상승을 위한 유한 계층의 놀이터로 변질되었다.
- 45쪽
중세 대학에는 왜 취업 문제가 발생하지 않았는가? 두 가지 특징 때문이다. 첫째, 중세에는 대학 진학자가 극소수에 불과했으며, 둘째, 중세 대학의 전공이 매우 실용적이었기 때문이다.
- 62쪽
이런 맥락에서 근세 대학은 우리에게 대학교육의 성격에 대한 한 가지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 준다. 대학은 시대를 초월하여 변하지 않는 가치를 지니는 영원하고 초월적인 진리를 추구하는 곳인가, 아니면 시대와 사회 변화에 발맞춰 새로운 시대와 사회가 필요로 하는 새로운 지식인을 길러 내는 곳인가?
- 94쪽
근대 사회에서 실질적으로 작용한 대학의 이념은 고전적 텍스트 중심의 교육을 수행하는 중세 대학의 전통에서 벗어나 이성적 사유를 중시하는 철학, 실험과 관찰을 통해 검증 가능한 지식을 생산하는 과학, 그리고 과학을 적용해 인간 삶의 유용성을 증진해 주는 기술의 교육을 추구하는 대학이었다고 볼 수 있다.
- 151쪽
연구 중심 대학의 위상을 향유하기 위해서는 그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연구 중심 대학은 실험실, 실험 재료, 관련 장비, 연구 인력 등을 확보하기 위해 거대한 규모의 재정을 필요로 하고, 이런 재정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대학이 정ᐨ군ᐨ산ᐨ학ᐨ연 복합체의 한 축을 담당해야 한다. 그리고 대학이 이런 복합체에 참여하려면 정부나 산업체가 요구하는 성과를 단기간에 산출해 낼 수 있는 경쟁력과 수월성을 갖추어야 한다. 이런 연구 중심 대학의 작동 방식을 고려할 때 연구 중심 대학 유지와 발전의 추동력은 결국 돈, 즉 자본임을 알 수 있다.
- 203쪽
시대에 따라 대학의 원형이 달라질 수 있으며, 따라서 대학의 원형이 복수로 존재하는 것이 가능한 세계를 상상할 수 있다. 이런 세계에 입국하려면 탈플라톤적 비행을 감행할 필요가 있다. 이런 탈플라톤적 비행을 시도하는 용기를 지닐 때만 우리는 복수적인 대학의 이념·이데아가 존재하는 세계에 입국할 수 있을 것이다.
- 215~21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