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리얼리즘·모더니즘·전통주의 등 다양한 층위의 문학 활동을 통해 자신만의 독특한 시론을 펼쳤던 윤곤강의 시·비평을 상재하였다. 그가 활동했던 1930년대는 한국 문학이 근대 담론을 본격적으로 수용하고 그 방식에 대해 고민하는 시기였다. KAPF의 입지가 흔들리기 시작하며 대타 의식과 조선적인 것에 대한 고뇌로 인한 논쟁주의적 면모를 보였으며, 이는 한국 문학을 집단의식에 가까운 활동에서 개인의 의식에 기반하여 재조직된 활동으로 변모시켰다. 당대 문학적 흐름을 이끌었던 1900~1910년대 문인들이 일제에 의한 일본어 사용의 과도기적 시기에 유년·청년 시기를 보냈다는 점은 그들이 ‘조선적인 것’에 대해 관심을 가졌던 이유를 이해할 수 있게 한다. 또한 1930년대는 제2동인지기라 불릴 만큼 많은 문예지·동인지가 신생하기도 했는데, 특정 문예사조에 매몰되기보다는 KAPF 문학과 모더니즘 등 당대 담론을 폭넓게 용인하는 태도를 보였다. 이 시기에 윤곤강은 문단의 여러 분야에서 활동하는 동시에 활발한 작품 및 비평 활동을 통해 자신의 독자적인 시 세계를 추구하며 근대문학을 견인했던 인물이었다.
윤곤강의 시 세계, 현실의 합일:『윤곤강 시 전집』
윤곤강이 구축한 다채로운 시 세계는 그의 문학과 시대에 대한 신념에 기반한다. 첫 작품 「녯 성터에서」가 노래한 망국의 비애는 그의 당대 인식을 대변하는데, 이는 윤곤강이 ‘현실’을 극복 가능한 전망을 잠복시키고 있는 세계로서 이해하는 데에서 도출된다. “하염없는 과거의 추모에 우는 대신에 믿을 수 없는 미래의 동경에 번뇌하는 대신에 현실에 살고 현실에 생장하자”는 주장은 그가 지닌 현실 인식과 극복에 대한 강한 신념을 대변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첫 시집 『대지』는 봄과 겨울의 대립 지점에서 강렬한 생명의 힘을 노래한다. 혹독한 겨울을 견뎌내며 수평의 공간에서 생명을 부르짖는 것이다. 시인에게 봄이란 질서의 회복이자 중심의 복구이며, 나아가 상실한 낙원에의 향수를 드러내는 재탄생의 표식이었다. 『대지』의 시편은 지금의 대지가 “병들어 누어 일어날 줄 모르고 새우잠만 자는”(「갈망」) 절망의 공간일지라도 혹독한 계절을 넘어 언젠가 “언덕 풀밭에 노란싹이 돋아”(「대지」)나는 시원의 공간으로서 생탄하게 되리라는 시인의 믿음이 완연히 깃들어 있다.
『대지』가 미래의 재탄생을 꿈꾸는 시편을 담고 있는 반면, 두 번째 시집 『만가』는 윤곤강 내면 주체의 기록을 그려내고 있다. 죽음 의식을 주된 흐름으로 삼아 시대적 절망과 감옥 경험, 개인적인 증오와 분노 등이 시집 곳곳에서 고통의 형상으로 현현하는 것이다. 『만가』에서 시인은 근원을 알 수 없는 죽음 의식과 마주하며 존재의 의의를 탐구하였다.
세 번째 시집 『동물시집』은 모든 작품이 동물을 제재로 삼고 있는 우화시편이다. 『만가』에서의 격정이 『동물시집』에서는 감각과 감정으로 분리되어 비교적 안정기에 접어들었는데 이 과정을 거쳐 도달한 『빙화』에서는 『만가』의 불안과 절망이 이상적 삶의 의미를 되새기는 태도로 변모함을 확인할 수 있다. 『빙화』가 갖는 모더니즘과 리얼리즘의 변증법적 합일은 시인만의 독자적인 포에지를 획득하게 한다.
『빙화』까지가 해방 이전에 발간된 시집이라면, 『살어리』와 『피리』는 해방 이후 1948년에 발간된 시집이다. 『피리』는 고전 시가인 고려가요를 인유하여 외래의 것에 대한 반성과 전통의 재창조를 시도했으며 『살어리』는 바다의 이미지를 통해 첫 시집 『대지』로부터 직·간접적인 방식의 ‘공간적 진화’를 드러냈다. 해방 이후 윤곤강이 시도한 고전 인유는 모국어 회복의 의식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점에서 타 문인들이 동시기에 시도했던 고전의 현대화와는 차별성을 갖는다.
이 책을 통해 식민지 현실의 위력과 회유에 휩쓸리지 않고 새로운 시정신을 지닌 문학 주체로서의 자의식을 끊임없이 모색했던 윤곤강의 문학을 탐구하고, 우리 문학의 흐름과 현실을 직시하는 기회를 얻을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한다.